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우리는 ‘디즈니 세계’에 살고 있다
  • 정시우 영화 저널리스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9.07.13 10:00
  • 호수 1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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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행몰이로 영화 시장 강호로 ‘우뚝’…올여름 《라이온 킹》으로 국내 텐트폴 영화와 격돌 예고

올해 상반기 극장 관객이 사상 처음으로 1억 명을 돌파했다. 넷플릭스, 왓챠 등 온라인 스트리밍 서비스 확장으로 인한 ‘극장의 위기론’이 대두되는 게 무색한 수치다. 이 기간 극장을 찾은 1억8000만 명의 관객 중 약 30%가 디즈니 영화를 봤다. 지난 5월까지 집계된 배급사별 점유율과 매출액에서도 디즈니는 국내 최대 배급사 CJ ENM을 제치고 1위를 차지했다. 상반기 박스오피스 5위 중 3편이 디즈니가 배급한 《어벤져스: 엔드게임》(2위), 《알라딘》(4위), 《캡틴 마블》(5위)이라는 점 역시 디즈니의 위력을 실감케 한다.

영화 《라이온 킹》의 한 장면 ⓒ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영화 《라이온 킹》의 한 장면 ⓒ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캡틴 마블》《어벤져스: 엔드게임》《알라딘》《토이스토리4》→?


공세의 포문을 연 영화는 3월 개봉한 디즈니 자회사 마블 스튜디오의 《캡틴 마블》이다. 《어벤져스: 엔드게임》으로 가는 징검다리나 예고편 수준에 머무르는 영화가 아닐까란 의구심은 개봉과 함께 빠르게 식었다. 주연 배우 브리 라슨의 캐스팅 논란을 딛고 영화는 전국 580만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에 성공했다. 《캡틴 마블》의 흥행은 5월 출격한 《어벤져스: 엔드게임》이 받았다. 10년간 마블이 쌓아올린 추억들이 영화 곳곳에서 터지며 관객을 울리고 웃겼다. 1300만 명이 넘는 관객이 아이언맨과 캡틴 아메리카의 마지막을 배웅했다.

흥미로운 건 그 이후다. 디즈니 산하의 픽사가 배급한 《토이스토리4》가 6월 개봉한 가운데, 5월 개봉했던 《알라딘》이 역주행을 보이며 《토이스토리4》와 흥행 1위 자리를 두고 대결 구도를 이뤘다. 일각에선 이를 두고 집안싸움이라 불렀다. 형제의 난이라 표현하는 곳도 있다. 여기에 《스파이더맨: 파 프롬 홈》이 가세하면서 그림은 조금 더 흥미로워졌다. 《스파이더맨: 파 프롬 홈》은 소니픽처스 배급이지만 마블 스튜디오와도 일시적 동맹을 맺은 영화, 즉 디즈니의 손길이 닿아 있는 작품이다. 현재 극장가는 《스파이더맨: 파 프롬 홈》이 1위를 달리는 가운데 《알라딘》과 《토이스토리4》가 그 뒤를 잇고 있다. 그야말로 한 지붕 세 가족의 박스오피스 거미줄 치기다. ‘디즈니 세상’이라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캡틴 마블》 《어벤져스: 엔드게임》 《알라딘》 《토이스토리4》까지 한 편도 빠짐없이 박스오피스 1위를 찍은 디즈니의 위용은,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1994년 개봉 당시 전 세계에서 폭발적인 흥행 성적을 올린 애니메이션의 실사판 《라이온 킹》이 7월17일 출격한다. 전 세계 흥행 분석가들이 《라이온 킹》의 흥행에 거는 예감은 비상한다. 미국 매체 코믹북 닷컴은 《라이온 킹》이 《어벤져스: 엔드게임》의 유일한 라이벌이자 올여름 최고 흥행작이 될 것이란 예측을 내놓았다.

그 예상이 한국에서도 맞아떨어질 경우 타격을 입는 건 한국 대작 영화들이다. 전통적으로 7월과 8월은 한국 메이저 배급사들이 텐트폴 영화(한 해 라인업 가운데 가장 성공 확률이 높은 영화)를 내놓고 1년 농사를 가늠하는 중요한 시즌이다. 이 시장을 누가 잡느냐에 따라 배급사들의 자존심이 갈린다. 대형 투자배급사들이 개봉 길일 잡기에 공을 들이는 이유다. 올해는 박서준 주연의 《사자》(롯데엔터테인먼트), 조정석-윤아의 《엑시트》(CJ엔터테인먼트), 송강호-박해일의 《나랏말싸미》(메가박스중앙(주) 플러스엠), 유해진-류준열의 《봉오동 전투》(쇼박스)가 여름 시장 출격을 알린 상태다.

이 와중에 새로운 ‘판 짜기’를 요구하게 하는 건 앞서 말했듯 《라이온 킹》이다. 《라이온 킹》이 《어벤져스: 엔드게임》처럼 흥행 광풍을 일으키거나, 《알라딘》처럼 장기 흥행을 이룰 경우, 여름 시장은 그야말로 혼돈의 도가니탕이 될 가능성이 높다. 디즈니의 흥행세가 어떤 영향을 미칠지, 여기저기서 주판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오는 건 이와 무관하지 않다.

하반기를 기다리는 디즈니의 면면도 화려하다. 지난 2014년 개봉해 전국을 ‘렛 잇 고(let it go)’ 열풍으로 몰아넣었던 《겨울왕국》의 속편이 겨울에 개봉한다. 안젤리나 졸리의 《말레피센트 2》와 스카이워커 사가와 시퀄 3부작을 마무리 지을 《스타워즈: 라이즈 오브 스카이워커》도 관객을 만난다. 몇 년 전만 해도 4대 배급사 사이에서 복병으로 활약하던 디즈니는 이제 한국 영화 시장의 당당한 강호로 자리매김했다.

 

디즈니, 인수·합병의 역사

디즈니가 세계 시장은 물론 한국에서도 극장가의 고수로 떠오른 배경에는 비즈니스 수완이 자리한다. 지속적인 인수·합병과 전략적 제휴를 통해 사업 분야를 확대하고 콘텐츠를 강화한 것이 핵심이다. 디즈니의 인수·합병 역사는 한 편의 드라마를 방불케 한다. 먼저 디즈니는 1993년 영화 배급사 미라맥스를 6000만 달러에 인수했다. 1995년엔 지상파방송 ABC를 90억 달러에 흡수 합병했고, 이듬해엔 스포츠 케이블 ESPN을 매입했다. 소비자가 디즈니의 영화·드라마 등 다양한 콘텐츠를 언제 어디서나 즐길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게 당시 디즈니의 원대한 꿈이었다.

그리고 오늘날의 디즈니 제국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사건이 일어난다. 2005년 CEO로 취임한 밥 아이그너가 애니메이션 강자 픽사를 2006년 무려 74억 달러나 되는 거대한 비용을 주고 인수한 것이다. 디즈니와 픽사의 세기의 결혼식은 의미심장하게도 (우리의) 어린이날인 5월5일 거행됐는데, 당시 언론은 이들의 합병을 앞다퉈 보도했다. 애니메이션 업계의 두 강자가 과연 안정적인 동거를 할 수 있을까란 기대와 우려가 호사가들의 입에 뜨겁게 오르내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디즈니의 행보는 파격적이었다. 픽사를 품에 안은 디즈니는 2009년 마블 스튜디오를 40억 달러에 인수했고, 2014년엔 루카스 필름도 사들여 세간의 뜨거운 시선을 받았다. 잘 알려졌다시피 마블은 아이언맨, 헐크, 캡틴 아메리카, 토르 등 슈퍼히어로 캐릭터 1000여 개를 보유한 회사다. 루카스 필름은 미국 대중문화를 휩쓴 《스타워즈》(1977)를 연출한 조지 루카스가 설립한 스튜디오다. 거물 기업이 거물 기업을 끌어안은 것이다.

픽사, 마블 스튜디오, 루카스 필름 등 내실 좋은 콘텐츠 기업들을 줄줄이 식구로 만든 디즈니는 올해 초 710억 달러라는 거액을 들여 할리우드에서 세 번째로 점유율이 높은 20세기 폭스마저 품었다. ‘엑스맨’ ‘아바타’ ‘데드풀’ 등 막강한 지식재산권(IP)을 거머쥐게 된 것이다.

디즈니의 지식재산권 위력은 올해 1월 개봉한 애니메이션 《주먹왕 랄프2: 인터넷 속으로》에서 확인할 수 있다. 영화에서 디즈니는 계열사 인기 브랜드를 대거 투입해 세계 최강 콘텐츠 제국으로서의 위용을 거침없이 뽐낸다. 아이언맨이 도시를 거닐고, 《스타워즈》 스톰트루퍼가 정찰을 돌고, 《백설공주》의 난쟁이와 《주토피아》의 여우 닉이 행사를 준비하는 식이다. 픽사의 ‘이스터에그’를 찾는 쏠쏠한 재미와 얼마 전 작고한 스탠 리의 흔적도 영화에 새겨졌다. 같은 계열사가 아니었다면 엄청난 로열티를 지불했어야 하는, 시도조차 못 했을 프로젝트. 그러니까 거대 지적재산권 보유 왕국 디즈니만이 할 수 있는 초호화 캐스팅을 《주먹왕 랄프2: 인터넷 속으로》로 뽐낸 셈이다.

왼쪽부터 영화 《캡틴 마블》·영화 《토이스토리4》
왼쪽부터 영화 《캡틴 마블》·영화 《토이스토리4》

디즈니 콘텐츠의 힘이 막강한 이유

디즈니의 힘은 결국 다양한 콘텐츠에서 나온다. 눈여겨볼 것은 자회사마다 각자의 개성이 확고하다는 점이다. 디즈니 지붕 아래 놓여 있을 뿐, 각 스튜디오가 일찍이 쌓아온 색깔과 영역을 존중한 덕에 디즈니 계열사 작품이 연이어 나와도 피로감이 거의 없다.

디즈니의 시대를 읽는 눈도 눈여겨볼 지점이다. 《알라딘》의 자스민 공주는 1992년 원작에서도용감하긴 했지만, 새로 탈바꿈하는 과정에서 보다 더 진취적인 여성으로 각색됐다. 원작에는 없었던 자스민의 솔로곡 ‘스피치리스(Speechless)’는 이러한 변화를 극명하게 드러내는 결과물로, 이 곡에서 자스민은 술탄이 되고자 하는 의지까지 피력한다. 《토이스토리4》의 경우 도자기 인형 보핍을 통해 시대의 흐름을 읽는다. 《토이스토리2》(1995)에서 주인공 우디의 여자친구로 주변부에 머물렀던 보핍은 《토이스토리 4》에선 드레스를 벗어던지고 우디를 모험으로 이끄는 주체적인 인물로 거듭났다.

최근의 디즈니에서 자주 엿보이는 또 하나는 다양한 인종 끌어안기다. 인도 혈통인 나오미 스콧이 《알라딘》의 자스민을 꿰찬 것도 문화적 다양성을 수용하라는 시대의 요구를 디즈니가 빠르게 수용한 것이다. 《인어공주》 실사판에 흑인 배우 할리 베일리가 캐스팅되고, 《뮬란》에 중국 배우 유역비가 낙점된 것 또한 이와 무관치 않다. 많은 팬을 보유한 영화들이니만큼 이 과정에서 캐스팅 잡음도 흘러나오고 있지만, 과거 유색 인종 캐릭터에 백인 배우를 캐스팅하는 ‘화이트워싱’ 논란을 떠올리면, 논란의 형태가 변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인터넷동영상서비스(OTT) 시장도 넘보는 디즈니

디즈니의 행보는 비단 스크린에 머물지 않는다. 엄밀히 말해 디즈니가 최근 더 힘을 쏟는 분야는 바로 인터넷동영상서비스(OTT) 시장이다. 이 분야의 거성은 현재 넷플릭스다. 전 세계 190개국 1억4000만 명의 유료 가입자가 넷플릭스 세계를 유영하고 있다. 자체 스트리밍 서비스 플랫폼이 부실했던 디즈니는 그동안 넷플릭스에 콘텐츠를 공급하는 방식으로 경영을 이어왔지만, 더 이상 손해 보는 장사는 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내보이고 있다. 실제로 디즈니가 21세기 폭스와 ‘빅딜’을 추진하게 된 데에는 넷플릭스를 견제하기 위해서라는 시각이 많다. 21세기 폭스가 세계 3위 동영상 스트리밍 서비스 업체인 ‘훌라’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훌라’를 통해 직접 플랫폼 사업에 뛰어들겠다는 의미다. 그 결과물이 바로 올해 11월 출범하는 자체 OTT 서비스인 ‘디즈니 플러스’다. 다양한 콘텐츠 IP와 제작 능력을 지닌 디즈니니만큼 OTT 시장 또한 극장 못지않게 큰 변화를 맞을 것으로 보인다. 바야흐로 우린 디즈니 세계에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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