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 ‘평화협정’ 꽃놀이패 들다
  • 조 민 (통일연구원·선임연구위원) (sisa@sisapress.com)
  • 승인 2007.09.15 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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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정상회담 등 호재 이어져…핵 보유 인정받은 채 테러지원국 해제도 기대

북한은 비공식적 핵보유국이다. 북한의 궁극적인 목표는 핵보유국의 위상을 바탕으로 북·미 평화협정을 체결하는 데 있다. 지금 북한의 이러한 전략 목표가 점차 가시권에 들어오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북한 핵무기는 우리에게 위협이 되지 않는다. 북한 핵은 서울을 겨냥한 것이 아니다.” 분명 우리 사회 일각에서 이러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물론 이들에게 북핵은 전혀 위협의 대상이 아니다. 오히려 반외세 자주의 든든한 버팀목이자, 민족적 자부심의 원천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반대의 경우 북한의 핵무기로 인해 꿈속에서까지 가위눌림으로 압박받을 것이다. 북한의 핵보유를 미국의 대북 적대시 정책의 산물로 보면서 북한의 ‘자위권’ 차원에서 이해하고 두둔하는 입장도 자주 접하게 된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북핵 문제를 합리적으로 접근하기를 바라는 것은 무척 난감한 일이다.

핵시설 불능화 “섣부른 기대 금물” 비판도
부시 미국 대통령의 대북 정책은 실패했다. 클린턴 정부의 대북 정책을 유화 정책이라고 비판하면서 북한 핵문제에 대해 줄곧 적대적인 무시정책을 펼쳤고, 북한의 벼랑 끝 전술에는 되받아치기로 일관해왔다. 그러다 마침내 북한이 핵실험을 단행하자 대북 정책을 급선회해 부랴부랴 북핵 문제를 진화하는 데 나섰다. 그러나 상황은 클린턴 시대와는 달라져 이미 북한은 핵보유국이 되었고, 미국은 더 많은 대가를 지불하고서라도 북핵 문제를 해결해야만 하는 상황에 부딪혔다. 여기에다 한국 정부의 대북 정책과 한·미 간 엇박자는 북핵 문제를 더욱 꼬이게 만들었다.
한국 정부는 ‘북핵 불용’을 대북 정책의 제1 원칙으로 삼고 출범했다. 그런데 결과는 어떻게 되었는가. 미국의 대북 강경책을 거부하면서까지 한반도 평화를 염원하는 한국 정부의 진의를 김정일 위원장이 알아주기를 고대했지만, 결과적으로는 ‘북핵 용인’을 초래하고 말았다. 사실 북한은 핵문제에서 한국 정부의 입장을 고려할 이유가 없으며, 다만 남한은 민족 공조의 입장에서 북한의 핵 전략을 지지해야 하는 대상일 뿐이다.
최근 부시 대통령은 임기를 1년 반 정도 남겨둔 시점에 북한 핵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올인’하겠다는 의지를 보이면서 북한 김정일 위원장의 결단을 촉구하고 나섰다. 미국은 이라크·이란 문제에서 수렁에 빠졌다. 중동 문제는 쉽사리 수습될 상황도 아니며, 해결될 기미도 보이지 않는다. 중동 문제에 비해 북한 핵문제는 좀더 해결하기 쉬운 대상이며, 엉망진창인 미국의 대외 정책 속에서 그나마 가시적인 성과를 얻을 수 있는 사안이라는 점에서 부시 대통령은 입장을 바꾸게 되었다. 이에 올해 초 미국과 북한의 직접 대화를 통해 ‘2·13 합의’를 도출할 수 있었다.
‘2·13 합의’의 원제가 ‘9·19 공동성명 이행을 위한 초기 조처’라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사실 이 합의의 기본 골격은 이미 2005년의 ‘9·19 공동성명’에 나타나 있다. 그러나 당시 부시 행정부 내의 대북 강경파인 네오콘(신보수주의자)이 완전 퇴진하지 않은 상태에서 BDA(방코델타아시아) 문제를 걸고넘어지면서 ‘9·19 공동성명’의 합의를 이행하는 일은 더 이상 진전될 수 없었다. 그후 북한은 2006년 7월 미사일 발사, 10월 핵실험으로 승부를 걸었다.
부시 대통령은 북한이 핵을 폐기하면 한국전쟁을 끝낼 수 있다고 선언했다. 지난 9월7일 시드니 APEC 회의 중에 개최된 한·미 정상회담에서 “내 목적은 평화조약(peace treaty)을 통해 한국전쟁을 종결시키는 것이며, 끝내야 하고, 끝낼 수 있다”라며 “이를 위해서는 김정일 위원장이 그의 무기에 관해 검증 가능하도록 폐기해야 할 것이다”라는 입장을 밝혔다. 실제로는 평화협정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되는 ‘평화조약’이라는 말을 했지만 부시 대통령은 미국의 ‘선 핵폐기, 후 평화체제’ 보장이라는 원칙적인 입장을 다시 한 번 밝힌 셈이다. 그러나 미국이 핵 폐기라는 원칙적 입장을 강조했다고 해서 문자 그대로 북한의 핵시설·핵무기·핵물질 등 핵과 관련된 모든 것을 먼저 폐기해야 평화협정을 맺을 수 있다는 말은 아니다.
애초 북한 핵무기는 ‘2·13 합의’의 대상이 아니었다. ‘2·13 합의’는 북핵의 완전 폐기를 지향하고 있지만, 현실적으로는 북핵 확산방지를 목표로 삼아, 추가적인 핵무기 생산 및 핵물질 추출을 억제하는 수준에서 이루어진 북·미 간 타협의 산물이다. 즉, 핵폭탄과 핵물질 등의 과거 핵은 문제 삼지 않고 핵 프로그램 신고와 함께 미래 핵인 핵시설 불능화에 합의했다.
영변 핵시설의 폐쇄·봉인(shutdown·seal)이 초기 단계 조처라면, 다음 단계에서는 ‘현존 핵시설 불능화’ 및 ‘모든 핵 프로그램의 완전 신고’라는 두 가지 조처가 이루어져야 한다. 이 가운데 9월 초 제네바에서 개최된 북·미 관계 정상화 실무회의에서 현재 임시 가동 중지 상태인 영변 5㎽ 원자로를 비롯한 핵시설의 불능화에 대한 일정한 합의가 도출되었다. 이에 고무된 부시 대통령은 시드니 한·미 정상회담에서 ‘평화조약’ 운운하면서 김정일 위원장에 대해 더욱 통 큰 결단을 촉구하기에 이르렀고, 노무현 대통령은 부시 대통령을 밀어붙이는 모습을 연출하면서까지 종전선언 또는 평화협정을 부시 대통령이 다시 한번 확언해 주기를 바랐던 것이다.    

협정에서 한국은 북·미 들러리 될 수도
평화협정 문제는 ‘9·19 공동성명’에서 “직접 관련 당사국들은 적절한 별도 포럼에서 한반도의 항구적인 평화체제에 관한 협상을 가질 것이다”에 대한 합의를 계기로 현실적인 과제로 떠올랐다. 그런데 평화협정 문제에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는 우리의 소망과는 달리 평화협정은 미국과 북한의 입장과 태도에 달려 있다.
평화협정은 두 측면에서 문제가 제기된다. 첫째 당사자들이 문제를 합의하기가 쉽지 않다. 한국은 종전선언이나 평화협정이나 어느 경우에도 우리가 당연히 당사자라고 여기지만 미국과 북한의 입장은 우리와 다를 수도 있다는 분위기가 감지된다. 북한의 기본 전략은 북·미 양자 간 평화협정으로, 한국과 중국이 참여할 경우 북·미 중심 구도에서 들러리 역할에 그쳐야 한다는 입장이다. 당사자 문제에 대해 우리는 남북한 중심 구도에서 미국과 중국은 보장자의 역할을 맡아야 한다는 입장이라 할 수 있다.
최근 종전선언이 얘기되고 있는 워싱턴에서는 우리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들이 나오고 있는데, 이를테면 “한국전쟁은 북한과 유엔 간에 치른 전쟁이다”라고 하여 종전선언은 북한·미국·유엔 사이의 법적 해결의 문제로 접근하려는 의도를 내비쳐 의혹을 불러일으킨다. 이 경우 한국이 배제되거나 위상이 극도로 축소되는 상황이 현실화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점에서 우려를 낳고 있다. 
둘째, 평화협정을 언제 체결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초미의 관심사로 부각된다. 이는 북핵 폐기의 수준과 관련된 문제로, 미국이 북한의 핵 폐기의 어느 단계쯤에서 종전선언이나 또는 평화협정 논의를 시작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현재 미국은 장기간의 노력을 통한 북핵의 완전 폐기를 전제로 북·미 간 평화협정을 구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 북한의 비핵화 속도가 빠를수록 그만큼 평화협정 문제를 구체화시킬 수 있다는 입장이다. 말하자면 평화협정을 고려하고 있기는 하나, 논의와 체결 시기에 대해서는 타임스케줄이 확정되지 않은 상태라 하겠다. 물론 북한의 비핵화 조처가 ‘적절한’ 단계에 이르렀다고 판단될 경우 미국이 주도하는 평화협정 문제는 가속 페달을 밟을 수 있다.
비핵화가 충분한 단계에 이르지 못한 경우 즉, 비핵화 이전에라도 종전선언이나 평화협정을 논의·체결하는 것이 바람직할 수도 있다. 남북정상회담을 앞둔 노무현 대통령이 이러한 접근법을 선호하는 모습은 ‘시드니 해프닝’을 통해 드러났다. 이는 비핵화와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에 대한 한·미 간 접근 시각의 근본적 차이이자, 부시 대통령과 노대통령의 북핵 문제에 대한 정치적 입장의 차이라고도 하겠다.

손해 볼 것 없는 북한은 ‘표정 관리’만 남아
즉, 부시 대통령은 비록 낮은 수준일지라도 비핵화의 가시적 성과를 얻어야 하는 입장이라면, 노대통령은 남북한 정상끼리 만나 적어도 ‘평화선언’ 또는 평화에 대한 모종의 합의 형태를 이끌어낸다면 한반도 평화 구축을 위해 할 만큼 했다고 스스로 자부할 것으로 보인다. 노대통령은 지난 8월11일 기자간담회에서 북핵 문제가 잘 풀려가고 있다고 말하면서 경제 협력이 실질적으로 가속화되고 증진되도록 하기 위해 평화 정착이 가장 중요한 문제라고 말했다. 또 평화협정이 오는 10월2~4일 평양에서 진행될 제2차 남북정상회담의 핵심 의제라고 생각한다면서 “선언도 있을 수 있고 협상 개시도 있을 수 있다”라고 밝힌 데에서도 그러한 입장이 충분히 드러났다.
북한은 미국 국무부가 지정한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삭제되고 적성국 교역법 적용 대상에서도 벗어나기를 원하고 있다. 그러한 북한의 요구는 최소한 핵시설 불능화가 어느 정도 가시화된 상태에서 미국의 대응적 조처로서 기대할 수 있다. 북한은 핵시설 불능화 방식으로 원자로 자체에는 손대지 않고 원자로 제어장치를 들어내는 정도만 허용할지 모른다. 불능화의 방법과 함께 누가 불능화를 추진할 것이냐에 대해서도 협의를 할 것으로 보인다.
북한은 미국 등이 중심이 되어 불능화를 했으면 한다는 의중을 내비쳤다는 후문이다. 미국은 과거 옛 소련권에서 핵시설을 폐기할 때 적용했던 ‘넌-루거 법안’(Nunn-Lugar legislation)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는 러시아를 비롯해 옛 소련의 벨로루시·카자흐스탄·우크라이나 등의 신생 독립국들의 핵무기 해체와 폐기에 대한 지원을 골자로 하는 법안으로, 러시아의 경우 미국은 7년간 약 26억 달러 이상을 지원했다.
북한의 핵 과학자와 기술자는 3천명 정도에 이른다. 북한은 불능화 조처 과정에서 당연히 이들에 대한 보상을 요구할 것이다. 핵시설 불능화만 해도 산 넘어 산인데, 북한의 핵 실체를 완전히 까발리는 ‘모든 핵 프로그램 완전 신고’는 현재까지 협상 테이블에 올라와 있지도 않은 상태이다. 초조하고 마음이 급한 쪽은 부시측이다. 갈 길은 먼데 서산에 해가 진다. 이 국면에서 김정일 위원장이 가시적 수준에서 핵시설 불능화만이라도 결행해준다면 부시 대통령은 “드디어 핵문제는 해결되었다!”라고 외치면서 그의 외교적 업적을 세계적으로 과시하면서 이라크와 이란에서의 실패를 만회했다고 여길 것이다.
김정일 위원장은 영변 원자로를 반쯤 못쓰게 만든 상태에서 테러지원국 리스트 해제와 종전선언 정도는 챙길 수 있다고 계산할 수 있다. 김정일 위원장에게 평양 정상회담은 당장 손에 잡히는 현찰은 없지만 손해 볼 것 없는 ‘꽃놀이패’로, 초조한 부시의 눈길을 끌기 위해서라도 한껏 느긋한 표정으로 너스레를 떨 필요가 있다. 물론 그날 남쪽 손님의 말에 맞장구를 치면서 ‘한반도의 평화! 평화!’를 합창하자고 부추기는 장면의 연출도 기대된다. 

‘평화협정’에 대한 입장과 태도는 각 나라마다 다르다. 최근 중국의 선양 고궁에 모인 6자회담 대표들(위).

9월7일 시드니 APEC 회의 중에 회담을 가진 한·미 정상(왼쪽). 북한 김정일 위원장의 최근 모습(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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