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리운전 하는 의사 번역 아르바이트 하는 변호사
  • 문정빈 인턴기자 ()
  • 승인 2013.05.29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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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난 못 견뎌 지방으로 가 재개업하기도

사법시험에 합격하고서는 장밋빛 희망에 부풀었다. 주변에서는 율사가 된 그를 부러워했다. 세상 모든 것을 다 가진 듯했다. 하지만 10년간 변호사 사무실을 운영해온 그는 최근 자신이 살던 아파트 13층에서 투신했다.

5월8일 어버이날이었다. 죽기 전날 밤 그는 아내에게 더는 생활이 나아질 것 같지 않으니 마음을 단단히 먹으라는 말을 남겼다. 경찰은 그가 사무실 운영 등의 문제로 심적 고통을 호소했다는 유족의 진술을 바탕으로 정확한 사고 경위를 조사 중이다.

우리 사회에서 의사와 변호사는 선망의 직업이었다. 이른바 ‘사(士)’자를 대표하는 이들은 시기와 부러움의 대상이기도 했다. 최근 들어 이들이 극단의 선택을 하는 일이 심심치 않게 발생하고 있다.

그들의 목줄을 죈 것이 경제적 어려움이라는 점은 과거에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일이다. <시사저널>은 심각한 경제난에 허덕이고 있는 의사와 변호사들의 실태를 취재했다. 빚더미에 앉아 자살까지 생각한다는 이들의 하소연은 처절했다.

ⓒ 일러스트 김세중
알바 일까지 해도 빚더미 못 벗어나

변호사들 중 빚더미에 올라앉은 이들이 적지 않다. 법조 타운인 서울 서초동에서 10년 동안 변호사 사무실을 운영했던 김 아무개씨(52)는 “지금 상황이 최악이다”라고 털어놓았다. 그가 밑지지 않으려면 최소한 월 1000만원 이상 매출을 올려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 달에 3~4건의 사건은 수임해야 한다.

하지만 개인 변호사가 이런 실적을 올리기는 어렵다고 한다. 어떤 달은 단 한 건의 사건도 맡지 못할 때도 있다. 그는 직원 월급을 주기 위해 밤에 번역 아르바이트까지 했다. 하지만 더는 적자를 견디지 못해 지난해 사무실 문을 닫았다.

서울을 떠나 지방으로 내려가는 변호사들도 있다. 부산에서 변호사 사무실을 운영하고 있는 이 아무개씨(36)는 4년 전 큰 꿈을 안고 서초동에 변호사 사무실을 열었다. 하지만 초임 변호사가 사건을 수임하기는 쉽지 않았다. 250만원의 월세도 감당하기 버거웠다. 그는 폐업 후 부산으로 내려갔다. 그는 “서초동보다 임대료가 싸다는 장점은 있지만, 지방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다. 사건 자체가 많지 않기 때문이다. 겨우 손익분기점을 넘기고 있지만 언제 폐업할지 걱정”이라고 말했다.

서초동의 한 부동산중개업소 사장은 “예전에는 서초동 대로변에 사무실 자리가 나면 금액이 얼마든 선점하기 위한 경쟁이 치열했다. 하지만 요즘에는 그런 일이 없다”고 말했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 관계자는 “최근 2~3년 사이 회비 10만원을 내지 못해 회원을 탈퇴하는 변호사 수가 급격히 늘어났다”고 밝혔다.

의사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병원을 개업한다고 해서 모두 돈방석에 앉는 게 아니다. 요즘 환자가 없어 문 닫는 병·의원이 많고, 생활고에 시달리는 의사들도 적지 않다. 흉부외과 전문의 이 아무개씨(55)는 “자살하는 의사들의 심경이 이해가 된다”며 어렵게 말을 꺼냈다.

그는 서울 은평구에서 5년간 병원을 운영했다. 한 달에 나가는 돈만 1000만원에 달했다. 환자 수는 하루 평균 30~40명 남짓했는데 손익분기점도 못 맞췄다. 직원 수를 줄이고 카운터에 아내를 앉혔다. 하루 21시간 일했다. 잠을 제대로 잔 날이 없었다. 저녁 7시부터 12시간 동안 응급실 아르바이트까지 했다. 그런데도 빚은 눈덩이처럼 쌓여갔다. 개원한 지 5년째 되던 해, 그나마 환자 수가 20명 안팎으로 줄어들었다. 대안이 없었다. 결국 병원 문을 닫기로 했다. 남은 것은 10억원이 넘는 빚과 부쩍 늘어난 주름살뿐이었다.

경기도 광주에서 병원을 운영했던 산부인과 전문의 차 아무개씨(48)의 처지도 마찬가지다. 한 달에 분만 건수는 10건도 채 되지 않았다. 개원한 지 5년 만에 그는 분만실을 폐쇄했다. 이후 비만, 피부 미용, 내과를 모두 진료했다. 그래도 사정은 나아지지 않았다.

환자 수는 하루 20명도 되지 않았고 은행 빚은 7억원으로 불어났다. 빚을 갚기 위해 주말마다 다른 병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것은 물론 틈틈이 대리운전까지 했다. 그는 “자식들만 아니면 무슨 일을 저질렀을지 모른다”고 토로했다. 개원 10년째 되던 해에 그 역시 병원 문을 닫았다.

의사·변호사 양극화 심화 추세

의사와 변호사들 중에는 여전히 큰돈을 버는 이들이 적지 않다. 하지만 갈수록 규모의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양극화가 심해지는 추세다. 올해 2월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 공개한 ‘2012년 요양기관 현황 및 개·폐업 의료기관 현황’에 따르면 같은 의사 사이에도 전공별로 차이가 컸다.

성형외과의 경우 2012년 개업 의원 수는 72개소로 폐업 의원 수 65개소보다 많았다. 반면 산부인과와 가정의학과 등은 이른바 ‘개·폐업 역전 현상’을 보였다. 산부인과의 경우 2012년 폐업 의원 수는 97개소로 개원 수보다 많았다. 흉부외과는 전공을 숨기고 일반 의원 형태로 개원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2012년 개원한 의원이 한 곳도 없었다.

서울과 지방 간 양극화도 심화되고 있다. 서울의 경우 2012년 신규 개업 의원 수는 1821개소로 폐업 의원 수보다 많았다. 그러나 부산·강원·충남·전남 등 지방에서는 역시 ‘개·폐업 역전 현상’이 나타났다. 부산의 경우 2012년 폐업 의원 수가 145개소에 달했다.

부산에서 의원을 운영하고 있는 한 의사의 얘기다. “서울에서 병원 운영이 어려워 지방으로 내려오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수도권 병원들의 몸집 불리기 경쟁이 치열한 데다 KTX 운행으로 교통이 편리해져 지방 환자들의 이탈이 늘어나고 있다. 결국 지방에서 서울로, 서울 중에서도 몇몇 대형 병원으로만 환자들이 몰리고 있다.”

10년 전까지만 해도 ‘부의 상징’이었던 의사 직군의 양극화가 왜 이렇게 심해진 것일까. 의사 수 증가와 수가 불균형이 원인으로 지적된다. 윤용선 대한의원협회 회장은 “김대중 정권 때 의대 정원이 2000명에서 3000명으로 늘어났다. 12~13년 사이에 의사 수가 4~5배 늘어 경쟁이 치열해졌다”고 말했다. 한 의사는 “특정과는 수가가 높고 특정과는 수가가 낮다. 때문에 꼭 필요한 과에 대해서는 수가 균형을 맞춰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변호사 시장의 양극화 현상도 마찬가지다. 법조 시장 개방과 로스쿨 개원 등이 맞물려 격차가 더 벌어지고 있다. 법조 시장 개방 후 인수·합병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로펌의 경우 덩치부터 키우는 경향이 지속되고 있다. ‘전문 로펌’이 늘어난 것도 이 때문이다. 의뢰인들은 똑같은 조건이라면 가격은 더 저렴하고 규모가 큰 로펌을 선호한다. 대한변호사협회 관계자는 “개인 간판을 내걸고 사무실을 유지하기 어렵다. 착수금이 2000만원 이하인 사건들도 대형 로펌들이 가져가다 보니 개인 변호사들은 사건을 맡기가 더 힘들어졌다”고 말했다.

폐업 후 지방으로 내려간 한 변호사는 “지방에서는 암묵적으로 최저 가격이 220만원 선까지 내려갔다. 변호사는 상품을 파는 게 아니라 지식과 정보를 파는 것인데 이제는 가격 경쟁만 펼치는 상품이 돼버렸다”고 안타까워했다. 갈수록 개인 변호사의 사건 수임이 어려워지고 있는 것이다.

시장은 한정돼 있는데 변호사 수가 지나치게 많아졌다는 지적도 나온다. 대한변협 관계자는 “한 해에 변호사가 25%씩 늘고 있다. 1000명도 포화 상태라고 했는데 2500명이면 과포화 상태”라고 주장했다. 변호사 수가 늘어나는 것을 막을 게 아니라 변호사 시장 자체를 더 늘려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민변 관계자는 “지금도 변호사가 없는 자치구가 있다. 의료생협처럼 시장의 다양성이 필요한데 이런 제도적인 노력은 하지 않은 상태에서 변호사 수만 늘렸다”고 지ㅈㅓㄱ했다.

서울 서초동 법원 주변 변호사 사무실 간판들. ⓒ 시사저널 박은숙
의사, 변호사 직업군 모두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문제는 ‘적성’에 맞지 않는 직업 선택이다. 의사, 변호사가 되기 위한 필요조건은 ‘우수한 성적’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사회에서 요구받는 것은 ‘공부’가 아닌 ‘영업 마인드’였다. 결국 의사, 변호사에게도 시장 경쟁 요소가 적용되고 사람을 잘 끌어오는 것이 중요한 요소인 것이다.

민변 관계자는 “변호사도 자영업자다. 결국 손님을 끌어오는 것이 중요한데 사법시험 공부만 한 친구들은 이런 부부ㄴ들을 잘 못하는 친구들이 많다. 그런 경우 개업보다는 로펌에 들어가서 정해진 일들만 하는 것이 적합하지만 이런 자리가 없어 원하든 원치 않든지 개업을 하게 된다”고 지적했다.

의사 직군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한 가정의학과 전문의는 “개원하는 순간 ‘사람’을 끄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런데 그게 쉽지 않으니 계속 피부과·성형외과 등 의원 형태로 개원하는 것이다. 의사에도 영업적 요소가 도입되지만 공부와 실제 개업해서 마주하는 상황은 다르다. 의사들 사이트에 가면 돈도 문제지만 적성과의 괴리감 때문에 우울증을 호소하는 이들도 많다”고 말했다.

그들에게 직업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누군가는 ‘돈’ 그 자체가 목적이었을 테고, 누군가는 ‘명예’를, 누군가는 ‘일 그 자체의 즐거움’을 찾았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그들은 그 무엇 하나도 얻지 못한 채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다. 


결혼 시장에서도 ‘사(士)’는 찬밥 

‘사(士)’자 신랑감과 결혼하려면 열쇠 3개는 필수라는 말은 이제 흘러간 옛말이 되고 있다. ‘사(士)’자 남성이 결혼하기 위해서는 신붓감에게 열쇠 3개를 줘야 한다는 우스갯소리까지 나오는 실정이다. 직업 선호에서 안정성이 우선되고 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한 결혼정보업체에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의사는 배우자 우선순위 5위, 사법시험 합격자는 19위다. 1, 2위는 공무원과 교사가 차지했다. 3위는 대기업 종사자, 4위는 금융업 종사자였다.

결혼정보업체 관계자는 “물론 아직까지도 의사와 변호사에 대한 선호도는 높은 편이다. 하지만 수입이 일정치 않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예전과 같지는 않다. 어떤 직업이냐보다는 직업의 안정성, 실제 경제력 등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추세”라고 말했다.

다른 결혼정보업체 관계자도 “예전보다 조건이 까다롭고 구체적으로 바뀌었다. 몇 년 전만 해도 의사와 변호사라면 다른 조건을 따지지 않았지만 지금은 개원은 했는지, 빚은 얼마인지, 월수입은 얼마인지 꼼꼼히 따지고 만난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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