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조작 선수, LG 외에 또 있다”
  • 김진령 기자 (jy@sisapress.com)
  • 승인 2012.02.21 02:16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지난해 10월 가담한 투수 실명까지 밝히는 제보 들어와…아마추어 야구계에도 승부 조작 횡행


프로야구 출범 31년 만에 최대 위기가 찾아왔다. 최근 대구지검에서 불법 스포츠 베팅 사이트와 관련해 조사를 받던 한 브로커가 “프로야구에도 승부 조작이 만연해 있다”라고 폭로한 것이다. ‘승부 조작 청정 지역’이라고 자신했던 프로야구계는 이 폭로로 큰 충격을 받았다. 많은 야구인은 “브로커의 신빙성 없는 발언이다”라며 승부 조작 가능성을 일축하면서도, 만약 사실로 밝혀질 때 야구계에 미칠 부정적 영향을 걱정하고 있다.

2월13일 대구지검은 지난해 5월 프로축구 K리그 승부 조작 사건을 주도한 혐의로 구속 기소된 브로커 김 아무개씨(28)를 수사하면서 새로운 사실을 알아냈다. 그가 프로배구 승부 조작에도 가담했다는 것을 밝혀낸 것이다. 하지만 검찰이 더 놀란 것은 다음이었다. 김씨는 “또 다른 브로커 강 아무개씨(29)가 남자 프로배구뿐 아니라 여자 프로배구, 프로야구 등의 승부 조작에도 참여한 것으로 안다. 강씨가 프로야구 경기에서 ‘첫 회 볼넷’ 등을 놓고 두 명가량의 현역 투수들과 모종의 거래를 한 것으로 들었다”라고 진술했다.

KBO는 프로야구계 승부 조작 가능성 일축

검찰은 의외의 진술에 화들짝 놀랐다. 프로야구는 지난해 7백만명 관중 몰이에 성공한, 그야말로 ‘국민 스포츠’이다. 국민이 느낄 혼란과 배신감이 다른 스포츠에 비해 훨씬 클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프로야구는 그동안 ‘승부 조작 청정 지역’으로 통해왔다. 그런 프로야구에서 승부 조작이 횡행했다는 것은 충격 그 자체였다. 김씨는 한 발짝 나아가 승부 조작에 가담한 구단과 선수를 실명으로 지목하며 진술의 신빙성을 높였다. 검찰은 김씨의 진술을 토대로 프로야구의 승부 조작 의혹을 최초로 공개했다.

검찰의 수사 상황이 발표되자 야구계는 큰 충격에 빠졌다. ‘승부 조작에서 야구는 예외일 것’이라는 믿음이 여지없이 깨진 때문이었다. 하지만, 야구계는 검찰 발표를 믿지 못하겠다는 자세였다. 한 야구해설가는 “한낱 브로커의 진술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느냐. 검찰이 구체적인 증거를 제시하지 않는 이상 아직 의혹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구단 관계자들도 같은 입장이었다. 지방의 한 구단 단장은 “프로야구는 뜬소문으로라도 그같은 이야기가 나온 적이 한 번도 없다. 브로커가 위기에 몰리자 자신을 구명하려는 차원에서 엉뚱하게 프로야구를 끌고 들어갔다”라고 반발했다.

한국야구위원회(KBO)도 프로야구의 승부 조작 가능성에 대해 일축했다. KBO 양해영 사무총장은 “프로야구에서 첫 회 볼넷이 얼마나 많은지 아느냐”라고 반문했다. “만약 브로커의 말대로 첫 회 볼넷이 승부 조작과 관련 있다면 대한민국 모든 프로야구 투수가 용의자가 될 것이다. 첫 회 볼넷으로 승패가 결정되지도 않는다”라고 강조했다. 그는 “KBO는 검찰의 정식 발표가 나오기 전까지 사태 추이를 관망할 것이다”라고 밝혔다.

브로커 김씨가 지목한 구단은 LG이다. 김씨는 검찰 조사에서 “브로커 강씨로부터 LG 투수 박현준과 김성현이 승부 조작에 가담한 것으로 들었다”라는 구체적인 진술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사실이 언론을 통해 알려지자 LG는 공황 상태에 빠졌다. 일본 오키나와에서 전지훈련 중인 LG 선수들은 “언론 보도가 사실이냐”라고 물으며 “코칭 스태프가 ‘절대 동요하지 마라’라고 했지만, 동료가 개입된 것처럼 알려져 훈련에 집중할 수 없는 상태이다”라고 털어놓았다. LG 백순길 단장은 “만약 우리 구단 선수가 승부 조작에 가담한 것이 사실이라면, 이것은 구단 해체와도 연결될 수 있는 중요한 문제이다”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백단장은 “박현준과 김성현을 면담한 결과 ‘일체의 승부 조작에 가담한 사실이 없다’는 진술을 받았다. 브로커의 주장이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라고 주장했다.

원로 야구인 “과거 뉘우치고 과오 털어내라”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어째서 브로커가 LG와 넥센을 지목했느냐는 것이다. 프로야구 승부 조작이 공론화되기 훨씬 이전에 필자는 한 제보자로부터 “프로야구 선수들이 승부 조작과 관련되어 있다”라는 제보를 받았다. 그때가 지난해 10월이었다. 이 제보자의 제보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불법 스포츠 베팅 사이트에서 프로야구는 최고의 베팅 종목이다. 승패가 관건인 다른 종목과 달리 프로야구는 다양한 방법으로 1회부터 베팅을 유도한다. 대표적인 것이 초구 볼카운트이다. 초구가 볼이냐, 스트라이크냐를 두고 돈을 거는 것이다. 이 방법은 승부 조작이 탄로 날 가능성이 작고, 승패에도 큰 영향을 주지 않아 불법 토토 사이트에서 매우 선호하는 베팅 방식이다. 하지만, 이 방식은 브로커의 농간에 좌지우지되는 베팅이기도 하다. 실제로 몇몇 브로커가 한 구단 투수와 타자에게 접근해 ‘초구 볼을 던지는 대가로 얼마를 주겠다’라고 유혹했고, 선수들이 이 브로커에게 넘어갔다. 브로커의 지시대로 몇몇 투수는 실제 경기에서 초구 볼을 던졌다.”

이 제보자는 ‘몇몇 투수’의 실명을 거론하기까지 했다.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유명한 투수들이다. 이들은 볼카운트 조작에 수차례 가담했다. 두 투수는 다른 구단 소속이지만, 동일 브로커의 지시에 따라 움직였다.”

필자는 제보자의 말을 듣고 반신반의했다. 추가 취재를 통해 불법 스포츠 베팅 사이트에서 프로야구가 주요 베팅 종목임을 확인했으나, A와 B 투수가 승부 조작에 적극 가담했다는 물적 증거는 확보하지 못했다. 그러나 5개월이 지난 지금, 제보자의 제보는 대부분 사실로 밝혀졌다. 문제는 제보자가 지목했던 구단이 현재 언론 보도를 통해 알려진 LG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이는 프로야구 승부 조작과 관련된 브로커가 한 명이 아니라 복수일 수 있고, 이들이 각기 움직이며 광범위한 프로야구 승부 조작을 이끌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다.

야구계에서는 “이 기회에 아마추어 야구계에서 일어나는 승부 조작도 근절해야 한다”라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프로야구 경기 조작이 승패보다 초구 볼카운트를 비롯해 각 플레이의 인위적 조작에 집중한다면, 아마추어 야구계의 승부 조작은 오직 승패와 관련되어 있다.

한 고교 야구팀 감독의 말을 들어보자. “중·고교 야구계의 승부 조작은 최근까지 횡행했다. 승부 조작을 ‘범죄’로 인식하는 지도자는 드물다. 제자들의 대학 특기생 자격을 얻기 위한 일종의 관행 혹은 감독 간의 품앗이로 인식한다.”

의식 있는 야구인들이 “프로야구 승부 조작은 아마추어 승패 조작에서 기인했다”라고 지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닌 셈이다. 한 야구해설가는 “유년 시절 아무 죄의식 없이 승패 조작에 앞장서는 어른들을 보며 자란 젊은 프로야구 선수들은 브로커가 승부 조작을 제의했을 때 사안의 위험성을 인식하지 못했을 것이다. 프로야구 승부 조작을 뿌리 뽑으려면 아마추어 야구계부터 깨끗하게 정화해야 한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한 원로 야구인은 뼈 있는 조언을 했다. “한국 야구계는 ‘승부 조작 청정 지역’이 아니었다. 그렇게 믿고 싶었을 뿐이고, 그런 믿음으로 승부 조작을 정당화했을 뿐이다. 이제 한국 야구계가 할 일은 솔직하게 지난 과거를 반성하고 과오를 털어내는 것이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