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 정부 문화부는 완전 좌파, 그런데 왜 날 공격하나”
  • 김진령 기자 (jy@sisapress.com)
  • 승인 2013.04.24 1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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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보면 심장마비 날 것 같아…이젠 밑바닥서 다시 뛸 때

전직 문화체육관광부장관 유인촌.

연극 무대에서 햄릿 역으로, 안방극장에선 <전원일기>의 ‘양촌리 김 회장댁 둘째 용식이’로 대중과 친숙했던 유 전 장관이 정치 무대로 판을 옮긴 것은 지난 2004년. 이명박(MB) 전 대통령이 서울시장으로 있을 때 캠프의 브레인풀 역할을 하던 서울문화재단의 대표가 되면서부터다. 그는 4년 뒤 이명박 정부가 출범하면서 최장수(3년) 문화부장관을 지냈다. 이어 2011년 대통령 문화특별보좌관, 2012년 2월 예술의 전당 이사장에 임명됐고 대선을 앞둔 9월 사임했다. 이 전 대통령의 신임이 두터웠던 그는 MB 정부의 아이콘 중 하나였다. MB 정부를 향했던 많은 비판은 그의 등짝에 꼽혔다.

지금 그는 2002년 자신이 만든 유시어터의 대표 자리로 돌아갔다. 그의 청담동 집 지하가 바로 유시어터다. 그는 세 가지 이상의 일을 동시에 하고 있다. 틈틈이 대중 강연을 하는 한편, 오는 4월26일 막을 올리는 연극 <파우스트-괴테와 구노의 만남>에서 연출자 겸 배우로 무대에 복귀한다. 또 7월에 무대에 올리는 톨스토이 원작의 대작 <홀스또메르>의 연습도 시작했다. 3~4년 뒤에는 근거지를 강원도 봉평으로 옮겨 지역문화운동을 할 궁리를 하고 있다.

출발점이었던 연극으로 되돌아온 유인촌 전 장관에게 말도 많았던 장관 시절에 대한 소회부터 물었다.

 

4월15일 유인촌 전 문화부장관을 만나 장관 시절에 대한 소회와 무대 이야기를 들었다. ⓒ 시사저널 이종현
왜 공직에 발을 들였나?

계획한 것은 아니다. 인연이 되다 보니까. 내가 현장(연극)에서 겪었던 어려움 같은 것, 서울문화재단 일을 할 때 느꼈던 것, 그런 일을 해결하고 싶다는 생각은 많이 했다. 예술계 환경을 좋게 만들고 국민 삶의 질을 올려주는 그런 역할을 해보고 싶었다.

문화부장관으로 장수한 비결이 있나?

뒤를 생각하지 않았다. 사고도 많았지만 진정성을 갖고 한 것이다. 정책이 현장에 스며들 수 있도록 정말 열심히 뛰었다. 매 주말마다 전국을 찾아다녔다. 대통령도 많은 배려를 해주셨다. 문화부 일에는 여러 부처의 이해가 걸린 게 많아 한 부처의 힘만으로는 할 수가 없다. 그런 것을 풀어갈 수 있도록 도와줬다. 그만큼 나를 믿고 맡겼다고 본다.

MB가 어떤 점을 높이 산 것 같나?

모르겠다.(웃음) 나는 행운아다. 일할 때는 다른 생각 안 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을) 지금도 자주 찾아뵙고 있다.

재임 중 이런저런 논란이 자주 이슈화됐는데.

성격적인 것도 있다. 하다못해, 사무실 앞에서 누가 1인 시위를 해도 한 번도 그냥 지나친 적이 없다. 찾아가 ‘왜 여기서 이 고생이냐’고 말을 건넸다. 직접 내 발로 찾아가 의논을 하기도 하고, 그런 게 결국 더 시끄럽게 만든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사고가 많았던 이유는?

일을 하려고 들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하면 부딪힐 것이 없는데 뭔가 새로운 것을 하고, 고치려다 보면 힘든 게 많이 생긴다. 현장에서 느꼈던 것을 개선하고 싶었고, 두 번 할 생각을 안 했기에 후회 없이 일했다. 장관을 3년 했으니 오래 한 셈이다. 그렇게 해서 된 것도 있고, 안 된 것도 있다.

‘된 것’이 있다면?

무엇보다 영화나 음악의 저작권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했다. 우리나라가 미국의 저작권 감시 대상국이었다. 2009년 1월 미국 국무부가 저작권 감시 대상에서 해제했다. 발표 직전 미국 대사가 “기쁜 소식”이라며 전화로 알려왔다. 기무사 터에 국립현대미술관 분관을 세운 것이나, 문화부 청사를 포기하고 그 자리에 근현대사박물관을 세운 일, 한글박물관 건립, 서계동에 국립극단 극장을 마련해준 것 등 많다.

무엇보다 산하 단체에 ‘벌어서 써라’는 원칙을 없앴다. 국립단체는 좋은 작품, 상업적인 논리로 올릴 수 없는 작품을 만들어야 한다. 산하 국립단체를 줄이는 추세 속에서도 국립현대무용단을 창단한 것은 사실 무용계에 큰 선물이다. 예술계 쪽에는 명예나 명분을 많이 만들어주고 싶었다. 정부 포상이나 명예의 전당 신설처럼 당장 금전적 보상은 안 돼도 길게 보면 그들에게 도움이 되는 큰 틀을 만들어주고 싶었다.

아쉬웠던 점은?

추진하는 과정에서 방법이나 그런 게 너무 서투르거나 미숙했던 것, 경험 부족이 아쉬웠다. 현장에 있는 분과 갈등을 더 만들지 않고 협조를 잘할 수 있는 노련함이 부족하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이 있다. 문화예술 쪽은 한계가 없는 것이니까. 끊임없이 질문하는 게 문화부의 역할이다.

국립오페라단 합창단 해산과 관련해 진통이 컸다.

그들 입장을 십분 이해한다. 오페라단이 합창단을 임의로 만들어 7년이나 운영한 것이다. 그 친구들은 언젠가는 ‘정식’ 국립오페라단 합창단이 되리라는 기대를 갖고 7년이나 일한 것이다. 이것은 정치적 이슈와 상관없는 문제였다. 오페라단 단장에게 물었더니 국립합창단과 해야 한다고 말하더라. 전임자들이 사업비로 합창단을 임의로 만들어 운영한 것은 말이 안 되는 행위인데, 그 해결 문제가 나에게 떨어진 것이다. 나는 사회적 기업을 해결책으로 내놨다. 나도 잘못한 게 있을 것이다. 더 논의도 하고 시간을 갖고 해결했더라면 하는 생각이 든다.

영화를 제외한 다른 분야와는 원만했던 것 같다.

순수예술 쪽은 지원을 많이 늘렸다. 국립오페라단이나 국립극단 지원액이 100% 넘게 증가했다. 적어도 국립기관은 돈 벌지 말자고 얘기했다. MB 정부 입장에서 보면 문화부 정책은 완전히 좌파 정책이었다. 창작 뮤지컬은 지원해도 브로드웨이 라이선스 뮤지컬은 지원하지 않았다. 산업에는 지원하지 않는다는 원칙이었다. 문화 바우처 정책으로 산골 공연을 가능하게 하고 소외받는 지역으로 예술을 실어 보냈다. 나는 어둡고 못사는 예술 분야에 지원을 늘렸다. ‘똑같이 나눠 갖자’, 이게 좌파 정책 아닌가. 그런데 왜 날 공격하나.

김연아 동영상 사건으로 네티즌에 대해 수사를 의뢰하기도 했는데.

그때는 내가 인터넷 사용에 대한 교육적 차원에서 7~8명을 잡아냈다. 그들이 문화부 누리집에 사과 글도 올리고, 나도 다 용서를 했다. 그들도 어떻게 보면 피해자다. 그중에 사과를 하지 않은 친구가 한 명 있었는데, 그 친구만 정치권과 연루돼 있었다. 고소를 하자 어떤 이들이 나보고 ‘유머도 모르는 장관’이라고, ‘웃자고 한 일에 죽자고 덤빈다’고 비아냥거렸다. 그게 잘못된 것이다. 잘못된 것은 잘못한 것이라고 사과를 해야지. 나를 두 번 죽이는 것이었다.

재임 기간 동안 인터넷을 통해 공격을 많이 받았다.

처음에는 많이 속상했다. 사실이 아닌 것들이 너무 많은데, 사람들이 뒤집어서 생각하고, (사실을) 변형시키고, 공격하고 그러는 것을 보면 속상했다. 인터넷을 들여다보면 심장마비가 날 것 같았다. 어느 순간부터 그걸 넘어섰다. 거기에 붙들리고 매달려선 전혀 도움이 될 게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공직 경험을 통해 남은 것이 있다면?

다 잃었다. 개인적으로 얻은 것은 없다. 명예도, 돈도. 장관이 되기 전에 극장도 만들고, 극단도 만들고, 봉평에도 극장을 만들었다. (연극인으로서) 역할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한 것이다.

장관이 됐을 때 야당 의원들 쪽에서 난리가 났다. 나는 1원짜리 하나 국가에서 받은 게 없다. 그전에 내가 방송을 해서 돈을 벌었으니까. ‘연극만 하는 친구들에게 돈 좀 더 줘라’라는 주의였다. 예전에도 나라에 지원 신청을 한 적이 없다. 지금은 내가 돈벌이하러 다니기 힘들다. 장관까지 했는데 광고를 찍겠나, 드라마를 하겠나. 지금은 오히려 무대에서, 밑바닥에서 다시 뛰어야 할 때다.

새 정부의 문화부장관(유진룡)은 관료 출신이다.

다들 당시에는 나름의 기준을 갖고 잘하려고 하는 것이다. 오해가 문제일 뿐. 먼저 하고 나온 입장에서는 후임자가 추진하려는 일을 밖에서 돕는 게 순리다. 지금 잘하고 있는 것 같다. 문화부 일은 결과물이 바로 나오는 것이 아니다. 더 기다려줄 필요가 있다. 문화부의 일은 모험, 도전, 새로운 가능성에 대한 개방이다. 행정 경험이 많은 관료 출신에게 바깥의 새로운 아이디어를 보탤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더 좋을 것이다.

정치는 안 하나?

식구들이 공직 끝낸 것을 더 좋아한다. 한때 좋은 경험을 한 것으로 족하다. 나는 같은 일을 두 번 안 한다. 나 스스로가 정리할 때라고 생각한다. 정치는 이제 끝이다. 뒤도 안 돌아보는 스타일이다. 연극에서 할 일도 많다. 1년에 두 편씩 해도 몇 편 더 못 한다. 연극은 기운 떨어지면 못 한다.

재직할 때보다 몸이 좋아진 것 같다.

장관 할 때보다 3kg이 빠졌다. 그때는 밥 먹는 것도 일이었다. 공연을 하면 자기 관리가 된다. 술·담배도 줄이고.

4월15일 유 전 장관이 배우들과 함께 를 연습하고 있다. ⓒ 시사저널 이종현
김 회장댁 둘째 아들 용식이와 햄릿 중 어떤 캐릭터가 취향에 맞나?

무대가 내 취향이다. <전원일기>는 오래 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기억하는 것일 뿐이다. 햄릿은 드라마틱하고 연기할 부분이 많다. 호암아트홀 개관 공연이나 토월극장 개관 공연도, 유시어터 개관 공연도 모두 내가 주연한 <햄릿>이다. 올겨울에 <햄릿>을 올릴 것이다. 더 늙기 전에 햄릿을 한 번 더 하고 싶은데, 극단 식구들이 말린다. 늙었다고.(웃음)

 

그는 연극 활동에 강한 애정을 보였다. 하지만 그가 대중에게 얼굴을 알린 곳은 텔레비전 드라마였다. 언제쯤 그를 텔레비전에서 볼 수 있을까.

 “10년 뒤나 가능하지 않을까? 당분간은 무대에만 있을 것이다. 내가 장관하면서 하려다 못 한 일을 무대 현장에서 할 것이다. 노령으로 분장할 필요가 없는 나이, 인생의 주름살이 더 많아졌을 때 영상은 어울리지 않을까. 공무원 생활도 바람처럼 지나갔으니까 욕하는 사람도 욕을 그칠 때가 있을 것이다. 세상에 나쁘게 되자고 하는 일이 어디 있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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