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발 고속철도 경쟁, 본격 ‘발차’
  • 파리·최정민│통신원 (sisa@sisapress.com)
  • 승인 2010.12.27 1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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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로스타, 독일 ‘이체’와 계약 체결…스페인 ‘아베’도 새 구간 개통하며 프랑스 ‘TGV’ 압박

역사적으로 영국과 프랑스의 경쟁 관계는 유명하다. 34.5km 밖에 되지 않는 도버 해협을 사이에 두고 있지만, 양국 간의 냉랭한 기류는 골이 깊다. 프랑스의 영웅 나폴레옹의 무릎을 꿇게 한 것이 바로 영국이요, 여성인 잔다르크가 프랑스 수호의 상징으로 추앙받는 것은 바로 영국을 이겼기 때문이다. 이런 첨예한 양국 간 경쟁 관계에서 얼마 전 프랑스는 기막힌 패배를 맛보고 말았다. 바로 유로스타의 이체(ICE) 계약 건에서다.

겉으로는 평범하고 일상적인 고속열차 구매 계약일 뿐이다. 그러나 속내를 들여다보면 프랑스가 부글부글 끓지 않을 수 없는 이유가 있다. 유로스타는 영국과 프랑스를 잇는 고속철도 노선이다. 지금까지 프랑스의 TGV로만 운행해왔다. 그런데 이번에 독일의 ICE를 구입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더군다나 런던에 본사를 두고 있는 유로스타의 대주주는 프랑스 국영 철도인 SNCF이다. 지난 10월, 소문으로만 나돌던 유로스타와 ICE 제작사인 지멘스(SIEMENS) 사이의 밀월 관계가 공식적인 발표를 통해 사실로 드러나자 프랑스의 언론과 재계는 발칵 뒤집혔다.

▲ 지난 10월19일 영국 런던 세인트 팬크러스역에 서 있는 독일 이체(ICE) 고속열차 옆을 승객들이 지나가고 있다. ⓒAP연합

스페인, 13만여 일자리 창출 기대

유로스타에 TGV를 공급해 온 프랑스의 알스톰 사 파트릭 크론 사장은 르피가로와의 인터뷰에서 “이해할 수 없는 선택이다. ICE는 유로스타의 핵심인 유로 터널의 안전 기준을 통과하지 못한다”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영국과 프랑스를 잇는 유로 터널의 안전 기준은 열차의 길이가 4백m를 넘어야 하기 때문에 길이가 2백m인 ICE로 운행할 경우 두 대를 연결해야 한다. ICE의 진출을 막는 것이 ‘보호무역주의’라는 주장에 대해 파트릭 크론 사장은 “근거 없는 주장이다”라고 일축했다. 그는 “안전 문제는 제작사나 운영자가 참견할 문제가 아니다. 어째서 안전성과 전문성을 혼동하고 있는가”라고 반문했다.

이번 계약 이면에는 대주주 국가의 철도 독점권을 흔들 정도로 첨예한 고속철도 사업 경쟁의 치열함이 있다. 이번 유로스타의 충격이 가시기도 전인 지난 12월19일에는 스페인의 고속철도인 ‘아베(AVE)’의 마드리드 발렌스 구간이 개통했다. 프랑스 무가 일간지인 디렉트 마탱은 ‘스페인, 고속철도의 제왕에 오르다’라는 기사를 내보냈다. 그 이유는 이번 개통으로 유럽에서 가장 긴 고속철도 노선을 가진 국가가 프랑스에서 스페인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프랑스는 1천8백96km로 유럽에서 가장 긴 고속철도 노선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 개통으로 스페인은 2천56km의 노선을 운행하게 되었다. 그리고 스페인의 목표는 단순한 고속철도 개통이 아니다. 66억 유로가 투자된 이번 사업이 침체기인 스페인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어주기를 기대하고 있다. 현재 스페인의 실업률은 20%로 유럽연합의 국가들 가운데 최고점이다. 그리고 국제 평가 기관인 악센튜르는, 이번 고속철도 사업이 13만6천명의 일자리를 창출할 것이라고 내다 보았다.

이처럼 고속철도는 이제 단순한 철도 사업이 아니다. 2010년 역사상 최고의 공사 수주라고 떠들썩했던 아랍에미리트의 원자력발전소 사업보다 더 큰 시장인 것이다. 이미 30년 전 고속철도 시장에 뛰어든 프랑스와 일본, 독일 외에도 신흥 고속철도 강국으로 떠오른 한국과 스페인, 중국까지 가세해 그 속도만큼이나 빠르게 변모하고 있다.

‘황금 산업’에 브라질·중국·러시아 등도 관심

그리고 무엇보다 황금 산업으로 군림하고 있는 이유는 바로 시장성이다. 업계에서 바라보는 고속철도 시장의 2015년까지 수주액은 6백46조원에 이르며 매년 3%씩 성장하고 있다. 국토가 육각형으로 철도 산업의 최적의 조건을 살려 철도 강국이 된 프랑스를 넘어서 이제 국토 면적이 웬만한 브라질, 미국, 중국, 러시아 등이 모두 고속철도 사업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그것은 고속철도의 안전성과 경제성이 이제 충분히 입증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지난 12월12일 러시아는 헬싱키와 생페테스부르그를 잇는 러시아 고속철 ‘알레그로(ALLEGRO)’를 개통했다. 이번 열차는 프랑스 알스톰의 기술로 만들어졌으며, 러시아는 오는 2018년 월드컵을 겨냥해 대규모의 고속철도 사업을 추진할 것임을 공식화했다.

TGV로 세계 시장을 석권하는 듯했던 프랑스는 이번 ICE 사건을 계기로 심기일전하는 분위기이다. 그러나 세계 각국에서 저마다 신기술을 내놓는 마당에 그 입지가 단단하지만은 않은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TGV가 자랑하는 것은 안전성이다. TGV가 내세우는 것은 객차와 객차 사이가 철저히 연결되어 있어 열차가 탈선했을 때 객차들이 마구 엉켜버리는 ‘잭나이프’ 현상으로부터 안전하다는 점이다. 실제로 지난 2000년 6월5일 영국에서 오던 유로스타가 철로 밑의 맨홀 때문에 탈선한 사고가 있었다. 그러나 3백km의 속도로 달리던 열차는 탈선해 그대로 멈추었다. 전복되지 않은 것이다. 콧대 높은 영국인들도 ‘굿 잡(good job)’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독일의 ICE는 지난 1998년 탈선 전복 사고로 100여 명의 희생자를 낸 뼈아픈 기억을 갖고 있다. 일본 신칸센의 경우 2004년 니카타 지진 때 1964년 개통 이래 최초로 열차가 탈선해 전 일본을 충격에 빠뜨리기도 했다. 그러나 사상자는 없었다. 지금까지 TGV와 신칸센은 단 한 명의 사망자도 내지 않았다.

현재 TGV의 차세대 모델인 AGV를 내놓은 프랑스의 알스톰은 친환경까지 들고 나섰다. 신형 AGV는 시속 3백km를 넘나들지만, 이산화탄소 배출량은 2.2gr로 30gr의 시내버스보다 적다.

▲ 오랫동안 유로스타의 철로를 누빈 프랑스 알스톰 사의 ‘TGV’. ⓒ로이터

그러나 이번 유로스타와 ICE의 계약에 열차 가격이 결정적인 요인이었던 것처럼 TGV의 미래가 간단한 것은 아니다. 더군다나 시장 확장에 따른 다양한 변화에 따라 빠르게 적응해야 하는 과제 또한 안고 있다. 대표적인 경우가 올 초 기온 급강하와 함께 발생한 유로스타 운행 중단 사태이다. 기온 하강으로 얼었던 얼음이 유로터널에서 녹아 기기에 이상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또한 TGV가 한국에 진출했을 당시 국민 정서를 고려하지 않은 역방향 좌석 또한 많은 불만을 낳기도 했다. 이후 KTX는 1천2백80억원을 들여 내부를 수정해야 했다. 현재 독일의 ICE나 프랑스의 TGV는 여전히 절반 이상이 역방향 좌석으로 운행되고 있다.

현재 프랑스의 알스톰은 정부 차원의 압력을 기대하고 있으며, 런던 법원에 소송을 제기해 놓은 상태이다. 8억 유로의 계약 건을 코앞에서 놓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를 두고 프랑스 언론은 TGV가 베를린과 파리 간의 긴장을 유발하고 있다고 우려했다. 자존심을 건 이번 싸움에서 누가 승리할지 흥미진진한 고속철도 전쟁이 이제 시작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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