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의 장벽에 막혀 돌아오지 못하는 호국 영령들
  • 정락인 (freedom@sisapress.com)
  • 승인 2008.06.09 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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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군 전사자 유해 발굴 사업이 올해 국가 사업으로 격상되었다. 지금까지 2천4백여 구의 유해를 발굴해 신원이 확인된 80여 구를 국립묘지에 안장하는 성과도 거두었다. 하지만 유해 발굴 사업에는 곳곳에 장애물이 널려 있다. 유해 발굴 현장을 찾아가보았다.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13만7천8백여 명의 국군이 전사했다. 이 중 유해가 수습되지 않은 전사자가 13만여 명에 달한다. 이들은 지난 57년여 동안 이름 모를 산야 어딘가에 묻힌 채 조국의 손길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우리 정부는 이들을 방치하다시피 했다. 1957년에 국립묘지를 조성했지만 전사자의 유해를 찾는 데는 소극적이었다. 처음에는 먹고살기 어려워서 외면했고, 그 다음에는 발굴 가능성이 희박하다며 손을 놓았다. 이렇게 반세기가 넘도록 호국 영령들의 한을 애써 모른 척하며 지내왔다.

국방부는 지난 2000년부터 한시적으로 유해 발굴 사업을 하다가 지난해 1월1일 국방부 직할부대로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을 창설하면서 발굴 사업을 본격화했다. 지난 2월21일에는 ‘유해 발굴 법률’을 제정·공포함으로써 국가 사업으로 격상시켰다. 국가가 존재하는 한 유해 발굴은 영원히 추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발굴 초기에는 군 내부에서조차 ‘50년이 지난 시점에서 유해를 발굴할 수 있을까’ 하는 우려가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것은 기우에 불과했다. 지금까지 전국의 주요 전투지역에서 발견한 유해는 2천4백41구(5월31일 현재)다. 이 중 80여 구는 신원이 확인되어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전체 전사자의 2%에 불과하지만 발굴단의 땀과 노력으로 이룬 성과다. 보통 1백20개를 굴토해야 1구의 유해를 찾을 수 있다고 한다. 그만큼 발굴이 어렵다는 뜻이다.

유해 발굴 현장에서는 한국전쟁 당시 긴박하고 처참했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마땅한 장비 하나 없이 용사들이 굴토한 것으로 추정되는 개인호가 옹기종기 한 곳에 집중되어 있는가 하면, 그곳 개인호 속에서 M1탄이며 칼빈탄, 세열수류탄 등이 발굴되고 있다. 돌덩이에 짓눌린 유해도 있다고 한다.


전투 당시 기억하는 참전 용사나 지역 촌로들 찾기 어려워져

2000년 4월 첫 발굴에 나선 경북 다부동 328고지에서는 유해와 함께 플라스틱 삼각자가 나왔다. 거기에는 ‘최승갑’이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육군본부가 이름을 근거로 신원을 조회해보니 병적 기록이 나왔다. 50년 전에 결혼했던 부인과 딸도 살아 있었다. 그는 나중에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로 다시 살아나 국민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유해 발굴 사업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한꺼번에 일깨워준 사건이다.

지난해 1월에는 서울 동작동 현충원 바로 옆 빌딩숲에서 2구의 유해가 발견되었다. 서울 빌딩숲에 한국전쟁 당시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던 것이다. 현충원의 담을 사이에 두고 호국 영령의 운명이 엇갈려 있는 것을 보면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유해 발굴 사업에는 곳곳에 장애물이 널려 있다. 50년이라는 세월이 가장 큰 장벽이다. 유물은 시간이 지날수록 높은 값을 받지만 유해는 시간이 지날수록 부식되어 형체조차 알 수 없다. 유해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전투 당시를 기억하는 참전 용사나 실제 매장지역을 목격한 지역 거주 촌로들의 증언이 결정적이다.

그런데 이미 상당수는 사망하거나 고령으로 인해 기억이 선명하지 않다. 당시 인민군 부역자들은 제보 자체를 꺼리고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유해 발굴 확률이 낮아질 수밖에 없는 환경이다. 더욱이 전투 지역이 난개발 등으로 인해 유실되는 등 전사자 유해 찾기는 그야말로 사막에서 바늘 찾기가 되고 있다.

유해발굴감식단 이용석 발굴과장(육군 중령)은 “전사자의 유해 발굴은 시간과의 전쟁이다. 10년만 더 일찍 발굴에 나섰어도 호국용사들의 유해를 지금보다 몇 배는 더 많이 찾아냈을 것이다. 우리가 너무 늦게 찾았다. 호국용사들에게 머리를 숙이고 또 숙여서 용서를 빌어야 한다”라며 고개를 떨구었다.

이중령은 전투 지역이나 유해 매장지에 대한 보존과 통제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경북 문경 조령관문에는 드라마 <왕건> 촬영 세트장이 있다. 이곳은 임진왜란 당시에는 일본군에 맞서 조선군이 싸웠고, 한국전쟁 때는 국군 1개 대대 규모가 산화한 곳이기도 하다. 이런 곳에 ‘일본군 고시니 유키오가 머물렀던 곳’이라는 안내 표지판은 있어도 한국전쟁 당시 격전지라는 표지판은 없다. 유해발굴단에 따르면 이 지역에는 한국전쟁 당시 전사자들의 유해가 묻혀 있다고 한다. 지금은 복토되어서 드라마 촬영장의 저잣거리로 변했다. 유해가 묻혀 있는 곳이 확실한데도 발굴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고 있다.

미국은 나라를 위해 헌신한 자국민이면 끝까지 국가 차원에서 책임진다. 우리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미국은 지난 2003년 10월 JPAC(합동전쟁포로 및 실종자확인사령부)를 창설했지만, 이미 1973년부터 유해 발굴 작업을 해왔다. 그러면서 ‘조국은 당신을 잊지 않는다(You are not forgotten)’ ‘그들이 집으로 돌아올 때까지(Until they are home)’를 모토로 내세웠다.  

▲ 현충원에서 열린 전국 각지에서 발굴된 전사자 유해 합동 봉안식.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제공

발굴 단원들, 야영ᆞ주먹밥 식사 등 고충 많아

미국은 한국전쟁 당시 52만5천여 명이 참전해 5만4천여 명이 전사했다. 이 중 8천여 명의 유해를 찾지 못하고 있다. 미국은 유해를 찾기 위해 북한에 돈까지 주었다. 현재 15개 발굴팀에서 4백여 명이 활동 중이다. 우리나라의 발굴단보다 규모가 세 배나 크다. 우리 발굴단은 전체 1백20여 명으로 이 중 현장 인력이 95명 정도다.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은 한 구의 유해라도 더 찾아내기 위해 고심하고 있다. 발굴단 장병들이 직접 제보자나 목격자를 찾아 나서고 있다. 현재는 유해가 매장되어 있을 가능성이 있는 지역을 샅샅이 뒤지는 식으로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이용석 발굴과장은 “제보를 받아 휴일에 아내와 함께 산을 오르락내리락 하며 유해가 나올 만한 곳을 찾다가 ‘부부 간첩’으로 몰리기도 했다. 한국전쟁 당시 전투 상황을 아는 사람이 있으면 일일이 방문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발굴 단원들의 고충도 말이 아니다. 사병들은 자신들이 소속한 부대를 떠나서 이동하는 특성 때문에 자기 관물대에서 자본 사람이 거의 없다고 한다. 보통 잠자리는 발굴 지역 인근 부대를 이용하는데 내무실이 마땅치 않으면 연병장에서 야영을 해야만 한다. 발굴에 나갈 때는 주먹밥을 싸가지고 하루를 산중에서 보내며 발굴에 나서고 있다. 보통 전사자의 유해가 4천~6천m 고지에서 나오기 때문에 점심 시간을 줄이기 위해서다. 유해발굴단의 한 단원은 “힘들지만 호국용사들의 고생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국가를 위해 희생한 분들의 넋을 찾는 것에 보람을 느낀다”라고 밝혔다. 또 다른 사병은 “휴가를 나가서 관악산만 쳐다봐도 유해가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라고 말했다.

유해발굴단은 하루하루 시간이 지날 때마다 초조해하고 있다. 무엇보다 전국민적인 관심과 호응이 절실하다고 말한다. 또, 1년 중 6월에만 반짝 관심을 보이고 있는 언론의 이벤트성 보도도 연중 캠페인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언론, 특히 방송에서 정규적으로 ‘전사자 유해 찾기’를 방송하면 의외로 큰 성과를 거둘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홈페이지(www.withcountry.mil.kr)에 들어가면 유해 발굴 사업의 현황은 물론 그동안 발굴된 전사자의 유해와 유품 등을 볼 수 있다.


“국가의 책무이지만 전 국민적 관심이 절실”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은 전사자의 유해 소재를 제보한 사람에게는 15만~17만원의 포상금을 지급하고 있다. 전사자를 직접 매장했거나 목격한 사람, 전사자로 추정되는 유해를 발견했거나 들은 사람도 제보하면 유해 발굴 정도에 따라 포상금을 준다.

또, 전국의 군 병원에서는 발굴된 시신의 신원과 가족을 찾기 위해 무료 채혈 행사도 실시하고 있다. 한국전쟁이 일어난 지 오랜 시간이 경과되면서 신원 확인 방법으로는 DNA 검사가 최적이다. 유해를 찾지 못한 유족은 DNA 검사에 필요한 채혈을 해야만 유해를 찾을 수 있다. 유해가 발굴되면 축적된 DNA와 맞추어 나가면서 신원 확인 작업을 벌이고 있다. 유해의 신원이 확인되면 현충원 정식묘역에 안장하고 미확인된 유해는 무명용사탑에 모셔진다.

박신한 유해발굴감식단 단장은 “유해 발굴은 국가의 책무다. 호국 영령들이 조국의 품으로 돌아올 때까지 단 1%의 가능성만 있어도 우리는 끝까지 찾아갈 것이다. 국민의 관심이 높으면 높을수록 호국 영령들의 귀향을 앞당길 수 있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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