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김초원 단원고 교사 아버지가 밝힌 ‘그날 이후 1년’
  • 김지영 기자 (abc@sisapress.com)
  • 승인 2015.07.29 1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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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서도 차별받는 현실 더는 견딜 수 없다”

문을 열었다. 열자마자 날파리 대여섯 마리가 눈앞에 지나다닌다. 퀴퀴한 냄새마저 났다. 현관문 바닥엔 빨간 국물이 있는 음식물 종량제 봉투가 놓여 있었다. 이런 말을 해서 몹시 죄송하다. 내가 왜 ㅍ으로 시작되는 방향제를 사가지고 올 생각은 못했을까. 그도 미안 혹은 민망했는지 부리나케 음식물 쓰레기봉투를 내다버리러 갔다. 그가 신발을 벗자 오른 발가락이 다 보일 만큼 양말에 구멍이 나 있다. 자신도 부끄러운지 양말을 길게 내다빼서 구멍을 감췄다. 그런데 양말을 감추던 손톱은 누렇게 변색돼 반쪽은 잘려나가 뒤틀려 있다. 손톱 무좀이라고, 병원에서 그랬단다. 이까짓 손톱쯤이야, 그는 관심도 없어 보였다.

그는 현재 혼자 살고 있다. 그날 이후부터다. 평생 잊지 못할 그날 2014년 4월16일. 단원고 2학년 3반 담임 고 김초원 교사의 아버지 김성욱씨(56)다. 냉장고는 텅 비어 있고, 싱크대에는 쌀과 라면 3개가 전부다. 참, 날아다니는 쌀벌레도 있었다. 아무리 집안일에 무심한 사람이라도 하나쯤은 있을 법한 소금·계란 같은 것도 그의 집엔 없었다. 한 사람만 겨우 들어갈 수 있는 싱크대, 이건 부엌이라고 부르기도 사치스럽다. 변기와 샤워 거치대만 있는 화장실, 널브러진 이불과 TV, 셔츠 한 장만 외롭게 걸린 행어. 베개 머리맡엔 검은색 여행 가방이 옷장을 대신했고, 이미 반쯤 없어진 인삼주도 보였다. 화장지도 보였다. 잠이 안 올 땐 밤새 울다가 자기도 하니까. 이 집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건 고 김초원 선생님의 사진 두 장. 냉장고 위에 있어 집 어디에서나 볼 수 있다.

아빠는 매일 사진 (고 김초원 선생님)을 쓰다듬으며 말한다. 오늘도 잘 지냈다고. 단원고 고 김초원 선생님 아버지 김성욱씨(56). ⓒ 시사저널 김지영

딸 입관하던 날 온몸에서 피가 쏟아졌다

그날 이전, 그는 대기업 S계열사 상무이사였다. 에쿠스를 타고 연봉도 7000만~8000만원이었다. 딸은 공주사대를 수석 졸업했고, 손아래 아들도 같은 대학에서 공부하고 있다. 이 시대 부모가 바라는 안정된 미래가 그에게 있었다. 은퇴 후 벌인 사업에서 부침도 있었지만 그런대로 살 만했다. 그런 삶이 한순간 폭삭 주저앉았다. 그날, 딸이 사라지면서 그의 숨도 멈췄다.

딸아이가 입관하던 날, 그의 몸은 말 그대로 피를 쏟아냈다. 창자가 꼬이는 것 같은 고통을 느껴 화장실을 가니 피가 철철 나왔다. 몸은 타들어가듯 열이 났다. 사고 뉴스를 보고 연락한 사람들은 “이제 그만 잊어라. 보상금을 대체 얼마 받았느냐? 몇 십억 받은 거냐?”는 말만 해댔다. 자신은 이렇게 마음이 찢어지는데 지나가는 사람들이 웃는 것만 봐도 상처가 되는데…. 사촌 이상 친지들은 물론이고, 불알친구까지도 연락을 다 끊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진도에 있는 산에 올라갔다. 노끈과 함께. 잘 버틸 수 있을 것 같은 단단한 나무를 택했다. 목을 맸다. 뚝, 나뭇가지가 부러졌다. 예행연습까지 했는데. 갑자기 전화가 울렸다. 시골에 사시는 노모였다. “어데고?” 노모의 목소리가 살아야 된다는 딸아이의 목소리로 들렸다.

 

“80만원 더 받자고 순직 요청한 것 아니다”

그는 ‘투사’가 됐다. 딸아이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지구 끝까지 갈 거라고, 그는 가슴을 쥐어짜며 1년 동안 말했다. “우리 딸은 선생님이다!” 예순이 다 된 나이에 삭발도 해봤다. 그러면 세상이 알아줄 것 같아서. 선생님이었던 딸이 제자를 다 구하지 못했단 죄책감에 마음으로만 울었던 눈물은 이제 주름으로 얼굴에 새겨진 듯하다.

 그의 딸은 다른 희생자에 비해 빨리 발견됐다. 딸이 구명조끼를 입고 있지 않아서였다. 구명조끼를 입은 채 죽으면 물이 차거나 어딘가에 끼어 발견되기 힘든 반면, 딸아이는 제자들에게 구명조끼를 양보해 사고 직후 사체가 저절로 물에 떠올랐던 것이다.

“단 한 명의 학생이라도 구하려고 자신의 구명조끼까지 내준 딸에게 국가는 ‘기간제 교사’라는 이유로 또 다른 차별의 딱지를 붙이고 있다. 아이들은 우리 딸을 ‘기간제 교사’로 기억하지 않는다. ‘선생님’으로 기억하고 있다.”

이제 그는 매번 집회 때마다 얼굴을 가리려 썼던 모자도 착용하지 않는다.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것 중 하나였던 카메라도 이제는 딸아이를 세상에 알리는 창이 됐다.

가슴을 치며 그가 말한다. “난 죄인이 아니다. 예전에 회사 다녔을 땐 자존심을 신발에 구겨넣고 다녔다. 하지만 이젠 아니다. 딸아이가 다른 사람과 똑같은 교사였다는 사실, 교사로서 직분을 다했다는 것, 그걸 인정받고 싶을 뿐이다.”

순직(殉職), ‘직무를 다하다가 목숨을 잃다’. 국어사전에 나온 정의이자, 모든 것을 다 잃은 그의 유일한 희망이다. 순직을 요청하는 그를 세상은 돈을 더 받으려는 것 아니냐고 의심하기도 했다. “세월호로 순직 처리된 정교사의 경우 연금을 고작 80만원 더 받는 것밖에 없다. 나는 그 돈 없어도 살 수 있다. 하지만 죽어서조차 차별받는 현실을 더는 견딜 수 없다.”

‘기간제 교원도 교육공무원법에서 정한 교육공무원이므로…(중략).’ 지난 2012년 서울중앙지법의 판결이다. 같은 법원에서 열린 항소심에서도 ‘기간제 교원은 교육공무원법에 따라 임용되는 교원임이 명백함으로 교육공무원에 관하여 적용되는 법령은 기간제 교원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고 판시했다. 그런데도 정부는 말한다. ‘기간제 교사는 계약직 근로자로 공무원연금을 내지 않았고, 순직 보상금을 지급하기 어렵다.’ ‘인정을 위해 더 구체적인 증거와 증인이 필요하다.’ ‘기간제 교사는 상시 근무한 자가 아니라서 공무원에 적용되는 순직을 인정할 수 없다.’

 “사람다움이나 존엄은 태어나자마자 저절로 형성되는 관념이 아니다. 매일매일 다른 사람들로부터 받는 대접이다.” 어느 철학자의 말처럼, 타인의 고통은 ‘잊지 말자’고 외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현재 우리는 김씨를, 그 외 다른 유가족을 어떻게 ‘대접’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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