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러화 몰락’신호탄 올랐나
  • 이철현 기자 (lee@sisapress.com)
  • 승인 2011.04.25 1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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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정부의 신용등급 전망, ‘부정적’으로 사상 첫 하락 재정 적자와 부채 줄일 방안 모색해야 회복 가능

 

▲ 가이트너 미국 재무장관은 스탠더드앤푸어스의 미국 신용등급 전망 하향 조정에 당혹스러워하며 해명에 나서고 있다. ⓒEPA

지난 4월18일 세계 자본주의 역사에서 기념비가 될 만한 사건이 발생했다. 신용평가 기관 스탠더드앤푸어스(S&P)가 사상 처음으로 미국 정부의 신용등급 전망을 부정적(negative)으로 하향 조정한 것이다. 미국 재무부 발행 채권은 언제나 최상위 신용등급(AAA)이고 신용 전망도 ‘안정적(stable)’을 유지했다. 스탠더드앤푸어스는 지난 4월18일 미국 재무부 채권의 신용등급을 최상위(AAA)로 유지하기는 했으나 등급 전망을 ‘안정적(stable)’에서 ‘부정적(negative)’으로 격하시켰다. 미국 신용평가 기관이 70년 전 신용등급을 매기기 시작한 이래 처음 일어난 사상 초유의 사건이었다. 미국 신용등급 전망이 떨어지자 투자자들은 달러화, 주식, 재무부 채권을 마구잡이로 팔아치웠다. 안전 자산으로 분류되는 금은 하루 만에 10달러 넘게 올라 온스당 1천5백 달러까지 치솟았다.

‘부정적’이라는 신용등급 전망은 앞으로 2년 안에 신용등급이 하향 조정될 확률이 33%라는 뜻이다. 스탠더드앤푸어스가 지난 1989년 이후 AAA 등급을 가진 정부 채권에 대해 신용등급 전망을 부정적으로 하향 조정한 사례는 다섯 번이다. 이 가운데 세 차례 신용등급이 하향 조정되었다. 신용등급 전망이 다시 ‘안정적’으로 상향 조정된 나라는 영국이 유일하다. 스탠더드앤푸어스는 지난 2009년 영국 신용등급 전망을 안정적에서 부정적으로 하향 조정했다. 영국 정부는 곧바로 대규모 긴축 조치를 단행했다. 영국 내각과 의회는 2009년 국내총생산(GDP)의 11.2%에서 2014년 3%까지 재정 적자 규모를 줄이는 프로그램을 채택했다. 프로그램이 지켜지며 재정 건전성이 눈에 띄게 나아지자 신용평가 기관은 영국 신용등급 전망을 안정적으로 되돌려놓았다. 미국 정치권도 이번에 영국 못지 않은 긴축 조치에 합의해야 신용등급 하락을 막을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미국 정부가 재정 적자와 부채를 줄일 방안을 마련하지 못하면, 미국 신용등급이 최상위에서 밀려나는 사상 초유의 사태가 발생하게 된다.

재정 적자 규모, 올해 1조5천억 달러 넘을 듯

3조 달러가 넘는 외환보유고와 10%에 가까운 경제 성장률을 자랑하는 중국이 강력한 경쟁 국가로 부상하고 있다. 중국과 브라질은 기축통화를 바꾸자는 논의를 공론화하려 한다. 이 와중에 미국 신용등급이 떨어지기라도 한다면 기축통화라는 달러화 위상을 흔들려는 움직임이 본격화할 수 있다. 뉴욕 소재 투자업체 재니몽고메리스콧 소속 투자 전략가 가이 르바스는 영국 일간지 파이낸셜타임스와 가진 인터뷰에서 “이것(미국 신용등급 전망 하향 조정)은 지금까지 금융 영역에서 논란의 여지가 없는 교리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신용등급이 최상위라는 것이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미국 재정 상태는 형편없다. 재정 적자 규모는 이미 임계치를 넘어섰다. 미국이 달러화를 찍어내는 나라가 아니었다면 일찌감치 국가 부도 사태에 빠졌을 것이다. 미국 재정 적자는 올해 1조5천억~1조6천5백억 달러까지 치솟을 전망이다. 국제통화기금(IMF)은 ‘미국 재정 적자는 2011년에 GDP의 10.8%에 이를 것’이라고 전망했다. 미국 정부가 안고 있는 부채 규모도 천문학적이다. 순부채(대외 채무에서 대외 채권을 뺀 금액)는 GDP의 70%를 웃돌아 14조2천억 달러에 이른다. 의료 보험과 공제 지출, 퇴직연금, 온갖 재정 지원 정책에다 기존 채무에 대한 이자까지 정부 지출액은 걷잡을 수 없는 기세로 불어나고 있다. 하원 다수당인 공화당의 에릭 캔터 원내총무는 “스탠더드앤푸어스가 명쾌하게 지적했듯이, 정부 지출과 재정 적자 증가세를 통제해야 할 과제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일이 되었다”라고 말했다. 미국 투자그룹 블랙스톤의 공동 창업자 피터 피터슨은 미국 일간지 뉴욕타임스와 가진 인터뷰에서 “(미국 경제가) 지속 가능할지 걱정스럽다”라고 말했다.

신용등급 전망 하향 조치가 느닷없이 생겨난 것은 아니다. 미국 신용평가 기관들은 올해 초부터 신용등급 전망을 하향 조정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지난 1월 스탠더드앤푸어스와 무디스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국가 부채가 지금처럼 늘어나면 최상위 신용등급을 하향 조정할 수 있다’라고 발표했다. 무디스는 올해 1분기 보고서에서 ‘미국 신용등급 전망을 안정적에서 부정적으로 낮추어야 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라고 밝혔다. 무디스는 1917년부터 미국 재무부 채권에 대해 최상위 등급을 주고 있다.

▲ 지난 4월18일 미국 뉴욕의 스탠더드앤푸어스가 미국의 정부의 신용등급 전망을 부정적으로 하향 조정했다. ⓒEPA

정치에 대한 불신까지 겹쳐 ‘캄캄’

신용등급 전망이 하향 조정된 배경에는 미국 정치에 대한 불신이 깔려 있다. 미국 정치 체제가 재정 적자를 감축할 긴축 조치에 합의할 수 있을지에 대한 불신감이 팽배하다. 니콜라 스완 스탠더드앤푸어스 신용분석가는 “금융 위기가 발발한 지 2년이 지났으나 미국 정책 당국자 사이에 재정 악화를 반전시키거나 재정 압박을 해결할 방안에 대한 합의가 아직 마련되지 않고 있다”라고 말했다. 오바마 행정부는 민주당과 공화당이 재정 적자를 줄일 수 있는 방안에 합의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기다리다 못해 백악관이 직접 나섰다. 조 바이든 미국 부통령이 5월5일 재정 적자 해소 방안에 대해 논의하는 양당 모임을 주최한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도 폴 라이언 공화당 의원과 함께 재정 적자 감축을 위한 장기 비전을 발표했다. 백악관은 4월 셋째 주에 세금 인상, 의료 혜택 조정, 군사비 감축을 골자로 하는 재정 적자 감축 방안을 제시했다. 공화당은 정부 지출을 더 줄이고 의료 보험과 공제 대상을 조정하는 획기적인 조치를 요구하고 있다. 미국 정치권이 갖가지 재정 적자 감축 방안을 산발적으로 쏟아내고 있으나 여전히 합의점을 도출하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 보니 미국 내 투자자들마저 미국 채권을 신뢰하지 않고 있다. ‘채권 투자의 귀재’ 빌 그로스 퍼시픽인베스트먼트매니지먼트 창업자는 지난 2월 미국 재무부 채권을 모두 팔고 3월에는 채권 선물마저 ‘숏포지션(팔자)’을 취하고 있다. 빌 그로스는 “스탠더드앤푸어스의 이번 조치는 투자자에게 보내는 경고 신호라는 것을 워싱턴 D.C.가 분명하게 인식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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