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아’ 열광에 누가 재 뿌리나
  • 하재근 (문화평론가) ()
  • 승인 2009.04.06 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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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영웅에 대한 국민적 관심의 빛과 그늘

▲ 세계피겨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한 김연아 선수가 3월31일 인천공항으로 입국한 뒤 기자회견장에서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시사저널 임영무

텔레비전을 켜면 김연아 경기가 중계되고 이어 김연아가 나오는 광고가 두세 편 나오고, 그 다음 김연아가 출연하는 갈라쇼 중계가 고지되고 다시 김연아가 나오는 광고가 등장한 뒤 김연아 경기가 다시 중계된다. TV는 ‘김연아 중독’에 빠져 있고 대중은 김연아에 열광하고 있다.

김연아 이전에도 스포츠 스타는 있었다. 거슬러 올라가면 손기정부터이다. 손기정은 빼앗긴 나라의 백성들에게 영웅이었다. 손기정 사진에서 일장기가 말소된 사건은 스포츠 영웅과 국가주의가 동전의 양면임을 1930년대에 이미 보여주었다. 당시 한국인은 손기정을 보며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자긍심을 느끼기 시작했다.

산업화 시기에는 한국 최초의 권투 세계 챔피언 김기수와 레슬링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양정모 그리고 ‘박치기왕’ 김일이 있었다. 손기정이 서양인을 달리기로 제쳤다면, 이들은 서양인과 직접 몸을 맞부딪쳐 이겼다. 그리하여 한국인의 가슴 속에서 신화가 되었다. 그러나 이때까지는 뭔가, 굶주리고 주눅든 듯한 느낌이 남아 있었다. 차범근도 그런 ‘헝그리’ 정서로부터 크게 벗어나 있지 않다.

무력감에 빠진 국민에게 희망의 ‘별’로 솟아

1980년대에도 임춘애로 상징되는 배고프고 한 맺힌 이미지는 여전했다. 하지만 유도 금메달리스트 하형주는 조금 달랐다. 그는 훨씬 당당한 이미지로 1980년대의 자신감을 표상했다. 하형주는 그야말로 늠름해 보였고 한국인은 열광했다. 이 당시에는 이미 권투 세계 챔피언 배출이 당연시되었다. 한국인의 자긍심은 그에 비례해 커졌다. 하지만 여전히 ‘몸’ 하나 가지고 ‘악으로 깡으로’ 세계와 맞서는 이미지였다.

1990년대에는 박찬호와 박세리가 등장했다. 이들은 좀더 많은 투자가 요구되며, 선진국의 백인들이 주류를 차지하는 분야에서 세계적 성과를 일구어냈다. 야구와 골프는 ‘헝그리 종목’인 권투나 레슬링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그런 분야에서 세계적 성취를 이루어낸 이들에게 한국인은 열광했다. 마침 이때는 외환위기 시기였다. 이들의 성취는 한국인의 열패감을 덮을 만큼 눈부셨다.

2002년에 전혀 다른 지평이 열렸다. 바로 ‘2002 한·일 월드컵’이다. 한국인은 이때 자신감에 차 있었다. 외환위기를 극복하고, IT(정보기술)라는 신천지가 열렸다. IT는 그동안 선진국을 따라만 했던 나라에서 처음으로 선진국과 함께 출발한 산업 부문이다. 동시에 민주주의도 이루었다. 굶주리고 한 맺히고 주눅든 한국인은 지구상에서 사라지고 있었다.

그것을 표상했던 것이 2002년 월드컵 대표팀이다. 이들은 한 개인의 특출난 노력이 아닌 팀워크로 세계 4강에 안착했다. 연습 경기에서 이들이 보여준 기량은 한국인을 흥분시켰다. 과거의 그 한국팀이 아니었다. 단순히 이겨서가 아니다. 이들이 보여준 경쾌하고 자신감에 차 있는 모습. 패스에서 패스로 이어지며 순식간에 골을 만들고는, 이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질주하던 한국 대표팀.

황선홍은 본선 첫 골을 넣고는 활짝 웃으며 손을 살랑살랑 흔들었다. 울고 짜면서 배고픈 시절을 회상하는 모습이 아니었다. 한국인은 모두 길바닥에 뛰쳐나와 자축했다. 대표팀은 국민의 영웅이 되고, 붉은악마는 스스로 영웅이 되었다. 한국인은 전혀 다른 시대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실감했다. 박지성이 프리미어리그라는 선진국의 세계에 우뚝 섰을 때 그 열광은 이어졌다. 이렇게 어떤 운동 선수가 그동안 불가능하다고 여겼던 한계를 돌파하고 승리의 지평을 열었을 때 국민적인 영웅이 된다.

김연아와 박태환에서 한국인은 손기정에서부터 시작된 질주의 완성형을 보고 있다. 이들은 과거의 스타들과 전혀 다르다. 김연아와 박태환은 새롭게 진화한 21세기형 한국인이다. 이들에게는 단 한 점의 그늘도 엿보이지 않는다. 서양인들과 함께 섰을 때도 빛난다. 한국인의 오랜 콤플렉스인 ‘숏다리’도 이들에게는 없다. 체형과 기량, 모든 부문에서 이들은 한국인의 한계를 넘어섰다.

이들은 선진 부자형 종목인 피겨스케이팅과 수영에서 세계적인 성취를 이루어냈다. 박태환보다 김연아가 더 빛나는 것은, 김연아가 ‘세계 원톱’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박찬호도, 박세리도, 박지성도 이루지 못했던 성취이다. 이들의 표정에서는 자신감과 여유가 넘쳐난다. 마침 지금은 제2의 경제 위기 시기이다. 선진국을 따라잡겠다던 한국인의 경제적 열망은 좌절되었다. 그 때문에 김연아의 미소는 더욱 빛나고 있다.

최근 연쇄 살인과 민생 파탄, 정치 불안이 이어지면서 한국인에게 자신감을 준 소식은 야구 대표팀의 선전과 김연아의 세계 1위가 유일하다. 김연아가 지난 2월에 1위를 했을 때는 강호순 사건과 용산 참사 소식으로 한 주 내내 우울한 와중이었다. 열패감과 무력감에 빠진 한국인에게 신인류 김연아가 미래의 빛을 보여주었다.

그것은 전 국민적인 열광을 만들어냈다. 막장 드라마와 막말 예능 이상의 인기를 누리는 것은 국민에게 희망을 주는 스포츠 스타들이 유일하다. 김연아는 소녀시대를 뛰어넘는 국민 아이돌이다. 그야말로 남녀노소의 구분이 없는 인기이다. 한국은 지금 김연아를 필두로 한 스포츠 스타에게 빠져 있다.

우리가 원래부터 여유 있고, 자신감에 넘치는 사람들이었다면 이렇게 운동 경기에서의 승리에 열광했을까? 한국인의 열광에는 단순히 ‘즐기는’ 차원이 아닌 그 이상의 비원이 느껴진다. 한국인에게는 지난 100년 동안 겪은 열패감과 최근 경제 위기로 겪고 있는 열패감이 겹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운동 경기에 강박적으로 매달리게 된다. 그런 이유에서일까? 외국인들이 한국인들은 경기를 즐기지 않고 승리에만 집착한다고 지적한다.

국민 마음 얻으려 ‘스타’ 이용 말아야

▲ 김연아 선수가 금메달을 들어보이고 있다. ⓒ시사저널 임영무

김연아가 빛나면 빛날수록, 그래서 모든 한국인이 거기에 열광할수록, 그것은 현실의 어려움을 반증하게 된다. 일부에서는 스포츠 스타에 대한 한국인의 열광을 애국주의, 국가주의라고 비웃는다. 그렇게까지 몰아붙이는 것이 타당할까? 

문제는 이런 국민의 마음을 이용하는 사람들이다. WBC 경기가 한참일 때 정부 정책 블로그는 태극기와 함께 야구 대표팀의 화보를 내걸었다. 아니, 정부 정책과 야구 대표팀이 무슨 상관이 있나? 이것은 노골적으로 스포츠 애국주의를 조장하는 일이다.

김연아가 지난 2월에 세계 1위를 하자 한나라당은 김연아 이미지를 만들어 그 앞에서 회의를 했다. 이번에 세계선수권대회에서 1위를 하자 김연아와 박희태 대표를 합성한 이미지를 만들어 당 홈페이지에 걸었다. 김연아 ‘이미지 팔아먹기’이다. 고려대도 김연아의 사진과 함께 자신들이 김연아를 키워냈다는 듯한 학교 광고를 내보내 빈축을 샀다. 전주시도 세계선수권대회장으로 김연아를 찾아가 구설에 올랐다.

열정과 땀으로 성취를 이루어내고, 국민이 순수한 마음으로 거기에 열광하는 것까지는 좋다. 다른 무언가를 얻어내려 그것을 멋대로 이용하는 것에서부터 스포츠의 타락은 시작된다. 열광까지만이다. 딱 거기까지만 하고 이용은 하지 말자. 추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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