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남준 알려면 ‘그의 집’에 가라
  • 김남수 (무용평론가) ()
  • 승인 2008.12.09 0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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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아트센터, 개관 기념 페스티벌 ‘나우 점프’ 열어…생전 예술 세계 세밀히 ‘건축’

세금이 뭐에요?”

“갈취란다.”

“소비에트가 뭐에요?”

“그들은 공산주의자들이란다.”

“루즈벨트가 뭐에요?”

“그는 민주주의자란다.”

1981년 백남준이 환갑을 앞둔 나이에 제작한 일종의 그래피티 아트 <태내자서전>에서는 위와 같은 세 가지 질문이 툭툭 던져진다. 자신이 태어나기 몇 달 전에 나온 1932년 뉴욕타임스를 사서 펼쳐놓고 엄마와의 가상적 대화를 꾸며놓은 것이다. 백남준은 자궁 안에서 어둡고 축축하고 무서웠다고 적고 있다. 가장 편안해야 할 엄마 뱃속에서 근원적인 불안을 느꼈다고 능청을 떠는 것이다.

그런데 이를 그냥 백남준 특유의 재담으로만 여겨야 할까. 아니다. 백남준은 서울에서 태어나 도쿄에서 미학과 작곡을 공부했고 뮌헨에서 철학과 작곡을 또 공부했다. 쾰른과 다름슈타트에서 퍼포먼스, 비디오아트를 시작했으며 뒤셀도르프에서는 대학교수가 되었다. 뉴욕에 와서 지구촌 단위의 신명나는 위성 쇼를 펼치면서 세계적 반열에 올랐고 34년 만에 금의환향했다. 그리고 나중에 마이애미에서 사망했다.

▲ (위)는 미국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열린 ‘백남준 회고전’ 에 전시되어 만인의 찬탄을 이끌어낸 레이저 아트 작품이다. 왼쪽은 . 오른쪽은 TV 정원.

관람객 스스로 ‘백남준의 의도’ 알아채게 해

백남준의 삶은 사상과 음악으로 출발했던 유목민 그 자체였던 것이다. 어느 곳에도 정처를 두지 않은 플라잉 코리언(방황하는 한국인)의 전형이었다. 백남준 스스로 “정주 유목민(Stationary Nomad)이 좋겠다”라는 염원을 밝히기도 했다.

백남준아트센터가 2001년 백남준 스스로 ‘백남준이 오래 사는 집’이라고 명명하고 충분히 시간을 들여서 2008년 개관한 데는 그런 맥락이 숨어 있는 것이다. 즉 ‘실제의 백남준을 알아야겠다’는 지점에서 백남준아트센터의 역할을 부여받은 것이다.

백남준이 한국에서 살았던 1930년대와 1940년대는 전란의 시대였고, 그에게 정신적 외상을 입혔다. 백남준이 인터뷰 중에 종종 “자기 선택 없이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이야말로 인간 존재의 근원적인 부조리이며 폭력”이라고 언급한 것은 만만치 않은 백남준의 내적 고뇌와 분열이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백남준아트센터가 개관 기념으로 마련한 ‘나우 점프’는 그런 불행한 시대에도 긍정과 웃음, 낙천성의 에너지를 기계와 생명의 충돌-조화에서 찾은, 스스로 ‘풍요로운 결합’ ‘비빔밥 미학’이라고 평한 백남준의 놀라운 예술 세계도 세밀히 들여다보고 있다. 그와 동시대에 살았던 무용가 최승희의 다큐멘터리와 백남준 이후 세대인 중국 현대 회화가 전시관에 나란히 걸려 있는 것도 바로 그런 까닭이다.

그런데 처음 백남준아트센터를 찾은 관객들은 가벼운 현기증을 느끼기 일쑤이다. 뭐가 너무 많다는 것이며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른다는 것이다. 가만히 보면 백남준과 마르셀 뒤샹이, 백남준과 존 케이지가 한판 치열한 대결을 하고 있다. ‘백남준이 왜 중요하며, 그의 비디오아트는 실재적으로 무엇인가’를 정공법으로 다루고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백남준이 세계적인 비디오아티스트이고, 그래서 유명하다는 일종의 유치한 동어반복에 머물렀다면, 백남준아트센터는 백남준의 예술을 엄밀한 지평 속에서 탐문하고 재해석하려는 것이다. 이는 국내 예술계에서 거의 없던 시도이다. 예를 들어 전시관의 바닥에는 길을 인도하는 화살표도 없다. 그러니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하는 존재론적 질문을 관객 스스로 본의 아니게 되묻게 되는 것이다. 전시장은 백남준이 그랬듯이 적극적으로 시간 속에서 길을 잃기를 권하고 있다. 길을 잃음으로써 새로운 길을 내는 것이다.

“시대를 앞서간 예술혼 잘 살린 전시” 호평

그러고 보면, 마치 구멍이 숭숭 뚫린 에멘탈 치즈 같은 것이다. 벌레 구멍이 뚫려 있어서 신석기 시대가 1960년대와 연결되고 2032년의 소망이 오늘의 현실로 바뀌는 것이다. 가령, 알렉산더 로드첸코가 1925년에 제작한 <노동자를 위한 의자>에 앉아서 문득 <TV 정원>을 내려다볼 수도 있고, 피와 동물의 시체와 포도주가 뒤엉킨 유럽의 카니발을 보다가 <TV 부처>를 갑자기 맞닥뜨리는 것이다. 여기서 암시되는 것은 백남준의 비디오아트가 유쾌한 시간 여행과도 관련이 있다는 점이다.

백남준의 예술은 시간과 빛, 차원, 신체적 실천 속에서 만개했으며, 이런 코드들은 동시대 예술의 가장 뜨거운 장면과도 통하면서 흐른다. 그래서 전시실 2층과 신갈고 체육관 그리고 지앤아트 스페이스에서는 로메오 카스텔루치의 <천국>을 설치한다거나 뱅상 뒤퐁의 <외침>을 공연했다. 료지 이케다의 빛, 백남준의 레이저, 세르지오 프레고의 벽 위를 걷기, 윌리엄 포사이스의 움직임 증폭 등등.

이렇게 복합적이며 잠재적인 ‘백남준의 진실’을 보여주는 전시물과 공연되는 퍼포먼스들은 영주 부석사를 천천히 오르기도 했고, 안동의 하회마을 물굽이를 떠올리게도 한다. 목수 조전환은 장자의 통나무와 홀로그램을 이해한 전시 공간을 구상했으며, 이영철 관장은 극한까지 밀어붙여 비결정과 우연의 놀이를 거듭했다. 만들고 부수기를 거듭하면서 내부의 장력이 있는 주름 공간을 만들려고 한 것이다. 백남준아트센터가 결코 쉬운 방법이 아닌 이런 낯선 방법으로 전시물을 만든 것은 백남준이 결코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그의 걸작이나 대표작을 나열하는 기존 큐레이팅 방식으로는 백남준이 품었던, 시대를 앞서간 사고와 장르를 뛰어넘는 그의 예술혼을 제대로 담을 수 없다는 깨달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선(禪)은 반(反)아방가르드적이며 반개척자적이며 반케네디적이다. 선은 아시아의 빈곤에 책임이 있다. 아시아의 빈곤을 정당화함이 없이 어떻게 선을 정당화할 수 있는가.” 백남준은 불교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 선(禪)이 역사 속에서 실행한 것을 질문하고 비판한다. 이쯤 되면 <TV 부처>가 다르게 보일 것이다.

백남준 페스티벌 ‘나우 점프’는 예술을 ‘풍경’으로 만들지 않고 ‘현실’을 상대하기 위해 괴력난신했던 아방가르드 예술도 이렇게 재미있고 자극적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프랑스의 세계적인 퍼포밍 아트 잡지 <무브망>은 ‘나우 점프’에 대해 “나는 지금 눈이 완전히 번쩍 뜨이고 사로잡혀 버렸다”(우나 더크워드 편집인)라는 평을 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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