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년 정권의 주축 되어 영욕의 풍운에 들다
  • 이춘삼 | 편집위원 (sisa@sisapress.com)
  • 승인 2010.02.02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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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공릉동 육군사관학교에서 열린 65기 졸업 및 임관식. ⓒ연합뉴스

5·16을 통해 정권을 잡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5·6·7·8·9대 대통령을 역임하고 재임 중 서거한 후 그의 육군사관학교 후배인 전두환·노태우 대통령에게 바통이 넘어갔다. 이렇게 1961년부터 시작된 군인들의 지배는 노 전 대통령의 임기가 종료된 1993년 2월까지 장장 32년 동안 지속되었다. 이들의 통치는 곧 육사의 통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양자는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고, 수많은 육사 출신이 뜨고 지는 ‘별들의 향연’이 벌어졌다. 육사 출신을 중심으로 한 군인들은 뚜렷한 파워 엘리트 그룹을 형성했다. 정권의 속성상 똑똑하고 민첩한 육사 출신 장교들이라도 일부 정치 군인들이 이끄는 대로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육사의 영욕이 여기서 갈렸다.

시인 모윤숙은 6·25 전화(戰禍)를 피해 몸을 숨겼던 경기도 광주의 한 야산에서 피를 흘리고 쓰러진 청년 장교를 보고 이렇게 썼다. ‘누런 유니폼 햇빛에 반짝이는 어깨의 표식/그대는 자랑스런 대한민국의 소위였구나/가슴에선 아직도 더운 피가 뿜어 나온다/ … /나는 죽었노라 스물 다섯 젊은 나이에/ … /원수와 싸우기에 한 번도 비겁하지 않았노라’(<국군은 죽어서 말한다> 중에서). 여기에서 언급된 청년 장교가 바로 육사에서 교육받고 전선에 투입된 ‘반짝이는 계급장’의 ‘대한민국의 소위’였던 것이다.

육사는 1946년 5월1일 군사영어학교를 해체한 후 남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라는 이름으로 태릉에서 문을 열었다. 곧 이어 조선경비사관학교로 이름을 바꿨다가 1948년 9월 육군사관학교라는 지금의 명칭으로 정착했다. 육사는 ‘지·인·용(智·仁·勇)’을 교훈으로 하고 ‘호국 간성의 요람’임을 자부한다. 1기 입교 생도들은 1년 만에 소위 계급장을 달았으나 이후 2년제, 4년제로 개편되었다. 육사는 개교 이래 1만8천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는데, 그중 6·25와 공비 토벌, 베트남 전쟁의 희생자가 3천여 명에 이른다.

5·16 군사 쿠데타 이후 이른바 혁명 주체 세력이 정국을 주도하는 가운데 육사 출신들의 졸업 기수별로 세(勢)를 살펴보면 김종필 전 국무총리의 동기인 8기가 가장 강했다. 8기에는 이석제 전 감사원장, 고재일 전 건설부장관, 오치성 전 내무부장관, 윤필용 전 수경사령관, 차규헌 전 군사령관이 있다.

12·12 이후에는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의 11기 동기들이 대거 권력의 핵심에 진출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바로 아래 기수인 12~17기 중 하나회 멤버들을 주축으로 요직을 다수 차지했다. 11기에는 권익현 한나라당 상임고문, 이기백 전 국방부장관, 이상훈 전 국방부장관, 정호용 전 국방부장관이 동기 대통령을 모시고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다. 12기에서는 박세직 전 재향군인회장, 박준병 전 보안사령관, 박희도 전 육참총장, 안필준 전 1군사령관 등이 선두 주자였다. 전두환, 노태우, 권익현, 정호용, 정동호, 배명국, 안무혁, 고명승, 김진영, 안현태, 이문석, 이현우, 허삼수 등이 하나회 멤버로 이름을 올렸다.

육사를 명실상부하게 대표할 한 사람으로 오명(18기) 건국대 총장을 꼽는 데 이의를 달 사람은 별로 없을 듯하다. 육사 총동창회 제7대 회장인 그는 다른 역대 회장들이 모두 장성 출신인 것과 달리 유일한 예비역 대령이다. 오총장은 육사 졸업 후 서울대 전자공학과를 다니고 미국에 유학해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육사에서 교수를 지내다 1980년 청와대 경제비서관으로 관직에 입문한 후 20여 년간 전두환·노태우·김영삼·노무현 전 대통령을 두루 보좌하면서 ‘직업이 장관’이라는 얘기까지 들었다. 체신부 장·차관, 건설교통부장관, 과학기술부장관과 부총리를 역임했고, 한국야구위원회 총재, 대전엑스포조직위원장, 동아일보 사장·회장, 아주대·건국대 총장을 두루 거쳤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한국의 대표 테크노크라트’ ‘한국 IT의 대부’ ‘통신 혁명의 주역’ 등 다양한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1980년대 초반 그가 주도한 통신 혁명은 가히 획기적이라고 할 만했다. 백색 전화 한 대면 큰 재산이었던 시절 ‘1가구 1전화 시대’를 열겠다는 구상은 당시 전두환 대통령과 김재익 경제수석의 전폭적인 뒷받침으로 결실을 맺을 수 있었다. 그 밖에도 전전자교환기의 국산화, 무선통신의 개방, 반도체 개발 추진으로 지금 우리는 세계에 유례가 없는 통신 선진국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경기고등학교를 나온 그는 육사를 지망한 동기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처음에는 부모님도 서울대를 갈 것으로 알고 있다가 육사 얘기를 꺼내니 매우 의아해했다. 그러나 당시 김원규 교장이, 경기고 수재라면 당연히 서울대에 진학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깼다. ‘육사는 단순한 군사학교가 아니다. 육사는 나라의 지도자를 양성하는 학교이다. 학자가 되려거나 좋은 데 취직하고 싶다면 서울대에 가라. 하지만 나라를 위해 뭔가 해보고 싶다면 육사에 가라’라고.” 김원규 교장은 경기고에 부임하기 직전 서울고에 재직할 때도 우수한 학생들을 다수 육사에 가도록 권유한 인물이다.

육사에는 경기고 출신 인재들이 일정한 흐름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상훈 전 국방부장관은 막내 동생인 이상철 전 정보통신부장관을 포함한 다섯 형제가 경기고 출신인 집안이다. 박용옥 전 차관이 경기고이며, 이상희 전 국방부장관(26기)과 김태영 현 장관(29기)은 경기고 선후배 관계에서 장관직을 승계했다.

지방 학교 중에서는 광주고가 똑똑한 학생들을 육사로 많이 보낸 학교로 알려져 있다. 별자리를 많이 길러냈고, 그중에는 4성 장군도 두 명이나 된다. 이 학교 출신으로 신일순 전 한·미연합사 부사령관은 육사 졸업 후 미국 웨스트포인트에서 수학한 지장이고, 김선홍 전 육사 교장과 김윤석 전 특전사령관이 별 세 개를 달았다. 이들보다 후배인 백군기 전 3군사령관이 또 한 번 대장의 자리에 올라 모교의 이름을 빛냈다. 육사 교장이 광주고측에 “우수한 학생들을 많이 보내줘 고맙다”라는 내용의 감사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오명 총장과 동기생인 최창윤 전 총무처장관도 숙환으로 일찍이 세상을 뜨기는 했으나 많은 선후배가 아쉬워 마지않는 멋진 군인이자 학자였다. 육사 졸업 후 서울대 사학과에서 공부하고 하와이 대학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귀국해, 육사와 국방대학원에서 강의하다가 12·12 이후에 발탁되었다. 전두환·노태우·김영삼 세 대통령을 모시면서도 항상 남을 배려할 줄 아는 도량 있고 정직한 신사였다.

유신 시대에 대위급에 사무관 진출 기회도 열려 

이준 전 국방부장관(19기)은 온화하고 합리적인 성품으로 후배들의 존경을 받는 장군 출신이다. 충북 제천이 고향인 이장관은 청주고를 졸업했다. 그는 육사 졸업식에서 생도들이 가장 영예스럽게 여기는 대표화랑으로 뽑히기도 했다. 수석 졸업은 4년간 성적이 가장 우수한 생도에게 돌아가지만 대표화랑은 성적 말고도 리더십과 봉사 정신, 안팎으로 풍기는 ‘멋’ 등 모든 면을 총체적으로 평가해서 주는 영예이다.

승승장구할 모든 여건을 갖췄지만, 1990년대 초반까지 그의 군 생활은 그리 순탄치 않았다. 비하나회 회원인 데다 강창성 전 보안사령관의 비서실장을 지낸 경력 때문에 5공 출범 이후 하나회원들의 견제를 받았다. 야전·정책 코스와 거리가 있는 기획관리·군수 분야를 주로 거친 후 1993년 김영삼 정부 때부터 두각을 보였다. 군단장 경력이 없는데도 이례적으로 1군 사령관(대장)에 임명되었다. 박용옥 전 국방부 차관과는 처남·매부 사이이다.

김희상 전 1군 부사령관(24기)은 육사 교수와 훈육관을 지냈고, 야전 포병 대대장-연대장-사단장-군단장을 차례로 역임했으며, 국방대 총장과 대통령 비서실 국방보좌관을 거치는 등 다양한 경력으로 공부도 많이 한 야전 지휘관으로 알려져 있다.

국회에 몸담은 동문으로는 이상득(14기, 중퇴), 이진삼(15기), 김성순(20기, 중퇴), 권경석·서종표·황진하(이상 25기), 김장수(27기), 박상돈(28기), 김성회(36기) 의원이 있다.

육사 출신 중 대위급에서 본인의 희망에 따라 사무관에 상당하는 일반 공무원의 자리를 주는 제도가 ‘유신 시대’에 시행되었다. 이른바 ‘환직(換職) 사무관’ 또는 ‘유신 사무관’이라고 불리던 것인데, 개중에는 능력이 떨어져 눈총을 받은 사람들도 있었으나, 군인 정신으로 무장된 이들이 새로운 조직에 들어가 분위기를 쇄신하는 데 일정 부분 기여했다는 평가도 있다. 이들은 정부 부처 곳곳에서 나름의 역량을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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