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범죄, 개인이 떠안을 수 있는 상황 넘어섰다”
  • 이승욱·김경민 기자 (gun@sisapress.com)
  • 승인 2015.10.29 16:54
  • 호수 1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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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진단 “가해자와 피해자 언제나 뒤바뀔 수 있어”

지난 2월 서울 강남의 한 떡볶이 가게 주인이 음식 맛을 타박하는 손님을 흉기로 33차례나 찔러 살해했다. 비슷한 시기 서울 중계동에서는 길을 가던 행인과 차 주인 간에 주차 시비가 붙어 행인이 차 주인을 무차별 폭행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지난해 말 이른바 ‘삼단봉 사건’으로 세간을 떠들썩하게 한 ‘보복 운전 시비’도 올해 사건·사고의 단골 메뉴로 등장했다. 지난 9월 경기도 의정부시 도로상에서 30대 남성이 운전 시비가 붙은 상대 운전자를 자신의 차량으로 들이받아 살인미수 혐의로 구속된 사건이 충격을 주기도 했다.

사소한 다툼이 극단적인 범죄로 비화된 이른바 ‘분노범죄’의 사례는 연일 대한민국을 충격으로 빠뜨렸다. 특히 일상에서 누구나 범죄의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충격은 더욱 컸다.

하지만 범죄심리 분석가와 정신과 전문의들은 누구나 분노범죄의 ‘피해자’뿐만 아니라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전문가들은 분노범죄의 원인에 대해 1차적으로 분노조절장애를 꼽는다. 분노조절장애는 정신의학적으로 ‘충동조절장애(impulse control disorders)’의 하나다. 분노조절장애는 ‘외상 후 격분 장애’라는 의학적 용어로 설명되기도 하는데, 자신이 사회적 관계 속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는 믿음이 고착화된 데 기인하고 있다. 이러한 외부적 요인이 반복되면 충동을 쉽게 조절하지 못하고 타인에 대한 공격 성향이 폭력적인 행위로 드러난다.

ⓒ 연합뉴스

사회 내부에서 꾸준히 잉태돼온 ‘분노범죄’

분노범죄가 올해 들어 유독 사회문제로 비화되기는 했지만 그동안 분노범죄는 꾸준히 우리 사회 내부에서 잉태돼왔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분노범죄는 일상 속에서 ‘우발적’으로 일어난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경찰청 범죄통계 자료에 따르면, 2011년 기준 상해와 폭행, 손괴 등 폭력범죄 발생 건수 39만2042건 가운데 범행 동기가 ‘우발적’인 경우는 18만1439건으로, 전체 폭력범죄 발생 건수의 46%를 차지했다. 우발적으로 발생한 폭력범죄는 2012년 44%(17만6834건), 2013년 44%(16만3260건)로 해마다 40% 이상을 유지하면서 큰 비중을 나타내고 있다.

한국인이 분노범죄에 쉽게 노출될 수 있다는 점은 관련 통계 수치에서도 확인된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자료에 따르면, 충동조절장애 증상으로 병원을 찾은 환자가 지난 2009년 3720명에서 2013년 4934명으로 최근 5년간 30% 이상 늘어났다.

지난 4월 대한정신건강의학회 조사에 따르면, 한국인 50%가 분노조절장애를 겪고 있고, 10% 정도는 치료가 필요한 상황이라는 충격적인 결과도 나왔다. 대한민국 성인 절반꼴로 분노조절장애로 인한 분노범죄의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점이 확인된 셈이다. 특히 전문가들은 분노조절장애의 정도가 심각하지 않더라도 분노범죄의 가해자가 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전대양 가톨릭관동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분노조절장애가 있다고 해서 다 잠재적 분노범죄자로 봐서는 안 된다”면서 “하지만 분노범죄는 분노조절장애 진단이 확정된 사람뿐만 아니라 분노조절장애에 가까운 성향을 보이는 사람이 저지르는 경향이 강하다”고 말했다.

6월24일 전북 김제시에서 30대 김 아무개씨가 운전 시비가 붙은 상대 운전자를 차량에 매단 채 주행하고 있다. ⓒ 연합뉴스

가족 울타리 넘어 ‘묻지 마 범죄’로 진화

분노범죄는 과거 가족 구성원 내부에서 빈번히 발생하는 경향이 강했다. 가족은 타인과의 관계에서보다 친밀도가 높아야 하지만, 반대로 내부의 갈등이 스트레스로 쌓이고 이것이 응축되면서 특정한 상황을 계기로 분노범죄 등으로 폭발할 가능성이 더 크기 때문이다.

윤영준 한국심리상담센터 소장은 “가족 사이에 분노범죄가 많은 이유는 가족 관계에서 받는 일상적이고 작은 스트레스들이 가족이란 이유로 억압된 채 넘어가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라면서 “일반적으로 가까운 사람에게 받는 분노감이 더 큰데, 이것이 인간 심리에서 부정적인 에너지로 쌓이면 폭발해 범죄화될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최근 발생하는 분노범죄는 가족의 울타리를 넘어 사회공동체 전반으로 확대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분노범죄의 유형이 지속적인 관계를 맺는 지인 사이에서뿐만 아니라 불특정인에 대한 공격 형태로 변화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이는 최근 급증하는 ‘묻지 마 범죄’처럼 사회공동체 전반의 공포감을 불러일으키는 사건이 빈번히 일어나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이병철 한림대 한강성심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분노조절장애는 단순히 개인의 문제이기보다는 한 개인이 존재하고 있는 사회 내부의 문제와 맞닿아 있다”면서 “세상살이가 갈수록 힘들고 사회 구성원으로서 자신의 의도대로 일이 풀리지 않으면서 좌절감이 쌓이는 것도 분노조절장애의 한 원인”이라고 말했다. 전대양 교수는 “최근 분노범죄를 저지르는 사람 중에는 사회안전망을 벗어난 소외 계층이 많다”면서 “특히 가족과 친지 없이 홀로 지내는 외톨이가 분노범죄 가해자가 되는 경향이 크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정신과 전문의가 내원한 환자와 분노조절장애에 대한 상담을 하고 있다. ⓒ 시사저널 최준필

분노범죄를 단순한 개인의 문제로 치부하지 말고 사회문제로 간주해 사회 구성원 간의 소통과 신뢰의 부족을 개선하는 등 사회적 대안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전대양 교수는 “분노조절장애가 폭력성을 유발하는 극단적인 단계에 다다르게 하는 ‘촉발 인자’는 개인마다 다르고 동일인도 항상 같은 것은 아니다”면서 “이에 따라 예방이나 대안 마련에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윤영준 소장은 “사회가 다변화되면서 개인이 받는 스트레스 요인이 곳곳에 상존하고 있어 개인이 수용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다”면서 “이게 쌓이면서 심화되고 결국 분노범죄라는 극단적인 형태로 표출되는 만큼 사회적 대안 마련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사회적 약자들의 분노를 줄여주고 공동체 구성원들이 신뢰할 수 있는 구체적인 대안을 찾아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분노에 무뎌진 감각을 회복해야” 


전문가들은 경쟁과 반복이 일상화되는 사회를 살아가는 현대인이 분노를 적절히 제어하지 못하는 데는 분노를 느끼는 감각이 무뎌진 측면이 있다고 지적했다. 현대인이 분노를 스스로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무뎌져 있어 자신의 합리적인 이성으로서 감정을 적절히 통제할 수 있게 개입하는 일도 쉽지 않다는 것이다.

전대양 가톨릭관동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이를 ‘S-R(Stimulus-Response) 이론’에 맞춰 설명했다. S-R 이론은 인간의 학습 능력은 인간이 느끼는 자극(Stimulus)에 대해 생체가 나타내는 반응(Response)이 결합해 이뤄진다는 학습 이론이다. 전 교수는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반응이 나오기 전 인지 작용을 통해 판단이 개입된다”면서 “하지만 분노 조절이 쉽지 않은 이들은 이러한 판단의 개입 없이 거침없는 자극과 반응이 나타나면서 분노가 폭발하는 상황에 이르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따라 분노조절장애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감정 상태를 적절히 인지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이병철 한림대 한강성심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심리적 스트레스나 화를 일으킬 수 있는 타인의 말과 행동 등 외부 자극에 자주 노출되면 분노가 폭발하기 직전까지도 자신이 분노하고 있다는 점을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생길 수 있다”면서 “자신의 내면을 차분히 들여다볼 수 있는 명상을 통해 외부 자극으로 인한 정신적·육체적 변화를 감지할 수 있는 감각을 키우는 훈련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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