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서방 ‘인해전술’에 코리아타운 먹히다
  • 김원식│미국 통신원 ()
  • 승인 2013.12.18 1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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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뉴욕 플러싱에서 한글 간판 사라져 중국계 상인들이 노른자위 땅 접수

“우리가 고구려의 마지막 군사에요.”

미국 코리아타운의 상징인 뉴욕 시 퀸즈의 플러싱 공영 주차장 근처에서 30년 넘게 부동산 일을 해온 ‘한미부동산’ 백돈현 대표의 한마디는 이곳의 상황을 모두 담고 있다. 백 대표는 “예전에는 이곳 메인스트리트를 중심으로 코리아타운이 형성돼 있었다. 그런데 1997년 영국이 홍콩을 중국으로 반환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고 말했다. 홍콩의 자산가들은 홍콩이 중국으로 넘어가는 데 불안감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택한 것이 미국 이주였다. 그들이 밀려들어온 곳 중에는 뉴욕의 플러싱도 있다. 그때부터 플러싱의 메인스트리트를 중심으로 홍콩계와 타이완계 중국인들이 점차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그다음에는 중국 본토 사람들이 물밀듯 들어왔다. 백 대표는 “뉴욕의 플러싱은 이제 더 이상 코리아타운이 아니다. 차이나타운이 되고 말았다”고 말했다.

‘한미부동산’ 맞은편에는 ‘흥보당’이라는 보석점이 있다. 32년째 이 가게를 운영하고 있는 유영준 대표는 “초창기에는 한국인들이 이곳의 건물을 사면서 코리아타운이 형성됐다. 하지만 지금은 중국 사람들이 연변 사람들을 중간에 끼고 거의 모든 건물을 사들이고 있다. 그나마 남아 있는 한국인 가게도 등 떠밀려 나가면서 점점 줄어들고 있다”고 말했다. 유 대표는 한국인과 중국인이 갖는 소속감에서 이런 변화가 생긴다고 보고 있다. “한국인은 자신을 ‘이민자’라고 생각하지만, 중국에서 넘어온 사람들은 아예 여기에 뿌리를 박으려 한다. 최근 4~5년 사이 중국인들은 노든블로바드를 중심으로 빠르게 건물을 사들이며 치고 올라오고 있다.”

“중국인들은 돈 합쳐 건물부터 산 뒤 분배”

인근에 있는 ‘헤어커커’라는 미용실에 들어섰다. 직원은 아예 중국어로 방문 이유를 물었다. 미용실 안을 둘러봐도 한국인으로 보이는 손님은 없었다. 30년 넘게 이 미용실을 운영했다는 일난 김(Ilnan Kim) 대표는 “10년 전까지만 해도 괜찮았었는데, 요즘은 마음이 너무 안 좋다”고 말했다. 그의 마음이 불편한 것은 사라진 한국인 손님 때문이다. 김 대표는 “예전에는 주로 한국인과 일부 백인이 고객이었는데, 요즘은 한국인 고객을 찾아보기 힘들다. 혹시나 한국말을 사용한다고 해도 연변 교포들이나 중국 교포가 대다수”라고 말했다. 그는 플러싱의 변화를 하루하루 실감하고 있다고 했다. “맨해튼에 있던 중국 사람들마저 점점 플러싱으로 몰려오면서 이곳은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는 것 같다. 이 지역이 점점 차이나타운처럼 돼가다 보니 미리 겁을 먹고 떠난 한국인 가게도 수두룩하다.”

뉴요커들도 중국 이민자들이 급팽창하는 현실을 잘 알고 있다. 뉴욕 퀸즈에서 태어났고 여전히 뉴욕에서 회계사로 일하는 오리지널 ‘뉴요커’ 프랭크 데이비스는 중국 이민 사회의 팽창을 줄곧 지켜봐왔다. 그는 “중국인들은 부지런한 한국인들보다 무섭다. 그들은 방 하나에 여러 명이 모여 잠을 자며 오직 돈만 모으고, 그 돈을 합해 인해전술식으로 (전쟁하듯) 빌딩을 구입한다”고 말했다.

그가 본 한국인과 중국인의 플러싱 진출 전략은 다르다. “과거 한국인들은 자기들끼리 경쟁했다. 하지만 중국인들은 일단 돈을 모아 건물을 산 후 분배하는 원칙을 세우고 무섭게 플러싱을 장악해간다.”

코리아타운의 상권은 점점 죽어가고 있지만 한국 정부는 크게 관심을 두지 않고 있다. 민승기 뉴욕한인회 회장은 코리아타운이 급속히 쇠퇴하고 있는 현실을 두고 고민이 많다. 지금의 현실이 교민들의 협력이나 한국인 기업가의 노력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는 “중국인들은 플러싱에서 엄청난 개발 계획을 세우고 있다. 이것은 중국 이민자들만의 힘으로 되는 게 아니다. 중국 정부의 지원이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그가 본 중국인들은 미국의 유태계와 닮았다. 유태계와 거의 유사한 전략으로 미국 사회에 정착 중이다. “중국인들은 먼저 미국 정치권을 공략해 로비를 하고 중국계 정치인들을 배출하려고 한다. 한국인과는 근본적으로 다르게 일을 추진하고 있는데 이 차이가 중국 이민계가 급성장할 수 있는 바탕이 된다.”

중국계 은행과 중국 정부가 이민자들 지원

중국인들이 건물을 사들이고 개발 계획을 세우는 배경에는 중국계 은행이 있고, 그 뒤에는 중국 정부가 있다는 게 교민 사회의 생각이다. 중국계 사회의 급팽창은 일회성 흐름이 아니라 중국 정부의 치밀한 대미 전략과 관련이 있다고 보고 있다. 그에 비해 우리 정부는 해외 동포에 대한 지원과 투자에 매우 인색하다고 교민들은 불만을 토로한다. 민 회장 역시 한국 정부의 전략적인 지원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는 “교민 한두 사람이 나서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미국에서 한국인 커뮤니티를 확장하고 국력을 키우려면 지원과 투자를 통해 경제적으로 성공한 동포가 많이 탄생할 수 있도록 전략적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뉴욕에도 차이나타운이 있다. 역사도 오래됐다. 1900년대 초반 뉴욕과 뉴저지를 잇는 홀랜드 터널 공사에 투입된 수많은 중국인 노동자들은 당시 불모지인 맨해튼 남쪽 커널스트리트(Canal Street)를 중심으로 임시 거주지를 마련하면서 차이나타운을 형성했다. 이들은 열악한 노동 조건 속에서도 임금을 모아 맨해튼의 땅을 사들였다. 100여 년이 지난 후 중국인이 구입한 뉴욕의 땅은 모두 금싸라기 땅으로 변했다.

과거에는 밑바닥부터 올라왔다면 이제는 경제 성장에 힘입은 본토 중국인들이 직접 건너온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본토에서 넘어온 중국인들은 이미 뉴욕 코리아타운의 상징인 ‘플러싱’을 접수한 상태다. 불과 10여 년 전만 해도 경멸과 멸시를 받았던 중국인들에게 접수당한 플러싱 중심가는 이제 중국인들로 넘쳐난다. 한국인들은 점점 주변부로 밀려나고 존재감조차 희미해졌다. 플러싱을 접수한 중국인들은 영토를 확장 중이다. 베이사이드와 롱아일랜드 쪽으로 점점 그 세력을 넓히고 있다.

중국은 미국 채권을 가장 많이 보유한 국가다. 17조 달러에 달하는 미국 빚 중 1조2000억 달러에 달하는 채권을 갖고 있다. 미국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가장 강력한 국가로 등장한 지 오래다. 중국의 미국 진출은 비단 채권 투자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미국 정치권에 대한 로비, 중국계 미국인의 정계 진출에도 전력투구 중이다. 그 과정에서 차이나타운에 밀려난 한인타운이 쇠락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중국의 글로벌 팽창 전략이 미국 이민 사회에도 그대로 투영되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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