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황·욕망을 타고 ‘소녀들’의 시대 다시 돌아오다
  • 하재근 (문화평론가) ()
  • 승인 2009.03.16 2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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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더걸스·소녀시대·카라 등 걸그룹이 뜨는 이유

▲ 소녀시대 멤버들이 지난해 9월 제2회 서울충무로국제영화제 개막식 레드카펫 행사에 참석해 포토타임을 갖고 있다. ⓒ시사저널 임준선

요즘 TV를 켜면 소녀시대를 보지 않을 도리가 없다. 어디를 가나 소녀시대이다. 심지어 <콘서트 7080>에도 소녀시대가 등장한다. 주현미는 소녀시대 멤버와 함께 트로트를 부르고, <무한도전> 멤버들이 소녀시대를 패러디한 다음 주에는 아예 소녀시대가 직접 <무한도전>에 출연해 ‘웃긴’ 토크쇼를 진행하고, 그 다음 날에는 <박중훈 쇼>에 나와 ‘안 웃긴’ 토크쇼를 진행한다. 그 사이에는 <라디오 스타>에 나와 MC 4인방과 독설 배틀을 벌이거나, <패밀리가 떴다>에서 음식을 만들거나, <우리 결혼했어요>에서 이벤트를 벌이거나, <스타킹>에서 일반인에게 박수를 쳐준다. 물론 가수로서 주말 음악 순위 프로그램의 하이라이트 부분에 등장해 매주 1위를 차지하는 것은 기본이다.

소녀시대 본인들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따라 하기도 보지 않을 도리가 없다. 상당한 성공을 거둔 <1박2일> 시청자편에서는 여고생들의 소녀시대 따라 하기가 큰 화제가 되었었다. <세바퀴>에서는 ‘줌마테이너’들이 스키니진을 입고 소녀시대 춤을 춘다. <스타킹>에서는 유아들이 ‘지지지지 베이비 베이비’ 하며 리틀 소녀시대를 선보인다.

최근 <무한도전>은 두 가지를 패러디했다. 하나는 막장 드라마이고 또 하나가 소녀시대였다. 이 두 가지가 현재 가장 ‘핫’한 트렌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막장 드라마는 하나의 장르인데 소녀시대는 일개 그룹으로 그것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으니 그 위력이 놀랍다. 말하자면 구은재와 구준표의 협공에 소녀시대가 밀리지 않고 버티는 셈이다. 아줌마와 소녀들이 막장 드라마에 환호하고 있을 때, 남학생과 청년, 아저씨들은 소녀에게 열광하는 구도랄까.

10년 전 외환위기 시기와 비슷한 양상

소녀시대 하나만이 아니다. 소녀시대는 원더걸스와 2강 체제를 형성한다. 아이돌 걸그룹 전성기이다. 최근 일부 방송사에서 소녀시대로부터 1위를 이어받은 카라도 아이돌 걸그룹이다. 예기치 않게 1위까지 한 이들은 감격해했다. 트렌드가 만들어지자, 주가가 폭등할 때 테마주가 일제히 오르는 것처럼 걸그룹 테마가 1위군을 형성하는 것이다. 또 다른 방송사에서 소녀시대로부터 1위를 이어받은 다비치도 여성 2인조이다. 다비치는 순수한 아이돌은 아니지만 준 아이돌이라고 할 수 있다.

소녀시대와 원더걸스의 약진은 10년 전 외환위기 시기를 떠올리게 한다. 그때 S.E.S와 핑클이 등장해 아이돌 걸그룹의 전성시대를 열었었다. 곧이어 성인용 걸그룹인 베이비복스가 나왔는데, 이는 요즘 애프터스쿨의 등장과 맞물린다. 뒤를 이어 인기를 끈 것이 쥬얼리이다. 이는 지금 시점에서 1위군에 오른 카라와 대비된다.

음반은 S.E.S가 더 많이 팔았지만 모든 이의 뇌리에 기억되는 ‘한 방’의 화려한 인기는 핑클의 몫이었다. 핑클이 내세운 타이틀곡이 워낙 엄청난 인기를 얻었기 때문이다. S.E.S와 소녀시대는 SM엔터테인먼트의 작품이다. 원더걸스가 <텔미>와 <노바디>라는 엄청난 한 방을 터뜨리며 전성기 핑클에 필적하는 인기를 구가할 때까지만 해도, SM엔터테인먼트의 S.E.S 징크스는 이어지는 것으로 보였다. 건실하게 인기는 있지만 뭔가 ‘한 방’이 부족하다는 느낌.

2009년에 SM엔터테인먼트와 소녀시대는 드디어 한 방을 터뜨리며 징크스를 날려버렸다. 그것이 올 초부터 가요계와 예능계를 평정하고 있는 <Gee>의 열풍이다. <Gee> 열풍은 걸그룹 시대 화룡점정의 의미를 갖는다. 이미 조짐은 보였었고 <Gee>로 만개한 것이다.

2000년대 들어 걸그룹의 위상은 날로 추락했었는데 2007년께부터 상황이 반전되기 시작했다. 2008년에 이르러서는 소녀시대, 원더걸스와 함께 재정비한 쥬얼리, 브라운아이드걸스, 역시 재정비한 베이브복스가 전면에 나서며 걸그룹 시대를 예감케 했다. 하지만 원더걸스의 독주가 지나치게 강해 전체적인 붐을 형성할 수 있을 정도까지는 아직 아니었다. 2009년 <Gee> 열풍으로 투톱 체제가 안정화되며, 동시에 카라라는 아이돌 걸그룹까지 약진해 걸그룹 시대가 확정되었다. 글자 그대로 ‘소녀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걸그룹의 흥망성쇠와 한국 경제 상황이 겹치는 것이 묘하다. 10년 전 외환위기 때 인기를 끌었다가, 경제 버블과 함께 사라진 후 경기가 어려워지자 다시 등장해, 신 외환위기 국면이 되자 만개했으니 공교롭지 않을 수 없다.

또, ‘소녀 시대’는 홀로 도래한 것이 아니다. 막장 드라마·막말 예능 전성시대와 함께 찾아왔다. 모두 경기가 어려워질수록 맹위를 떨치는 트렌드들이다. 시청자가 복잡한 세상살이를 순식간에 잊을 수 있도록 강렬한 자극을 제공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여기에 시청자의 욕망을 화면에 표현해준다는 특징도 있다.

대체로 막말 예능이 젊은 남녀 시청자에게 오락을 제공한다면, 막장 드라마는 여성 시청자의 욕망을 대리 만족시켜준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비해 걸그룹은 남성 시청자의 욕망과 관련이 있다. 어리고 예쁘고 귀엽고 발랄하고 순진하며 때로는 섹시한 여자친구를 갖고 싶은 남성의 욕망을 기획사들이 간취해 형상화한 것이 걸그룹이라고 할 수 있겠다. 복잡한 꾸밈, 우아한 설정 다 빼고 아주 단순하게 욕망의 정화를 직설적으로 보여주는 것에 대중이 열광하는 시대와 조응한다.

물론 경제 위기와 남성의 욕망만 가지고 걸그룹 시대를 설명할 수는 없다. 경제 위기가 찾아오지 않았어도 지금쯤이면 걸그룹이 다시 등장할 때가 되기도 했다. 2000년대 들어 걸그룹의 침체가 너무 뚜렷했기 때문이다. 여학생만을 위한 보이밴드들의 약진은 남자들을 가요 프로그램에서 멀어지게 했다. 한정된 여학생 시장을 놓고 혈투를 벌이는 레드오션보다, 거대한 남성 시장이라는 블루오션에 기획사들이 눈을 뜰 시점이 되었던 것이다. 한동안 걸그룹을 보지 못했던 대중도 그들을 환영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소녀시대가 노래를 부를 때 울려퍼지는 남자들의 괴성은 그동안 이들의 갈망이 얼마나 컸었는지를 웅변한다.

트렌드의 순환 주기와도 맞물려

▲ 최근 인기 정상에 오른 카라. ⓒ시사저널 임준선

남성팬의 등장은 기획사들에게는 축복이었겠지만, 가요판을 장악하다시피 했던 여학생 팬클럽에게는 악몽이었다. 그래서 여학생으로 이루어진 기존 보이밴드 팬클럽과 소녀시대 팬클럽은 인터넷에서 루머로 점철된 전쟁을 치렀다. 그 대립이 표면화된 것이 드림콘서트에서의 소녀시대 침묵 사건이다. 보이밴드 팬클럽 여학생들이 연합해 소녀시대 등장 장면에서 일제히 암흑의 침묵 사태를 연출함으로서 힘을 과시했었다. 하지만 이것은 엄청난 역풍을 맞았고, 이제 걸그룹과 함께 남성팬들도 가요판에 안착했다. 요즘에는 거꾸로 소녀시대 팬들의 광적인 지지 행태가 인터넷에서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있다.

아무튼 지금은 남성들이 한동안 소외되어 있었다는 시장 상황, 인기를 끌다 사라졌으니 이제 다시 나올 때가 되었다는 트렌드의 순환 주기에 경제 위기가 맞물린 것이다. 게다가 마침 한류스타로 성장한 보이밴드들이 외국 활동에 주력하고 있는 실정이어서 국내에 힘의 진공 상태가 펼쳐지기도 했다. 이런 여러 요인이 겹쳐 걸그룹 시대가 도래했다. 마침 지금 여성들은 막장 드라마의 ‘꽃남’에 넋을 잃고 있으니, 남성과 여성이 모두 환상 속에서의 ‘꽃남’ ‘소녀’에 열광하며 시름을 잊는 ‘꽃남 시대’ ‘소녀 시대’가 형성된 셈이다. 경제 위기로 현실에서의 결혼은 뒤로 미루는 세태라고 하니 묘하게 대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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