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조선’에서 법조인 되기
  • 김경민 기자 (kkim@sisapress.com)
  • 승인 2015.12.15 19:43
  • 호수 13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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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10일 경기도 과천시 정부과천청사에서 사법시험 존치를 위한 고시생 모임 회원들이 삭발을 한 후 항의서 전달을 위해 법무부 청사로 들어가고 있다. © 시사저널 박은숙

12월9일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이하 로스쿨) 강의실은 텅 비어 있었다. 맨 앞줄 책상 위에는 언젠가 누군가의 손에 쥐어져 있었을 펜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내년 1월4일부터 나흘간 치러지는 제5회 변호사시험까지 한 달도 채 남지 않았지만 강의실에는 냉기만 가득했다.

“법조계와 상관없는 사람들이 보면 ‘그들만의 밥그릇 싸움’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나한테 이건 내 미래가 달린 싸움이다. 고민 끝에 어렵게 선택한 로스쿨행(行)이었고 힘들게 대출을 받아가면서 내 미래에 투자하고 있었다.”

한국외국어대 로스쿨 2학년 김정근씨(28)는 원래 사법시험(이하 사시)을 준비하던 고시생이었다. 군 제대 후 대학 3학년때부터 사시를 준비한 그는 3년간의 고시생 생활 끝에 2014년 말 로스쿨에 입학원서를 냈다.

그는 사시 첫 응시에서 운 좋게 1차 시험에 합격했다. 하지만 짧았던 준비 기간 탓에 거듭된 불합격을 맛봐야 했다. 2014년 사시 1차에서 탈락한 후 그는 진로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했다. 2017년 사시가 폐지되기 때문이었다. 법무부는 2016년 1차 시험에 붙은 사람에 한해서 2017년 마지막 2·3차 시험의 응시 자격을 주기로 했다. 안정적으로 사시를 치르기 위해 김씨는 무조건 2015년에 1차 합격을 해야 했다. 올해 2차 합격이 안 되더라도 이듬해에 2차 시험을 치를 수 있어서다.

문제는 자신감이었다. 그는 “‘사시 폐지’라는 데드라인은 다가오는데 만약 계획대로 시험 통과를 하지 못하면 ‘낙동강 오리알’ 신세를 면할 수 없을 거라는 생각에 겁이 났다”고 말했다. 지난 10월 이호선 국민대 법대 교수가 2009~15년 사시 합격자 4621명 중 1286명을 상대로 조사한 결과, 사시 합격자의 79%가 사시를 준비해 최종 합격하기까지 ‘5년 이내’의 시간이 걸렸다고 답했다. 하지만 김정근씨는 “아무리 머리가 좋아도 3년이 걸릴지, 10년이 걸릴지 아무도 모르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내년이면 정확히 고시 생활 5년 차다. 내게는 더 이상 시간적인 여유가 없다고 느껴졌다.”

법무부 ‘사시 폐지 유예’…법조계 둘로 나뉘어

로스쿨행도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 돈 때문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공무원이다. 집안이 어려운 형편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로스쿨학비를 전액 부담하기는 힘든 상황이다. 어렵게 부모님께 상황을 말씀드리고 로스쿨을 지원해보고 싶다고 했을 때 그의 부모님은 의외로 담담한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아버지께서 ‘사시를 하면 그 기간이 몇 년이 될지 모르는 것 아니냐, 그동안에 꾸준히 돈이 들어가는 것이니, 짧게 3년 동안 몰아서 그 금액을 지불한다 생각하고 하자’라고 하셨다. 자식이 돼서 나이 먹고 계속 손을 벌리는 게 죄송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마음이 편해졌다. 3년이라는 분명한 기간이 정해져 있는 로스쿨은 사시와는 달리 끝이 분명한 싸움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에게 법무부가 내놓은 ‘사시 폐지유예’ 입장은 청천벽력과도 같았다.

지난 12월3일 김주현 법무부 차관이 “2021년까지 사법시험 폐지를 유예한다”고 밝혔다. 법무부는 보도자료를 통해 “사법시험 폐지를 유예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이에 따라 2021년까지는 ‘사시-사법연수원’과 ‘로스쿨-변호사시험’으로 법조인 선발이 이원 체제로 병행된다는 설명이다.

법무부의 발표는 거센 후폭풍을 불러일으켰다. 법조계는 당장 사시 존치(存置)와 폐지를 주장하는 두 세력으로 쪼개졌다. 한국 법조계는 지금 로스쿨이 없는 법대교수진, 사법연수원 출신 변호사, 사시 준비생들과 로스쿨 교수진, 로스쿨 출신 변호사, 로스쿨 재학생으로 나뉜 채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내홍만 깊어지고 있다.

먼저 움직인 쪽은 로스쿨 재학생들이었다. 12월4일 서울대 로스쿨 재학생을 필두로 전국 25개 로스쿨 재학생들이 사시 폐지를 주장하며 일괄 자퇴서를 제출하는 등 집단적으로 반발했다. ‘로스쿨과 사시의 양립은 로스쿨 죽이기일 뿐’이라는 주장이었다. 로스쿨 변호사들의 모임인 한국법조인협회(회장 김정욱)는 12월8일 김현웅 법무부장관 앞으로 ‘사법시험 폐지 유예 의견 철회 및 변호사시험에 대한 대책 마련 촉구’ 공문을 보냈다. 25개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들은 법무부가 주관해 2016년 1월 시행되는 사법시험 및 변호사시험의 출제를 비롯해 모든 업무에 협조하지 않겠다고 나섰다.

“사시-로스쿨 출신 간 갈등이 표면화된 것”

김현웅 법무부장관은 12월4일 “사시 폐지 유예는 법무부의 의견이지 최종 입장은 아니다”라고 밝혔다. © 연합뉴스

이에 맞서 사시 존치를 주장하는 움직임도 본격화됐다. 사법시험 존치를 위한 고시생모임의 권민식 대표가 12월7일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에 로스쿨 재학생 자퇴서 수리 촉구 서한을 전달했으며, 같은 날 일부 사시 준비생들이 서울대 정문 앞에서 삭발식을 갖기도 했다. 이들은 ‘로스쿨은 일부 돈 있는 특권층만을 위한 돈스쿨이며 현대판 음서제’라고 주장했다.

이번 사시 폐지 유예안이 법무부에서 일방적으로 내놓은 입장임이 드러나면서 상황은 더 복잡해졌다. 사법연수원을 운영하면서 법조 인력 양성의 한 축을 맡고 있는 대법원은 “법무부로부터 사전에 설명을 듣거나 관련 자료를 받은 사실이 전혀 없다”며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 로스쿨 관할부처인 교육부도 “우리와 협의한 사안이 아니다”고 밝혔다.

논란이 격화되자 법무부 봉욱 법무실장은 기자간담회를 자청해 “사시 폐지 유예는 최종 결정 사항이 아니며 관계 부처를 비롯한 여러 기관, 단체와의 향후 논의에 따라 법무부의 최종 입장이 결정될 것”이라고 해명했다. ‘사시 폐지 유예’를 밝힌 지 하루 만에 입장을 번복한 셈이다.

일명 ‘스카이(서울대·연세대·고려대)’ 로스쿨에 다니고 있는 박 아무개씨는 “‘로스쿨이 돈 더 많이 든다, 사시가 더 많이 든다’ 하는 것은 사실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문제”라며 이번 논란의 이면에는 좀 더 근본적인 갈등이 깔려 있음을 지적했다. “이번 논란은 사시-로스쿨이라는 교육 체계의 운영 방식을 둘러싸고 제기됐지만, 그 갈등은 실제 법조인 사이에 존재하는 사시 출신과 로스쿨 출신에 대한 뿌리깊은 차별에서 온다. 오래전부터 누적돼온 갈등이 이번 법무부 발표를 계기로 표면화됐다고 본다. 정부가 살얼음 위에 돌을 던진 셈이다.”

한 서울 소재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단순히 고시생과 로스쿨생 간의 갈등으로 보일 수 있지만, 그 이면에는 사법연수원 출신 법조인과 로스쿨 출신 법조인 사이에 존재하는 해묵은 차별이 있다”고 말했다. 이번 사시 폐지 유예 논란은 크게 ‘사법시험’ 측과 ‘로스쿨’ 측으로 나뉘어 밥그릇 싸움을 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그 속내를 한층 더 깊이 들여다보면 다양한 갈등의 층위가 존재함을 알 수 있다는 설명이다.

2009년 3월 전국 25개 로스쿨이 처음 문을 연 지 올해로 6년이 지났다. 로스쿨은 2012년 처음으로 변호사 1451명을 배출했으며 해마다 1500여 명의 변호사를 배출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기존 사법연수원 출신 변호사와 로스쿨 출신 변호사에 대한 인식 및 처우의 차별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있다는 게 업계의 지배적 시각이다.

2월17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전체회의에서 노철래 새누리당 의원이 “로스쿨 출신 변호사로 인해 법조인 시장이 양적 성장은 했지만 질적 저하를 봤다”고 말한 것은 로스쿨 출신 변호사들에 대한 기성 법조인들의 인식을 단적으로 보여준 것이었다. 한 사법연수원 출신 변호사의 말을 빌리자면 “아주 극단적으로 표현해서 ‘로스쿨 출신 변호사는 사시 패스할 수준도 안 되면서 돈으로 변호사가 된 사람’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한국법조인협회 김정욱 회장은 “로스쿨과 사시를 병행하면 로스쿨 출신 변호사 집단과 사시 출신 변호사 집단 간의 갈등이 구조화되고 공고화될 수 있다”며 이 같은 인식에 대한 우려를 드러냈다. 고려대 로스쿨에 재학 중인 김 아무개씨는 “이쪽업계에서 로스쿨생에 대한 평가절하가 만연해 있다. 검찰, 변호사업계의 지배층은 모두 사시 출신들이 장악하고 있다”고 고충을 토로하기도 했다. 그는 “로펌의 일부고위층 자제 특혜 논란만큼 로펌 내에 존재하는 사법연수원 출신 선호 현상에도 문제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서울 소재 로펌에 소속된 한 사법연수원 출신 변호사는 “로펌에서 변호사를 뽑을 때 아무래도 사법연수원 출신 변호사를 선호한다”며 “사법연수원 졸업생은 성적이라는 분명한 평가 근거가 있다. 우리나라 법제는 독일식 법제를 따왔기 때문에 미국식 법제인 로스쿨을 통해 교육받은 변호사는 현실적으로 맞지 않는 부분이 있다”고 말했다.

예비 법조인 “어느 쪽으로든 결정 났으면”

법조인들의 줄 세우기식 특권의식 자체가 문제라는 지적도 나왔다. 대기업에 다니다 올해 로스쿨에 입학했다는 최재현씨는 “로스쿨은 이런 서열 의식에 꼬리표 몇 개를 더 늘린 것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법조계에서는 사법연수원 성적이 평생 따라다니며 그 사람의 모든 것을 결정지었다. 로스쿨 출신 사이에도 서울대 로스쿨이냐, 지방대 로스쿨이냐, 이런 꼬리표가 붙는다. 법조계 스스로 혁신하지 않으면 출신에 따른 차별 문화는 더욱 심해지기만 할 것이다.”

이번 논란을 계기로 법조계 내부의 개혁과 좀 더 선진적인 로스쿨 제도의 안착이 이뤄지길 희망하는 목소리도 나왔다. 한 로스쿨에 재학 중인 김승현씨는 “로스쿨을 도입하고 6년이 흘렀다. 이번 논란은 로스쿨 제도의 좀 더 안정적인 정착을 위한 과도기적 현상이라고 본다”고 말했다.

오락가락하는 사시 존폐 논란에 울상을 짓는 건 진로를 정해야 하는 대학생 등 예비 법조인들이다. ‘로스쿨에 진학했다가 사시가 유지되면 어쩌나’ 하는 걱정과 ‘사시준비로 가닥을 잡다 시험이 폐지돼 꿔다놓은 보릿자루 꼴이 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다.

“이제 졸업 후 진로를 결정해야 하는데 대체 뭘 준비해야 할지 모르겠다. 주무 부처인 법무부가 중심을 못 잡으니까…. 헬조선에서 법조인 되기가 쉽지 않다.” 서울대 사회과학대학 3년생인 이예슬씨는 “어느 쪽으로든 빨리 결정이 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제 진로를 결정해 준비를 시작하려는 그는 원래 로스쿨을 가려고 했다. 2017년 사시 폐지를 염두에 두고 내린 결정이었다. 하지만 2021년으로 사시 폐지가 미뤄진다면 그 안에 사시 합격이 가능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솔직히 돈은 사시나 로스쿨이나 비슷하게 든다고 본다. 그건 내가 어떻게 공부하느냐에 달린 거니까. 문제는 법조인이 된 후 사회적인 처우다. 현실적으로 사시 출신이 유리한 면이 있다는 걸 알면서 굳이 로스쿨을 갈 사람이 얼마나 될까.”

정부발(發) 법조계 내분으로 인해 결국 가장 크게 피해를 보는 쪽은 법률 시스템을 이용하는 국민들과 예비 법조인들이라는 지적이 나오는 배경이다. 이에 대법원을 중심으로 상황을 중재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대법원은 12월10일 “최근 로스쿨 학사 일정이 파행되고 이해관계인들 대립이 심화하는 등 사회적 혼란이 가중되고 있는 상황에 대해 깊은 우려를 표한다”며 “국회와 정부 관계 부처, 대법원 등 관련 국가기관이 참여하는 협의체를 구성해 사법시험 존치 여부와 로스쿨 제도 개선 등 법조인 양성 제도를 논의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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