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 공간’에서 본 세상
  • 조철 (2001jch@sisapress.com)
  • 승인 2009.03.10 0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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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루와 정, 유럽의 중세 도시에서 찾아낸 건축과 삶의 이야기

국내 어디를 가서든 문화재로 남은 루(樓)와 정(亭)을 만나는 일은 참 반가운 일이다. 전통 건축물에서 문화재 감상이나 할 것 같으면 별 감흥이 없을 것이지만, 루나 정에 앉아 자연을 보고 세상을 보는 일은 정말 색다른 경험을 주기 때문이다. 루나 정은 그렇게 앉은 이의 눈이 되어주고 마음이 되는 공간이다.

<공간의 상형문자>를 펴낸 건축가 김석철씨도 “루와 정은 한국인의 자연을 보는 마음, 세상을 보는 눈이 만든 집이다”라고 말했다. 서양 건축에 루와 정과 같은 건축 형식은 없다. 저자는 한국 문명 특유의 공간인 루와 정은 자연과 인간 사이의 간극이 없는 이 세상과 저세상이 만나는 공간이라고 설명한다.

이 책은 범영루, 덕회루, 경회루, 부용정, 애련정, 소쇄원, 청암정, 영남루, 만대루, 방화수류정 등을 감상적 접근이 아닌 한국 역사와 문화를 바탕으로 한 이해와 비판의 관점에서 탐색했다. 또한, 유럽의 천년 공간인 중세 도시를 살펴, 정지된 역사가 아닌 시대가 원하는 변화를 수용하면서 진화해온 중세 도시의 진면목을 당시의 역사와 문화를 곁들여 설명했다.

▲ 경북 안동 병산서원의 만대루(위)는 바람 사이를 나는 듯한 경지를 느끼게 해준다. 일본 교토의 가쓰라리큐(위 왼쪽) 실내는 자연과 교감이 잘 이루어져 사계절 아침과 낮과 저녁이 서로 다른 공간 형식으로 나타난다. ⓒ생각의나무 제공

루는 지나는 곳, 정은 머무는 곳

건축가로 50여 년을 살아온 저자는 “건축은 삶에 대한 사유에서 나왔을 때 진정한 가치가 있다”라면서, 오랜 역사를 함께한 공간인 우리의 루와 정과 유럽의 중세 도시를 아는 것은 시간과 존재의 의미를 깨닫는 일이라고 말했다.

특히 이 책에서 한국의 루와 정에 대해 새롭게 눈을 뜨게 되는 것은 여행지에서 얻을 수 있는 기쁘고 즐거운 경험과 같은 일이다.

루와 정은 지붕과 기둥 사이 모두가 문이고 창인 집이다. 루는 지나는 곳이고 정은 머무르는 곳이다. 모든 루와 정이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제대로 만든 루와 정은 신비로운 경험을 하게까지 한다. 저자의 경험을 빌리면, 경회루의 내부 공간은 바깥에서 본 경회루와는 또 다른 세상이다. 경회루 바깥에서 보는 인왕산과 북악산은 각기 다른 산이지만, 경회루 안에서 보는 인왕산과 북악산은 하나로 어우러진 산이다.

저자는 창덕궁 후원 부용정과 애련정의 안에 들어가 앉아보지 않고서는 그 멋을 알 수 없다고 말한다. 정자는 안에서 밖을 보는 곳이기 때문이다. 부용정과 애련정에 앉으면 밖의 풍경이 다가온다. 눈이 아니라 몸으로 아침과 저녁, 봄과 여름이 다른 세상인 것을 부용정과 애련정은 알게 해준다는 것이다.

한국 전통 건축에 대해 비판도 서슴지 않는 저자는 병산서원을 안내하며 말한다. “만대루를 만든 사람은 건축가도 아니고 건축주도 아니다. 병산서원을 지을 때 그들이 한 일은 중국 사례를 목수에게 말해주는 수준이었을 것이다. 만대루는 설계가 아니라 시공에서 정수를 이루었다. 중국과 일본 건축의 성취는 건축가가 이룬 것이지만 한국 건축의 걸작은 시공자가 이룬 것이다. 건축 설계에 관한 한 한국 전통 건축은 삼류에 머물러 있다. 한국 전통 건축의 아름다움을 유지한 사람은 위대한 목수들이기 때문이다.”

병산서원을 찾는 사람들은 그것을 아는 듯하다. 병산서원이 이룬 일을 알기 때문에 그것을 기리려 찾는 이는 드물 것이다. 다만, 만대루라는 건축에서 느낀 감동을 잊지 못해 찾는 것이리라. 만대루는 유생들이 모이던 곳이다. 만대루가 높은 하늘을 나는 새와 같은 공간이라는 것을 그들도 알았을까. 하늘 높이 나는 새가 날개로 날지 않고 바람 사이 하늘을 나는 것처럼, 바람 사이에 놓여 있는 만대루에 앉으면 인간과 자연 사이에 날개 펼친 새 한 마리를 문득 느끼게 된다. 그 새를 안겨준 위대한 목수의 존재에 경외심을 느끼는 것은 물론이다.
위대한 목수 덕분에 후손들은 애련정에 앉아 자연으로 향한 길을 찾아내고, 만대루에 앉아 웅비의 기상을 느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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