땀방울·먼지 한 점도 ‘용의 선상’에 올린다
  • 조철 기자 (2001jch@sisapress.com)
  • 승인 2011.12.25 2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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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수사 전문가가 들려주는 한국 범죄 수사의 현주소

한국의 CSI 표창원·유제설 지음 북라이프 펴냄 396쪽│1만5천8백원
2011년 10월 ‘이태원 살인 사건’으로 불리며 영화화되기도 했던 사건의 용의자가 공소 시효를 6개월 남짓 남겨놓고 미국에서 붙잡혔다. 1997년 4월3일 사건 현장에 함께 있었던 용의자 두 명은 서로 상대방을 범인이라고 진술해 둘 다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고 풀려났다. 14년이 더 넘어 검찰은 그중 한 사람인 아더 패터슨을 진범으로 확신하고, 미국으로 도피한 지 10여 년 만에 붙잡힌 그를 기소했다.

검찰은 패터슨이 진범이라는 결론을 내리는 데 각종 첨단 수사 기법을 동원했다고 발표했다. 첨단 과학수사 기법으로는 혈흔 형태 분석과 진술 분석 기법을 적용했다. 이런 기법은 사건 당시에는 없었던 것으로, 2008년에야 국내에 도입되었다고 한다. 특히 검찰은 이태원 살인 사건 현장인 화장실을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검에 실물 그대로 재현했는데, 지난 12월21일 언론에 공개해 이목을 끌었다. 과학수사로 얻은 결론을 증명하기 위한 노력을 엿볼 수 있는 장소라 할 수 있겠다. 그 노력이 결실을 맺는다면 오는 4월3일 안으로 진범에 대한 선고 공판이 이루어질 것이다.

매년 증거 불충분으로 미제 사건들이 쌓인다. 이 나라에 미제 사건이 남지 않게 하려 애쓰는 사람들이 있다. 경찰대학에서 강의하고 있는 표창원·유제설 교수는 최근 <한국의 CSI>라는 제목으로 한국 법 과학이 진화해온 과정과 현재 어떤 수준에 올랐는지 진단했다. 표교수는 “범죄와 수사에 대해 아는 만큼 사회도 안전해진다”라며 책을 펴낸 동기를 설명했다. 그가 바쁜 와중에도 각종 미디어의 인터뷰 및 출연 요청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이유이기도 하다. 드라마 <CSI>를 포함한 과학수사물이 범람하면서 현실을 왜곡하거나 과대 포장하는 부작용도 일어나고 있어, 과학수사에 대해 제대로 알려야겠다는 의무감도 생겼다고 한다. 일각에서 수사 기법이 자주 노출되면서 범죄자에게 법망을 피해갈 ‘힌트’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는 것에 대해서는, 과학수사의 막강한 힘이 홍보되면서 오히려 범죄 욕구 자체를 억누르는 효과가 있다고 주장했다.

<한국의 CSI>가 제시하고 있는 범죄 사례는 대부분 완벽해 ‘보였던’ 것들이다. 저자들은 각 사례들에서 풍부한 사진 자료를 확보하고 각 분야 전문가들에게 자문을 구하기도 했다. 과학수사 미비로 인해 미궁 속으로 빠졌던 유명 미제 사건들의 뒤엉킨 실타래를 하나하나 풀어 분석했다. 

2011년 1월14일. 출산을 한 달 앞둔 만삭의 의사 부인이 집안 화장실 욕조 안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다. 대학병원 전공의인 남편이 강력한 용의자로 지목되면서 세간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유명 대학 출신 의사가 연루된 데다 욕조에서 발견된 시체, 경부 압박으로 인한 질식사 등 여러 상황이 1995년 치과의사 모녀 살해 사건을 연상시켰기 때문이다. 1995년 당시 사건에서는 ‘사망 시각’이 가장 중요한 쟁점이었다. 당시는 과학수사라는 개념이 확실히 자리 잡지 못한 상황이었다. 결국 이 사건은 “시신 상태로 사망 시각을 정확히 밝히기 어렵다”라는 증언을 이끌어내 용의자는 무죄로 풀려날 수 있었다.

이로부터 16년 후 벌어진 만삭 의사 부인 살해 사건은 여러 증거물과 부검 등을 활용한 적극적인 과학수사를 통해 사건 정황이 뚜렷이 증명되면서, 결국 용의자는 징역 20년형을 선고받았다.

이 책은 두 사건의 결과가 이처럼 다른 것을 비교해 16년 동안 한국의 과학수사가 어떻게 발전해왔는지를 보여준다. 일선 경찰들은 과학수사에 대한 기본 소양을 익혀 현장 보존 및 증거 수집에 익숙해졌으며, 검시관·법의관 등을 비롯한 법과학자들의 증거물 분석 능력 역시 크게 향상되었다는 것이다. 그들의 노력만큼 새해에는 완전 범죄를 꿈꾸는 사이코패스가 나타나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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