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력 받쳐주면 더 뛰고 싶었다”
  • 이영미 (일요신문 기자) ()
  • 승인 2009.03.24 1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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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 앞둔 이봉주 선수 인터뷰 / “후배들이 더 절박한 심정으로 달렸으면 좋겠다”
ⓒ시사저널 임준선
‘국민 타자(이승엽)’ ‘국민 여동생(김연아)’ ‘국민 남동생(박태환)’도 있지만 20여 년간 달리기만 해온 ‘국민 마라토너’ 이봉주(39·삼성전자)는 또 다른 의미에서 ‘국민’이라는 타이틀이 제격이다. 1990년 전국체전에서 2시간19분15초로 2위를 차지하며 국내 마라톤계에서 주목받기 시작한 이봉주는 2시간10분 이내를 10차례나 완주했고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에서 은메달을 따고, 2000년 2월 도쿄 국제마라톤에서 2시간7분20초로 한국 최고 기록을 세웠는가 하면, 불혹의 나이에 40번째 완주라는 대기록까지 남겼다. 그동안 이봉주가 뛴 거리를 계산해보면 훈련 거리와 실제 달린 거리 그리고 하프마라톤 및 역전대회 출전까지 더해 지구(약 4만1백92km)를 5바퀴도 넘게 달린 셈이다.

지난 3월15일 서울국제마라톤대회 참가를 마지막으로 현역 선수 생활을 마감하겠다고 밝힌 이봉주는 오는 가을 공식 은퇴 경기를 가질 계획이다. 지난 3월17일 수원의 삼성전자 육상단에서 이봉주 선수를 만났다.

오인환 감독이 이번 서울국제마라톤대회가 은퇴 경기가 아니라고 말하던데.

공식 은퇴 경기는 가을쯤으로 예상하고 있다. 기록을 요구하는 대회 출전은 서울국제마라톤대회를 끝으로 마무리하고 가을에 있을 은퇴 경기는 기록보다는 이벤트성으로 치러질 계획이다. 엄밀히 따지면 아직 은퇴했다고 할 수 없다. 내일까지 예정된 일정들을 마무리하고 1주일가량 휴가를 갔다 오면 곧바로 숙소로 복귀해서 다시 훈련에 참가한다.

그동안 여러 차례 은퇴설이 나돌았다. 마침내, 은퇴를 결심했는데 시원섭섭한 감정 중에서 어느 쪽의 비중이 더 큰가?

미련이란 잘 뛰었어도, 또 못 뛰었어도 남는 법이다. 막상 선수 생활을 마무리한다고 하니까 뭔가 허전하고 나사 하나가 빠진 듯한 느낌이 든다. 이번에 서울국제마라톤대회를 준비하면서 마지막으로 치르는 공식 대회라는 의미 때문에 부담이 컸다. 더욱이 체력이 이전처럼 회복되지 않아서 대회를 준비하면서도 여간 고민스러웠던 게 아니다. 오죽했으면 대회 참가를 포기할 생각까지 했을까. 역시 나이는 속일 수 없더라. 이전에는 금세 회복되던 체력이 나이를 먹으니까 회복 속도가 점점 더뎌진다. 완주나 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컸는데 그래도 결승선을 통과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체력만 받쳐주었다면 마흔 살 넘어서까지 선수 생활을 유지하고 싶었나?

물론이다. 체력이 되는데 왜 선수 생활을 그만두겠나. 사실 베이징올림픽이 끝나고 바로 은퇴하려 했었다. 그런데 주위에서 40번째 완주를 채우고 은퇴하는 게 더 의미가 있지 않겠느냐고 권유해서 고민하다가 이번에 도전하게 된 것이다. 어느 선수이든지 마무리는 화려하게 장식하고 싶을 것이다. 나 또한 나이 먹고 몸이 따라주지 않아 비참하게 은퇴하는 것보다 세계 정상의 자리에서 내려오기를 소원했다. 그 자리가 올림픽 금메달이었는데 금메달은 나와 인연이 없었던 모양이다. 다른 무엇보다도 올림픽 금메달을 목에 걸어 보지 못한 것에 가장 미련이 남는다.

20여 년간 달린 거리가 22만여 km, 지구 5바퀴를 넘는 거리라고 들었다. 또한, 20년 동안 40번째 풀코스 완주는 기네스북에 오를 만큼 대단한 기록이다. 그 기록은 그 누구도 쉽게 깨지 못할 것 같다.

ⓒ시사저널 임준선

의식하고 뛴 것은 아닌데 오래 뛰다 보니까 그런 수치가 나온 것 같다. 지금 다시 그렇게 뛰라고 한다면 못 뛸 것 같다. 풀코스 도전을 42번 했는데 두 번은 중도 포기했다. 바로 2001년 캐나다 세계선수권대회와 2006년 일본에서 열린 비와코 마라톤대회였다. 비와코 대회는 발바닥 통증으로 어쩔 수 없이 포기한 대회였는데, 그 대회 직후 국내 여론이 나를 거의 은퇴 직전까지 몰고 갔었다. 당시 ‘이봉주 한물갔다’는 얘기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야 했다. 그런데 그런 비난이 나를 더 자극시켰다. ‘한물갔는지, 안 갔는지 직접 보여주겠다’라는 오기가 들었다. 그래서 베이징올림픽 출전을 강행했고 최선을 다해서 준비했는데, 성적(28위)은 그리 좋지 않았다.

팬들의 뜨거운 함성과 응원이 들리는 경기장이나 동료 선수들과 함께 어울려 운동하는 다른 종목의 선수가 부럽지는 않았나? 

어렸을 때 축구랑 야구를 좋아했다. 친구들이랑 동네 야구·축구 등을 하면서 함께 웃고 떠들고 싸웠던 기억이 있다. 그래서 가끔은 육상단 숙소 옆에 위치한 수원 삼성 축구 선수들이 좋아 보였을 때가 있었다.

운동 선수 중 재테크에 성공한 사람으로 손꼽힌다. 지금까지 얼마나 벌었나?

억대 연봉을 받는 프로 선수들보다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앞으로 먹고사는 데는 걱정이 없을 정도는 벌었다. 나보다는 아내가 계획적으로 재테크를 해왔다. 가장 부담 없는 부동산을 위주로 투자를 했었고, 꾸준히 적금 등을 부으면서 돈을 모았다. 한창 잘나갈 때는 국제대회에 출전할 때마다 상금 외에 초청비를 1억원 정도 받았었다.

강원도 대관령 쪽에 목장을 구입했다는 소문이 들리던데.

그것은 사실과 다르다. 내 꿈이 원래 목장 주인이었다. 그래서 그런 소문이 났는지 모르겠지만 목장은 내 재산 목록에 없다. 강원도와 천안 부근에 약간의 땅이 있을 뿐이다.

아마도 마라톤 인생 중 가장 잊지 못할 스승이라면 고 정봉수 감독(전 코오롱 팀)일 것 같다.

감독님은 참으로 대하기 어렵고 힘든 분이었다. 지금도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감독님 이미지는 ‘호랑이’이다. 무척 엄하셨고 냉정한 면도 있으셨다. 감독님과의 마무리가 별로 좋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분 덕분에 내 기량이 좋아졌고 마라톤에 대한 감독님의 열정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나라 마라톤이 이 정도까지 발전한 게 아닌가 싶다.

오랜 친구이자 라이벌로 선수 생활을 한 황영조 감독은 어떤가. 두 사람의 마라톤 인생이 참으로 대조적이다.

만약 황영조가 지금까지 선수 생활을 했다면 내 기록이 조금은 더 단축되었을지도 모른다. 황영조처럼 걸출한 마라톤 선수가 존재했기에 그를 넘어서려는 목표로 더 열심히 노력했고, 처절한 고통을 참으며 달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영조는 나한테 큰 자극제였다. 그 친구가 너무 일찍 은퇴하는 바람에 내 마라톤 기록도 잠시 주춤거렸지만 그의 존재가 나를 채찍질했던 것만큼은 부인할 수 없다. 이제는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으니까 영조가 결혼한다는 소식이나 들려줬음 하는 바람이다.(웃음) 

가을에 공식 은퇴하고 나면 외국에서 연수 겸 유학 생활을 하고 싶다고 밝혔다. 그 후에는 지도자 생활을 하게 되는 건가?

마라톤만 하고 살았으니까 마라톤 외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당장 나한테는 ‘제2의 이봉주’를 키워내야 하는 숙제가 있다. 나를 능가할 만한 후배가 없다는 것이 참으로 서글픈 비극이자 현실이다. 2~3년간 외국 생활을 하며 선진 마라톤 시스템을 배우고 싶다. 그 후에는 현장으로 복귀해서 지도자 과정을 밟으려고 하는데, 아직 정확한 계획은 세우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후배들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후배들 스스로가 위기의식을 느꼈으면 한다. 그런 위기의식을 바탕으로 피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국 마라톤이 좌초되지 않고 계속 성장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단언컨대, 지금처럼 운동해서는 얻을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 더욱 더 절박한 심정으로 달려줬으면 좋겠다. 그리고 내가 너무 오랫동안 후배들의 길을 가로막고 있었던 것 같아 미안하다는 말도 꼭 덧붙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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