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돈 주고도 생사조차 모르다니…”
  • 정락인 기자 (freedom@sisapress.com)
  • 승인 2007.10.08 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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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말리아 피랍 한국인 선원 4명 연락 두절…가족들 “배신당한 기분”

 

선장 한석호(40), 총 기관 감독 이송렬(47), 기관장 조문갑(54), 기관장 양칠태(55). 지난 5월15일 소말리아 해적들에게 납치된 ‘마부노호’ 선원 4명의 생사가 불투명하다. 지난 9월16일 가족들과 통화한 후 지금까지 연락이 끊겼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확인이 안 되고 있다. 정부 주무 부처인 외교통상부도 선원들이 처해 있는 상황을 명확하게 알지 못했다. 김영채 재외동포국 국민보호과장은 “신변에 이상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직접 눈으로 본 것은 아니니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라고 말했다.

가족들에 따르면 마지막 통화에서 선원들은 무척 다급했다고 한다. “해적들과 대화가 가능한 통역을 구해주고, 정부가 직접 협상에 나서도록 촉구해 달라”라는 말을 반복했다는 것이다. 또 “배에서 폭행당한 후 육지로 끌려간다”라며 자신들이 처한 긴박한 상황을 짤막하게 전했다. 가족들은 선원들이 육지로 옮겨가면서 더욱 위험해졌다고 믿고 있다.

선원들과 연락이 두절된 후 가족들은 습관처럼 바다를 찾는다. 혹시 살아 돌아올지 모른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기 위해서이다. 망망대해를 향해 “여보” “ㅇㅇ아빠” “송렬아”를 외쳐보지만 들려오는 것은 허망한 메아리뿐이다. 그리움에 복받쳐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아 통곡하는 것도 이제는 일상이 되다시피 했다.

가족들은 하루하루 지옥 같은 삶을 산다. 희망은 절망으로 바뀌었다. ‘살아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에 하루에도 몇 번씩 몸서리를 친다. 가족들의 생계도 막막하다. 지난 8월까지는 선주가 선원들의 월급을 입금시켜주었지만 9월부터는 그마저도 끊어졌다.

선원 부인들은 다니던 일자리를 그만두거나 해서 생계에 곤란을 겪고 있다. 납치 사건을 겪으면서 온갖 병이 들었기 때문이다. 한석호 선장의 부인 김정심씨와 조문갑 기관장의 부인 최경금씨, 양칠태 기관장의 부인 조태순씨, 이송렬 총 기관 감독의 숙모 이숙자씨는 폐인이 되다시피 했다.

정신적 고통이 육체적인 병으로 나타나고 있다. 가슴이 답답해져서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가 하면, 밤에는 수면제를 먹지 않으면 잠을 이루지 못한다고 한다. 한선장의 부인 김씨는 “가족들은 속이 새까맣게 타들어가고 있다. 살아 있다는 소식이라도 들었으면 좋겠는데 정부는 묵묵부답이다”라고 말했다. 

 

소말리아 해적의 한국인 선원 납치 사건은 그들의 생사 확인이 안 되는 가운데 장기화로 치닫고 있다. 납치된 지 1백40일이 넘었다. 한국인 납치 사건 중 최장 기록이다.

지난해 4월 소말리아 해적들에게 납치되었던 동원호 선원들은 1백17일 만에 풀려났고, 지난 7월19일 납치된 분당 샘물교회 아프가니스탄 선교단은 42일 만에 석방되었다.

소말리아 피랍 사건이 터진 후 선원 가족들은 침묵으로 일관해왔다. 언론과의 접촉도 피했다. “언론에 떠들면 협상이 더욱 어려워지니 우리를 믿고 조용히 있어 달라”라는 외교부 관계자의 말을 굳게 믿었기 때문이다.

“외교부 심의관이 돈 건넸다고 말했다”

한선장의 부인 김씨는 “납치 사건이 터진 후 이윤 외교부 재외동포심의관이 전화해서 상황을 설명해주었다. 이심의관은 지난 7월쯤에는 부산에 직접 찾아와서 가족들과 만났다. 현지 선주와 접촉해 협상이 잘 되고 있다. 곧 해결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얼마 후 가족들과 만난 자리에서 이심의관은 “8월8일 해적들에게 돈을 건넸으니 잘 해결될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구체적인 액수는 밝히지 않았다. 이 당시 언론에는 ‘소말리아 피랍 선원들이 곧 석방된다’는 보도가 나왔다. 어떤 방식으로든 정부가 직·간접으로 해적들과 석방 협상을 가졌고 상당한 진전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언론 보도를 접한 가족들도 석방을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석방 소식은 쑥 들어갔다.

그런 와중에 지난 8월19일 한선장이 부인 김씨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납치된 후 처음으로 연락을 해온 것이다. 그런데 한선장은 외교부 관계자와는 전혀 다른 말을 했다. “8월17일부터 19일까지 선원들이 해적들에게 집단 폭행을 당했다. 선원 중 일부는 고막이 터지고 이가 부러졌다. 돈을 주지 않으면 선원들의 신체를 자르겠다고 협박한다. 해적들은 정부와 직접 협상을 원한다. 차라리 소말리아 공해상에 있는 미 군함을 시켜 우리를 포격해 죽여달라”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다음날인 8월20일에는 선원 가족의 집집마다 전화가 왔다고 한다. 선원들은 한결같이 “정부가 협상에 직접 나서야 한다”라고 주문했다. 가족들은 어리둥절했다. 정부는 ‘해적들에게 돈을 주어서 협상이 잘 되고 있다’라고 했는데 선원들이 폭행당한 것은 앞뒤가 맞지 않기 때문이다.

석방 협상에 진전이 없자 이번에는 선원 가족들이 직접 행동에 나섰다. 전국해상산업노동조합연맹(해상노련)이 가족들을 도와주고 있다. 외교부와 해양수산부를 찾아가 협상 지연에 대해 항의했다. 곽인섭 부산지방해양수산청장을 만나 석방 노력을 당부하기도 했다. 해상노련은 인터넷 사이트 ‘소말리아 피랍 선원을 위한 시민모임’(http://www.gobada. co.kr)을 개설하고, 피랍 사태의 즉각 해결을 촉구하고 있다. 

상황이 이런데도 정부는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김영채 외교부 국민보호과장은 “국제적으로도 납치 사건에 대해서는 언론에서 다루지 않는다. 보도를 자제해달라”라고 말했다. 납치범들이 몸값을 더 올리려고 하는 것을 우려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원 가족들은 정부에 배신당한 기분이라며 불쾌감을 드러내고 있다. 언론에도 마찬가지이다. 아프가니스탄 사태가 났을 때는 정부가 총력을 기울여놓고, 소말리아 선원들의 문제는 나 몰라라 하는 데 분통을 터뜨린다. 이송렬 총 기관감독의 숙모 이숙자씨는 “아프가니스탄 인질들만 사람이냐. 우리도 사람이다. 국민을 차별해서는 안 된다. 정부가 협상에 적극 나서야 한다. 우리를 이방인 취급하지 말라”라고 목청을 높였다.

아프가니스탄 피랍 사건을 해결하는 데 일등공신 역할을 했던 국가정보원은 발을 쏙 뺐다. 소말리아 피랍 선원들에 대한 석방 노력과 관련한 질의서를 보내자 외교부로 떠넘겼다. 국정원 홍보관리관실 관계자는 “외교부가 정부 창구이다. 납치 선원과 관련된 것은 외교부 소관이다”라며 답변을 회피했다.

아프가니스탄 피랍 사건 때와는 완전 다른 모습이다. 아프가니스탄 사건 당시 김만복 국정원장은 현지에 나가 석방을 진두 지휘했다. 정보 기관의 수장과 비밀 요원의 신분을 노출시키면서까지 석방에 나섰다. 보도 자료까지 돌리며 자신의 공적을 자랑했을 정도이다.

정부는 하루빨리 선원들의 생사를 확인하고 가족들에게 알려주어야 한다. 선주인 안현수씨는 석방 협상에 나설 능력이 없다. 몸값을 지불할 재력도 없다. 그러니 또 정부가 직접 협상에 나서야 하는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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