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오동 대첩의 주역 최운산 장군 [최보기의 책보기]
  • 최보기 북칼럼니스트 (thebex@hanmail.net)
  • 승인 2020.06.08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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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운산, 봉오동의 기억》ㅣ최성주 지음ㅣ필로소픽 펴냄ㅣ272쪽ㅣ1만6000원

1910년 12월 혹한 속에서 국경을 넘는 40여 명의 대가족이 있었다. 독립운동을 결심, 만주로 떠나는 이회영 형제들의 일가였는데 그때 그의 나이 44세 장년이었다. 이들이 독립군 양성을 위해 세운 신흥강습소(신흥무관학교)를 빼면 1910년대 서간도 지역 독립운동은 설명이 안 될 정도다.

《중국의 붉은 별》 저자 애드거 스노의 아내 님웨일즈의 소설 《아리랑》의 주인공 김산(본명 장지락)이 15세가 돼 사전 한 권 들고 700리 길을 걸어가 도착하는 바로 그 학교다. 이 학교 출신들이 주축이 돼 1919년 무정부주의자 항일무장단체인 의열단을 만든다. 단장은 경남 밀양 출신의 약산 김원봉이었다. 《한번의 죽음으로 천 년을 살다》(2018, 푸른역사)는 끝내 꺾이지 않았던 우당 이회영 일가의 내력을 후세 사학도들이 썼다.

《최운산, 봉오동의 기억》 역시 1920년 6월 7일 대한독립군의 북간도 봉오동 대첩을 이끌었던 최진동, 최운산, 최치흥, 최명철 형제와 그 일가의 내력을 기록한 책이다. 저자가 최운산 장군의 직계 손녀다. 만주 대이동을 결행했던 이회영 일가와 달리 최운산 형제는 아버지 최우삼이 조선말 연변의 행정책임자인 도태(道台)를 지냈던 탓에 처음부터 봉오동을 근거지로 독립군을 양성, 독립전쟁을 이끌었다.

최우삼의 둘째 아들로서 곡물상과 축산업으로 거부(巨富)가 된 최운산은 봉오동에 신한촌을 건설, 1912년 비적으로부터 동포들을 보호하기 위해 창설했던 사병부대를 모체로 정예 독립군을 양성했다. 병력이 늘자 봉오동 산 중턱에 연병장을 만들고, 막사를 짓고, 토성을 쌓아 독립군 군사기지를 완성했다. 이 부대가 대한군무도독부로 발전해 1920년 홍범도 장군과 결합, 봉오동 대첩을 이끌었다. 봉오동 대첩이 역사적 의의는 대포와 기관총 등 최신 화력으로 무장, 중국과 러시아 군을 제압했던 일제 정규군과 대한 독립군이 맞붙어 거둔 최초의 대승으로, 독립군과 조선인들의 사기와 독립열망을 끌어올렸다는 데 있다.

저자의 강력한 주장 가운데 하나는 당시 독립군의 대오와 무장상태에 관한 우리들의 오해다. 독립군의 전투에 대한 부실한 역사기록으로 인해 당시 독립군들이 별다른 제복도 없이 겨우 화승총, 심지어는 괭이나 낫을 들고 게릴라 전 위주로 일본군과 대결했을 것이라고 쉽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저자는 할머니(최운산 장군의 부인) 김성녀, 아버지 최봉우의 증언과 여러 기록들을 뒤져 최운산이 사재를 털어 러시아는 물론 1차 세계대전에 참전 후 러시아를 떠나던 체코군의 무기를 대량으로 사들여 독립군의 화력을 제대로 갖췄고, 군복을 제작했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농사 짓다 모인 오합지졸이 아니라 제대로 양성된 군대였다. 최운산 장군 일가의 대부분 재산이 군자금으로 투자됐다.

독립전쟁 중에 사망한 독립군 가족에게 정기적으로 생활비를 전달하게까지 했던 최운산 장군은 일본군에 밀려 러시아로 들어갔다가 자유시 참변을 겪으며 타격을 받았지만 최문무, 최명길, 최빈, 최고려, 최복 등 모두 8개의 다른 이름을 사용해가며 일제와 독립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그 와중에 여섯 번이나 일제의 감옥에 투옥당했던 그는 해방을 한 달 앞두고 아들 최봉우가 있던 평양에서 고문후유증으로 스러져 그곳에 묻혔다.

독립운동과 해방공간을 관통했던 만큼 최우삼 가(家) 최진동, 최운산, 최치흥 형제들의 후손들은 중국, 미국, 북한, 한국으로 광범위하게(?) 흩어져 살고 있다. 그러나 그 흩어진 가족사를 증손녀가 일일이 다시 캐어 엮으니 대한민국 독립운동사를 관통한다. 봉오동의 ‘흑송 세 그루’ 틈에 숨어있던 최우삼의 묘를 찾은 후손들이 2016년 비석을 세웠고, 그의 큰아들 최진동 장군은 2006년 봉오동에서 현충원으로 모셔졌다. 셋째 아들 최치흥은 여전히 봉오동에서 그의 후손들이 기리고 있다. 만주 북간도 봉오동 마을 진산 최 씨 가문의 참으로 멋진 아버지와 아들, 형제들이었다.

▲ 최보기 북칼럼니스트
▲ 최보기 북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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