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부그룹 ‘삼성 배우기’ 탈났나
  • 이석 (ls@sisapress.com)
  • 승인 2010.05.25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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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출신 영입 인사들 대거 퇴사…핵심 사업별 부회장 중심의 ‘책임 경영’도 막 내려

동부그룹은 최근 한 차례 홍역을 치렀다. 삼성 출신인 김순환 부회장이 동부화재 대표에서 물러나기로 결정하면서부터다. 김부회장은 이명환 전 ㈜동부 부회장, 임동일 전 동부건설 부회장과 함께 삼성에서 건너온 대표적인 CEO로 꼽힌다. 경영진으로부터 능력도 인정받았다. 김준기 동부그룹 회장이 평소 “외부 전문가로서 혁신을 성공시킨 모범 사례는 김순환 부회장이다”라고 말했을 정도이다. 그의 재임 기간에 동부화재의 주가는 10배 가까이 급증했다. 지난해 매출은 5조9천8백4억원으로 취임 초기인 2004년보다 두 배 이상 증가했다. 순익 규모 역시 경쟁사인 현대해상이나 LIG손해보험보다 많게는 두 배 가까이 크게 나타나고 있다. 

▲ 지난해 11월 동부제철 아산만공장에서 열린 전기로 준공식에 참석한 김준기 동부그룹 회장(가운데).

그런 그가 지난 4월 금감원으로부터 문책 경고를 받으면서 꼬이기 시작했다. 금융회사 CEO가 금융 당국으로부터 문책 경고를 받으면 3년간 연임이 불가능하다. 다른 금융회사 임원으로 갈 수도 없다. 자의와 무관하게 발이 묶여버린 것이다. 최진호 동부그룹 홍보실장은 “오는 6월 주총을 통해 향후 거취가 결정될 것으로 본다. 확정된 것은 아니지만 비금융 계열사 CEO로 옮겨갈 가능성이 크다”라고 귀띔했다. 김부회장 후임으로 동부화재 대표에 오른 인사는 김정남 전 부사장이다. 김정남 대표는 지난 1979년 동부에 입사한 ‘토종 동부맨’이다. 이에 김병태 부사장과 손재권 부사장, 황의주 감사가 사표를 제출할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고 있다. 세 사람은 모두 김순환 부회장이 삼성에서 영입한 인사들이다. 일각에서는 삼성 출신이 동부그룹 출신 인사들과의 ‘파워 게임’에서 밀린 것 아니냐는 해석이 나오고 있다. 이와 관련해 김동관 동부화재 홍보담당자는 “김순환 부회장의 측근 인사들이 사표를 제출했다는 소문은 사실무근이다. 일부 언론에서 보도한 것처럼 삼성 출신과 동부그룹 내부 직원들 간의 세력 다툼도 없었다”라고 해명했다.

그룹 안팎의 시각은 달랐다. 동부그룹은 지난 2006년 말까지만 해도 계열사 임원 2백40명 중 100명이 삼성 출신이었다. 그룹의 10개 주력 계열사에서 삼성 출신 CEO가 여덟 명이나 되었다. 그룹 지주회사 격인 ㈜동부의 부회장과 사장은 삼성 출신인 이명환 전 부회장과 조영철 전 사장이 맡았다. 동부건설, 동부한농, 동부아남반도체(현 동부일렉트로닉스), 동부정보기술의 CEO도 모두 삼성 출신이었다. 이들 여덟 명 중에서 현재까지 남아 있는 인사는 단 한 명도 없다. 지난 2006년 말 이명환 부회장의 이탈을 시작으로 삼성 출신 임원들의 ‘탈 동부’ 행렬이 이어졌다. 현재는 현대차나 포스코 출신 및 동부그룹 인사들로 주요 계열사 CEO들이 대체되었다. 익명을 요구한 한 그룹 관계자는 “삼성 출신 인사들이 넘어오면서 기존 직원들과 일부 갈등을 빚었다. 기대만큼 성과를 내지 못한 곳도 많았다. 그에 따른 전략 수정이 불가피했던 것이 사실이다”라고 귀띔했다.

그에 따르면 그룹 내에서는 그동안 삼성 출신 임원들에 대한 불만이 적지 않았다. 그룹 전통은 완전히 무시한 채 맹목적인 ‘삼성 쫓기’에만 혈안이 되었다는 이유에서다. 일부 임원들은 ‘점령군’처럼 행동하면서 내부 불만을 키웠다고 한다. 이 관계자는 “삼성 출신 임원들은 동부 고유의 기업 문화를 무시한 채 점령군처럼 행동했다”라고 토로했다. 그래서 이제는 삼성 출신 인재 영입을 자제하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최진호 홍보실장은 “삼성 출신을 차별했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전체 임원 가운데 삼성 출신 비율이 5년 평균 30% 안팎이다. 올해 27%로 떨어지기는 했지만, 퇴사율은 그렇게 높지 않다”라고 해명했다.

ⓒ일러스트 박현정

삼성 출신 인사들과 기존 임직원들 간 갈등 골 깊은 것으로 알려져

동부그룹은 태생적으로 외부 인원을 수혈할 수밖에 없는 구조이다. 동부그룹의 모태는 지난 1969년 설립된 미륭건설이다. 이성택 동부생명 사장이 이 회사 공채 1기일 정도로 다른 재벌 그룹에 비해 역사가 길지 않다. 그룹 자체가 외부에서 인재를 수혈할 수밖에 없다. 김준기 회장은 삼성을 벤치마킹 모델로 삼았다. 2세대로 넘어오면서 위세가 꺾이거나 몰락하는 그룹이 비일비재한 상황에서, 삼성은 오히려 2세대인 이건희 회장에 와서 전성기를 맞고 있다. 이들 그룹의 차이점은 ‘시스템’이라는 것이 김회장의 판단이다. 이 시스템을 동부에 도입해 그룹 체질을 바꾸려는 것이 삼성 출신 인사 영입의 목적이었다. 최진호 실장은 “몇 명만 데려와서는 변화에 성공할 수 없다. 밑바닥에서 바뀌려면 많이 데려와야 했다. 자연적으로 삼성 인력을 대거 데려올 수밖에 없었다”라고 말했다. 이같은 전략이 삼성 인재에 대한 ‘맹목적인 사랑’으로 변질되었다는 설명이다.

삼성식 개혁 모델은 동부그룹의 경영 지배 구조를 혁신했다. 동부그룹 내에서 김준기 회장의 위상은 절대적이었다. 지난 2001년 삼성 맨을 영입하면서 분위기가 달라졌다. 동부그룹은 소재, 화학, 건설·물류, 금융 등 4대 핵심 사업별로 부회장을 내세우고 자율 경영을 하게 했다. 소재 부분은 윤대근 부회장이, 화학은 최성래 사장이, 건설·물류는 임동일 부회장이, 금융은 장기제 부회장이 맡았다. 그 정점에는 이명환 부회장이 있었다. 그는 지주회사 격인 ㈜동부를 맡으면서 컨트롤타워 역할을 했고, 김준기 회장은 이들이 책임 경영을 할 수 있도록 한 발짝 뒤로 물러나 있었다. 이는 삼성식 경영과 상당히 유사하다. 

2007년 들어 이같은 전략이 대폭 바뀌었다. 이명환, 임동일 등 삼성 출신 인재들이 나가면서 부회장 중심의 책임 경영은 사실상 막을 내린 상태이다. 그룹 경영 전략에서도 엿볼 수 있다. ‘시스템 경영’ 대신 성과를 중시하는 전략으로 수정했다. 인재 영입도 삼성 출신 핵심 인재 영입에서 성과 창출이 가능한 실무형 인재 수혈로 바뀌었다. 그룹 사정에 정통한 한 관계자는 “과거와 달리 현재는 김준기 회장이 직접 경영을 진두지휘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삼성식 모델에 대한 시행착오를 극복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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