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한’ 투자에도 원칙 있다
  • 정은호 (제로인투자자문 대표) ()
  • 승인 2008.04.21 1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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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책임투자 펀드, ‘지속 가능한 발전’ 개념에 중점…안정적 수익 가능

 
워 런 버핏(77세)은 얼마 전 미국 상원 금융위원회에 출석해 미국 공화당이 주도하고 있는 상속세 폐지 움직임에 대해 “정부가 나 같은 사람들의 유산에서 더 많은 것을 취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회의 자원이 왕조가 세습되듯 대물림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능력 중심의 사회와 기회 균등의 가치를 지켜나가야 한다”라고호통을 쳤다. 또한 “지난 20년간 세법은 부자들이 더 부유해지도록 이득을 주었다. 부자들이 우주선을 타고 가는 동안, 평범한 미국인들은 러닝머신 위에서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었다”라고 비판했다.
개인적으로는 투자의 방법론 면에서 버핏의 방식에 대체로 동의하지 않는 편이지만 이런 대가의 면모 앞에서는 머리가 숙여지지 않을 수 없다. 이미 버핏은 2006년에 4백40억 달러에 달하는 자신의 재산 85%를 기부하겠다고 발표한 바 있다. 세계 최고가인 주당 13만 달러짜리 회사(Berkshire Hathaway)의 회장님답다. 마이크로소프트의 빌 게이츠가 거의 동일한 수준의 기부를 행하고 있다는 것도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역사의 진보에 대한 확신을 가지게 해준 이런 분들과 세상을 함께 할 수 있다는 데 감사하면서도 한편으로 이분들이 한국 사람이 아니라는 점에서 아쉬움이 느껴진다면 과한 것일까? 돈은 가치 중립적이다. 그 자체로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 지금까지 우리나라의 잣대는 재산이 모아진 과정보다는 그 사용 방식에 따라 선과 악을 구분해왔다. 그러나 재산을 모으는 투자의 과정도 선할 수 있다면 투자의 역사는 또 진보하는 것이 되지 않을까? 이를 투자에 적용한 기법이 사회책임투자(Socially Responsible Investment; SRI)다.
SRI 펀드로 통칭되는 사회책임투자 펀드는 1920년대 미국의 종교재단을 중심으로 술·담배·도박 등 이른바 ‘죄악 주식(sin stock)’에 대한 투자를 배제하는 투자 방침을 가진 펀드로부터 출발했다. 좀더 진보된 의미의 사회 책임은 단순히 윤리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지속 가능한 발전(sustainable development)이라는 개념을 핵심으로 하고 있다. 지속 가능한 발전의 공식적인 정의는 ‘미래 세대가 그들의 필요를 스스로 충족시킬 수 있는 능력을 손상시키지 않는 범위 내에서 현재 세대가 자신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발전’이다. 복잡해 보이지만 현재 세대뿐 아니라 미래의 세대에도 인류가 발전할 수 있도록 자원 및 환경 보전을 전제로 각 세대 간에 경제적 필요와 형평성을 고려하는 발전 방향을 의미한다. 이 지속 가능한 발전의 개념을 기업에 적용한 것이 기업의 지속 가능성(corporate sustainability)이다. 즉 기업 경영에서도 경제적 가치·환경적 가치·사회적 가치가 연관되도록 경영 목표와 전략을 수립해야 한다는 것이다. 유엔에서는 환경에 대한 책임을 다하고 인권이나 노사관계 등의 면에서 사회적 책임을 수행하며, 지배 구조가 우수한 기업을 선별하는 ESG(Environmental, Social and Governance) 원칙에 기초해 사회책임투자를 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이러한 역할에 충실한 기업이 결국 미래에도 지속 가능한 발전을 할 것이라는 취지에서다. 100년은커녕 10년 뒤의 생존 여부를 장담할 수 없는 기업들에 지속적으로 투자해야 하는 펀드 입장에서는 지속 가능한 기업을 선별해낼 수 있는 기준이 절실했고, ESG에 기초하는 사회책임투자야말로 이러한 목적에 꼭 들어맞는 기준이 아닐 수 없다. 실제로 사회책임투자 펀드들은 종목을 선정할 때 윤리 경영, 환경 경영, 지배구조 등을 종합적으로 살핀다. 이 과정에서 해당 종목의 모멘텀이나 업종 특성에 관계없이 윤리적인 문제가 발생했던 회사들은 우선 제외된다. 장기적인 생존 가능성이나 발전 가능성이 낮다고 평가하는 것이다. 선진국의 경우 이러한 목적을 가진 SRI 펀드가 전체 펀드 시장의 10% 정도의 비중을 보이고 있으며, SRI 개념의 확대와 함께 지속적으로 수탁 규모가 증가하고 있는 상황이다.

국내에 최근 보급…수탁 규모 작아도 지속적 증가 전망

SRI의 개념이 국내에 보급된 것은 최근의 일이다. 일반적으로 환경과 관련한 물 펀드나 대체 에너지 펀드 등은 SRI 펀드에 포함시키지 않지만 기업 지배구조와 관련한 펀드는 SRI 펀드로 구분한다. 우리나라 공모형SRI 펀드의 시초는 2005년에 설정된 SH운용의 ‘Tops아름다운SRI주식’ 펀드다. 처음에는 개념만큼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2006년 이후로 지속적으로 펀드들이 출시되고 있다. 전체적인 자산 규모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규모가 큰 펀드는 아직 없지만 국내 최대 기관투자가인 국민연금과 사학연금 등에서는 이미 사모를 통해 상당한 규모를 위탁 운용하고 있다. 공모 펀드의 수탁 규모가 이처럼 낮은 것은 아직 SRI 펀드에 대한 일반 투자자의 이해가 부족한 측면과 함께 과연 ESG 기준을 충족시키는 기업의 주식이 수익률도 높게 나타날지에 대한 의구심도 함께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국내에 엄격한 기준의 ESG 기준을 적용했을 때 투자 대상으로 선정될 수 있는 기업의 수는 대폭 줄어들 것이다. 또 포트폴리오가 시장과 상당한 차이를 보이기 때문에 일시적으로 시장 전체와 상당한 수익률 차이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기업의 지속 가능한 발전을 위해 환경과 사회와 지배구조 등의 요인이 점차 중요해질 것으로 믿는다면 SRI 펀드에 대한 투자를 고려할 만하다. 적어도 내가 투자한 기업이 사고 칠 확률은 높지 않으니까 마음은 조금 편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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