잘 쓰면 ‘약’ 못 쓰면 ‘독’, 무법의 행정지도
  • 정락인 기자 ()
  • 승인 2007.08.06 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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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에 뵈는 완장은 기중 벨 볼 릴 없는 하빠리들이나 차는 게여! 진짜배기 완장은 눈에 뵈지도 않어!”
 윤흥길의 소설 <완장>에서 술집 작부 부월이가 건달 종술이를 향해 내뱉은 말이다. 종술이는 저수지 감시원 완장을 얻어 차고 거들먹거리는 건달 중의 건달이다. 실제로는 대수롭지 않은 권력이지만 제왕처럼 행사했다. 그 횡포가 주민들을 공포에 떨게 했다. 완장의 힘이다. 한국에서 ‘완장’은 권력과 특권을 상징한다. 완장 문화는 지금도 변함이 없다. 팔뚝에 노란 완장을 차지 않았을 뿐 완장은 무소불위의 힘을 갖는다.
정부 당국이 실시하는 행정지도는 완장 문화의 부산물이다. 시대가 변했어도 관치 행정의 때가 그대로 묻어난다. 그래서 행정지도는 ‘필요 악’이다. 제대로 쓰면 ‘약’이고, 나쁘게 쓰면 ‘독’이라는 뜻이다.
행정지도는 법적 근거가 없이 광범위하게 시행되고 있다. 공식·비공식적으로 행정지도가 이루어진다. 행정 기관이 허가, 인가, 면허 취소 등 행정 처분을 발동하기 전에 권고하거나 지도하는 경우가 있다. 일정 기간의 홍보 기간을 두는 것이다.

최근에는 ‘비법정 계량 단위 사용 금지’ 지도
지난 7월1일부터 ‘비법정 계량 단위’ 사용을 금지하면서 1차로 행정지도에 나선 것도 하나의 사례이다. 비법정 단위를 계약서나 광고, 상품 등에 사용하면 처벌 전에 1차(행정지도)-2차(경고장)-3차(과태료 부과) 단계를 거친다. 기업에 대한 조업 단축 권고, 설비 조정 권고, 상품 가격 형성 지도, 에너지 절감 지도 등도 법적인 근거가 없다.
이덕연 연세대 법학부 교수는 “행정지도는 위험을 안고 있다. 무책임 행정이 야기될 수 있다. 공무원과 주민 또는 기업 간에 부적절한 유착 관계와 뒷거래가 있을 수 있다. 행정지도에 의해 피해가 발생해도 구제가 안 된다는 점도 문제”라고 지적했다. 
행정지도를 받는 입장에서 보면 △나쁜 행정지도 △좋은 행정지도 △필요한 행정지도 △잘못된 행정지도가 있다. ‘나쁜 행정지도’는 말 그대로 국민에게 피해를 입히는 것이다. 기업체의 가격 담합이 여기에 속한다. ‘잘못된 행정지도’는 필요하지만 과학적이지 못한 것이다. 영농 지도가 대표적이다.
‘좋은 행정지도’는 사회 전반에 이익을 주는 것이다. 사례로 승용차 요일제와 정보화 시험 마을 지정 등을 꼽을 수 있다. ‘필요한 행정지도’는 행정지도가 꼭 필요한 곳이 있다는 것이다.
비공식적인 행정지도는 집계가 불가능할 정도로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공식적인 행정지도는 주로 국가 차원에서 실시되었다. 캠페인 성격이 강하다. 공해 방지나 환경 보호 등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공식적인 행정지도는 박정희 정부 시절에 8백90건으로 가장 많았다. 전두환·노태우 정부는 7백43건, 김영삼·김대중 정부는 2백97건이다. 정권이 바뀌면서 점차 줄어드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박정희 정권에서는 주로 공해 업체의 폐수 배출을 규제하거나 이를 방지하는 데 치중했다. 공장주들을 대상으로 공해 방지 교육을 실시했다. 전두환·노무현 정권에서는 공해 업체에 대한 단속을 한층 강화했다. 공해 방지 기술을 무료로 지도하기도 했다. 강과 바다를 비롯한 수질 오염 방지에도 힘썼다. 공장 신설과 축산 단지 규제, 철새 보호, 농약 빈병 모으기, 등산로나 유원지에서 자연 보호 캠페인 전개 등 환경 보호가 주를 이루었다.

 
문민정부에 들어서서 눈에 띈 행정지도는 환경 문제이다. 1994년부터 ‘쓰레기 종량제’를 시범 실시하면서 환경 문제에 대한 경각심을 크게 높였다. 특히 음식물 쓰레기를 줄이기 위해 애쓴 흔적이 역력하다. 각 지자체에서는 위생 업소를 대상으로 ‘좋은 식단제’ 실시, ‘반찬수 줄이기 운동’ ‘모범음식점 지정’ 등 다양한 지도 활동을 펼쳤다.
대기 오염 방지를 위해 승용차 이용 자제 운동도 벌였다. 한편으로는 ‘오존주의보 제도’와 ‘환경 신문고’를 도입했다. 이처럼 역대 정권의 행정지도는 환경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한승연 고려대 행정학과 강사는 “행정지도가 마치 살아 움직이듯 변화했다. 처음에는 특정한 행정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행정지도에 그쳤다가 법률이 제정되기도 했다. 반대로 제도권에 있다가 행정지도로 바뀐 것도 있다”라고 분석했다.
한씨는 ‘장애인 고용 촉진’이나 ‘자동차 부제 운행’은 행정지도에서 법제화가 된 사례로 꼽았다. 국민의 자발적 참여로는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법제화를 통해 강제성을 띠었다.
반면 ‘아파트 분양 가격’의 경우 당초에는 건설교통부장관의 승인 가격제였으나 1982년부터 자율화되었다. 지금은 행정지도를 통해 분양 가격을 결정하고 있다. ‘농산물가격 유지법’도 마찬가지이다. 

금융 기관 행정지도도 잦은 말썽
하지만 부작용이 만만치 않다. 농수산물을 취급하는 중간 도매상들이 가격 담합을 통해 시장 질서를 어지럽히는 일이 자주 발생했다. 중도매인들이 담합해 조작된 가격을 통보하더라도 농민들은 실제 판매 가격을 일일이 확인할 수가 없다. 농민들만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는 구조이다. ‘아파트 분양 가격 자율화’도 마찬가지이다.
아파트 분양가 관리가 쉽지 않다. 분양가 상한제를 적용해도 건설업체가 미리 분양가를 부풀리고 있어서이다. 행정지도를 해도 소용이 없다. 천안에서는 행정지도를 따르지 않는 건설업체에 대해 시장이 일반 분양자 모집 승인을 보류한 일이 있었다. 시장이 직권으로 건설업체에 행정 처분을 내렸다. 이에 대해 건설업체는 행정 소송으로 맞섰고, 법원은 건설업체의 손을 들어주었다. 천안시장이 법적 근거 없이 건설업체의 일반 분양자 모집 승인을 보류했기 때문이다.

 
금융 기관 행정지도는 자주 말썽을 빚고 있다. 기업체들의 담합을 부추겨 애꿎은 소비자를 피해자로 만들었다. 통신·보험·유통·석유화학·학습지 등의 분야에서 광범위하게 일어나고 있다. 담합이 적발되면 기업체는 정부 탓으로 책임을 돌린다. 공정거래위원회는 정부 당국의 행정지도가 담합의 원인을 제공했더라도 법적 근거가 없는 것은 제재하겠다고 방침을 정했다. 금융 기관의 행정지도를 좌시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행정지도를 핑계 삼아 책임을 모면하려는 기업체들에 대한 경고이기도 하다. 
서울 영등포구 문래동에 사는 회사원 한동경씨(37). 한씨는 올해 여름 휴가가 마냥 즐겁지만은 않다. 해마다 경험하는 유원지의 바가지 요금 때문이다. 지난해에는 동해안의 해수욕장을 찾았다가 눈살만 찌푸렸다. 숙박 시설이 적다 보니 모텔이나 민박 등은 부르는 게 값이다. 2인 1실의 모텔은 평소보다 약 세 배가 비싼 13만원의 요금을 받았다.
동네 슈퍼에서 5백원이면 살 수 있는 생수가 2천~3천원이나 되었다. 음료수, 빙과류, 과자류도 마찬가지였다. 그늘 천막을 빌리는 데는 2만원, 고무 튜브는 1만원을 주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근처의 숙박 시설이나 음식점, 매점의 물건 값이 약속이나 한 것처럼 똑 같았다. 상인들 간 가격 담합이 의심되는 상황이다.
바가지 요금을 참다못한 한씨는 해당 자치단체에 단속이나 행정지도를 요청했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지자체 담당자는 “요금자율제 실시로 법적인 단속 근거가 없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라며 넘겼다고 한다. 숙박업주나 매점업주가 받고 싶은 금액을 마음대로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한씨는 “요금자율제가 피서객들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상인들을 위한 것인지 묻고 싶다. 단속이 안 되면 행정지도라도 나와야 하는 것 아니냐”라며 분통을 터뜨렸다.
피서지 상인들의 가격 담합은 과태료 부과 등 행정 조처가 가능하지만 ‘물증’을 찾기가 힘들다. 행정지도가 필요한 곳에 행정지도는 없었다.

 
잘못 짚은 영농 지도로 농민 애태우기도
잘못된 행정지도가 농민들의 가슴을 태우기도 한다. 전북 익산에서 농업에 종사하는 박 아무개씨(45)는 올해 양파를 심었다가 큰 손해를 보았다. 면사무소의 영농 지도를 믿고 양파를 재배한 것이 화근이 되었다.
빚을 내서 수천 평의 논과 밭에 양파를 심었다. 하지만 올해 양파 농사가 풍년이 들면서 가격은 폭락하고 말았다. 박씨는 큰 손해를 보고 본전도 건지지 못한 채 빚만 지고 말았다. 박씨는 “농민들은 당국의 영농 지도를 믿을 수밖에 없다. 여기저기 다니면서 모든 농가에 양파를 심으라고 말한다. 양파 심는 농가가 많고 풍년이 들면 양파 값은 당연히 떨어진다. 이게 무슨 영농 지도인가. 농민들 죽으라는 말이지”라며 불만을 토로했다. 
이처럼 정부 당국의 행정지도로 인해 피해를 당해도 하소연할 곳이 없다. 법적 근거가 없기 때문에 구제가 안 된다. 행정학자들은 행정지도에 법적인 근거를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한승연 강사는 “행정지도를 하기 전에 고지·청문 등의 사전 절차가 필요하다. 법에 위반되거나 부당한 행정지도에 의해 권익을 침해당한 경우에는 구제책이 마련되어야 한다. 행정 심판이나 행정 소송 등의 절차에 따라 손해 배상이나 손실 보상을 청구할 수 있는 법이 강구되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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