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민해방군 깃발 아래 눈물 그칠 날 없었 다
  • 소준섭 (국제관계학 박사) ()
  • 승인 2008.03.24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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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베트, 1950년 중국의 무력 침공 후 굴욕의 세월

 
티베트가 다시 뉴스의 초점으로 떠오르고 있다. 티베트 민족은 찬란한 역사를 자랑하고 있다. 티베트가 역사상에 그 자랑스러운 위용을 드러낸 것은 7세기, 송첸감포 왕 통치 시기다. 이때 티베트(우리에게는 토번: 吐蕃으로 알려져 있다)는 네팔을 점령하고 운남의 일부 지방에서 조공을 받았다. 그리고 637년 송첸감포는 군사를 이끌고 토욕혼 지역을 공격해 당시 세계 최강인 당나라 태종의 군대와 일전을 치렀고, 이 전쟁에서 역부족을 느낀 당나라는 3년 뒤 당 태종의 딸 문성공주를 송첸감포 왕에게 시집보내면서 타협을 도모했다.
이 시기에 티베트의 고유한 종교였던 ‘본교’와 인도로부터 전래된 밀교 그리고 중국으로부터 전래된 대승불교가 결합되어 라마 불교가 형성되었다. 송첸감포 왕이 죽은 뒤 티베트는 북쪽으로 영토를 더욱 확장해 비단길을 점령했고, 당나라가 매년 토번 왕조에 비단 5만 필을 조공으로 바칠 정도로 강력한 세력으로 군림했다. 그 뒤 당나라가 비단 조공을 중단하자 토번은 764년 20만 대군을 파견해 당나라 수도인 장안을 함락시키기에 이르렀다. 이후 약 2백년에 걸쳐 토번 왕조의 전성기가 펼쳐졌으나 846년 왕이 시해되면서 877년 멸망했다. 티베트는 이후 많은 소국으로 분열된 채 장기적인 내전 상태에 진입하여 다시는 티베트 고원 밖으로 진출하지 못했다.

1911년 청나라 붕괴 후 사실상 독립 상태…1950년까지 유지
12세기에 들어서 정교(政敎)가 결합된 샤카 정권이 티베트를 통일한 이후 격로(格魯)(황모-黃帽: 노란 옷과 노란 모자를 썼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파의 5세 달라이 라마가 1642년 불교를 믿는 몽골인의 지원을 받으면서 영마(寧瑪)(적모:赤帽)파를 물리치기까지 5백여 년은 ‘각 교파의 통치 시기’로 불린다. 그 뒤 분리될 수 없는 티베트의 종교와 정치는 달라이 라마가 이끌어갔다. 달라이 라마란 몽골어로서 지혜의 바다라는 뜻이며, 달라이 라마가 죽으면 승려들이 온 나라를 뒤져 그의 영혼을 구현한 것으로 보이는 갓난 아기를 찾아내 새 달라이 라마로 세운다. 이 시기에 명나라는 티베트 정권에 대해 실권을 가진 세력을 왕으로 봉하는 책봉 제도를 시행했는데, 이를 근거로 중국은 이미 당시에 티베트가 중국의 일부분이었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이후 청나라 건륭제 때인 1716년, 청나라는 티베트를 공략해 1720년에 청나라의 군대가 진주했으며, 1750년 대신(大臣) 제도를 두고 최종적으로 티베트를 청나라의 보호령 아래에 두었다. 이때 티베트는 중앙 정부에서 파견된 대신이 군사와 외교를 책임지고, 중앙 정부의 책봉을 받은 달라이 라마와 반선(班禪-판첸:적모파의 지도자)이 공동으로 티베트의 종교 업무를 관할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1911년 청나라가 붕괴되면서 티베트는 사실상 독립 상태가 되었고, 1913년에는 몽골과 우호동맹조약을 맺고 상호 독립을 승인했다. 이러한 상태는 1950년까지 유지되었다.
중국 대륙에서 사회주의혁명이 성공한 이후, 1949년 10월1일 베이징 국영방송국은 “중국인민해방군은 반드시 시짱(西藏: 곧 티베트), 네이멍구(내몽골), 타이완을 포함한 중국 영토를 해방시켜야 한다”라고 발표하였다. 그리고 1950년 10월7일 인민해방군 4만여 명이 티베트 지역에 진격해 들어가 8천여 명에 지나지 않은 티베트 군대를 공격해 단 이틀 만에 항복을 받아냈다. 이 전투로 4천여 티베트 병사가 전사했다. 그 뒤 1951년 5월23일 중국 정부와 티베트 대표는 총 17조로 이뤄진 시짱의 평화적 해방 방법에 관한 중앙인민정부와 시짱 지방정부의 협약(약칭 ‘17조 협약’)에 서명했다.
이 협약의 요지는 시짱의 제도와 생활 방식을 존중한다는 전제 하에 중국 해방군이 시짱에 진주해 서남 변경 지역을 보위한다는 것이었다. 이해 9월9일, 중국의 3천여 해방군이 라싸에 진주하고 시짱의 다른 지역에도 2만여 명의 해방군이 진주함으로써 티베트 지역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었다. 그리고 1958년에 이르러 중국 정부는 우선 시짱 정부 관할 밖에 있는 쓰촨과 칭하이 성의 티베트인 거주 지역에 인민공사 제도, 즉 ‘대약진 운동’을 추진했다. 이는 현지 티베트인들의 강력한 저항을 불러일으켜 곳곳에서 격렬한 충돌이 발생했다. 1959년 이 무장 폭동은 티베트의 라싸까지 확산되었고, 중국 정부는 마오쩌뚱의 지시를 받아 해방군이 무자비하게 무력으로 진압했다. 중국 정부는 3월28일 시짱 지방의 정교합일(政敎合一) 정부에게 해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결국 달라이 라마와 10만여 티베트인들은 인도와 네팔 등지로 망명했고, 이어 인도에 망명정부를 세웠다. 그리고 1959년 6월20일, 달라이 라마는 ‘17조 협약’을 승인하지 않는다고 선포하고, 이 17조 협약이 중국의 무력의 협박 아래 체결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달라이 라마가 티베트를 떠난 이후 티베트에서는 판첸 및 일부의 세속과 종교 귀족들이 중국 정부와 협력하고 있지만, 일반적으로 판첸은 사실상 베이징 당국의 티베트 통치에서 꼭두각시로 간주되고 있다.

‘실질적 자치’ 요구에 중국은 ‘강력한 군대 주둔’ 응수

 

1980년대에 들어 그간 줄곧 티베트 독립을 주장하던 달라이 라마는 ‘티베트의 실질적 자치’ 요구로 태도를 바꾸었고, 천안문 사태 직후 한때 다시 독립을 요구하기도 했지만 1997년 이후 자신이 요구하는 바가 실질적 자치임을 다시 한 번 강조했다. 특히 최근에는 홍콩이나 마카오 방식의 ‘일국양제(一國兩制)’ 형식에 의한 티베트의 자치를 요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달라이 라마의 핵심적 요구 중 하나가 바로 중국 군대의 철수이고, 이에 대해 중국 정부는 역사적으로 일찍이 중화민국이 강력한 군대를 티베트에 주둔시키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날 중국의 티베트에 대한 주권이 도전받는 틈을 제공했다고 지적하면서 강력한 군대의 주둔이야말로 티베트에 대한 중국의 주권을 보장한다고 파악하고 있다. 따라서 달라이 라마의 이른바 ‘실질적 자치’ 주장은 군사적으로 중국과 대항할 수 없는 상황에서 사실상 독립을 발판으로 삼고자 하는 주장에 지나지 않는다고 폄하한다.
현재 티베트 망명정부는 티베트가 1912년 이전에 한 번도 중국의 지배를 받은 적이 없으며, 티베트의 영토가 오늘날 티베트 성만이 아니라 중국 내 티베트인들이 거주하는 칭하이(靑海) 성과 깐수 성 그리고 쓰촨 성의 모든 지역, 나아가 인도의 영토로 편입되어 있는 장남(藏南) 지역까지 포함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에 대해 중국 정부는 중국에의 티베트 귀속이 청나라를 비롯한 과거 중국 역대로부터 계승되어온 것이며 이는 1천년 전까지 소급될 수 있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이제까지 세계적으로 종교 문제가 단기간에 특히 무력으로 해결된 적은 거의 없다. 또한 중국이라는 이 거대한 국가가 역사적으로 2백~3백년마다 분열과 통일을 반복해왔다는 사실을 상기한다면 비록 지금 중국 정치·군사력의 위세에 눌려 티베트의 독립이 불가능해 보이는 것도 사실이지만, 언젠가 티베트가 독립할 시기가 반드시 오리라는 점도 분명해 보인다. 다만 그 시기가 짧은 기간 안에 오리라고 예측하는 것은 현 시점에서 지극히 어려울 듯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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