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는 침묵할 수 없는 여성들의 폭탄선언
  • 이은선 영화 저널리스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0.07.12 11:00
  • 호수 1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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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을 막아 세우는 것은 무엇인가…영화 《밤쉘: 세상을 바꾼 폭탄선언》이 던진 주제

‘세상을 바꾼 폭탄선언’이라는 부제가 달린 영화 《밤쉘》은 2016년 미국 대표 보수언론 폭스뉴스에 일어났던 실화가 바탕이다. 2002년부터 2013년까지 폭스뉴스 아침 프로그램 《폭스 앤 프렌즈》를 진행하고, 2016년까지 오후 프로그램 《더 리얼 스토리》를 진행한 여성 앵커 그레천 칼슨. 그는 2016년 7월 폭스뉴스의 회장 로저 에일스를 상대로 성희롱 소송을 벌였다. 이는 미디어 산업 최초의 직장 내 성희롱 고발 사건이었다. 그의 용기 있는 선택에 수많은 여성들이 힘을 보탰다. 자신 역시 피해자임을 고백하고 나선 것이다. 결국 로저 에일스는 불명예 사퇴했다. 거대 권력을 무너뜨린 여성들의 선언은 하나의 의지로 수렴된다. 더는 침묵하지 않겠다는 것. 이는 세계를 흔든 ‘#Metoo’ 운동의 시발점이 됐다. 할리우드를 뒤집은 하비 웨인스타인 성추문이 들불처럼 번지기 1년 전 일이다.

영화 《밤쉘: 세상을 바꾼 폭탄선언》의 한 장면 ⓒ씨나몬㈜홈초이스
영화 《밤쉘: 세상을 바꾼 폭탄선언》의 한 장면 ⓒ씨나몬㈜홈초이스

여성에게 작용하는 남성 권력을 고발하다

‘밤쉘(Bombshell)’은 폭탄선언, 매력적인 금발 미녀를 동시에 뜻하는 단어다. 이 제목은 상징적이다. 폭스뉴스의 간판 앵커 자리는 암묵적으로 금발 미녀들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몸의 굴곡이 그대로 드러나는 짧은 치마를 입어야 했고, 카메라는 투명 데스크 아래로 비치는 여성 앵커들의 다리를 의도적으로 비췄다. “TV는 시각 매체”라는 에일스의 주장 때문이었다. 하지만 폭스뉴스의 여성 앵커들은 대상화되는 데 그치지 않았다. 그들은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이는 세상을 향한 폭탄선언이 됐다. 부당한 것을 고발하고 권리를 되찾으려는 목소리. 진정한 ‘밤쉘’의 시작이었다. “당신은 섹시하지만 손이 많이 가” “앞서 가려면 앞섶을 빨아야지”. 저속한 성인물 속 대사가 아니다. 폭스뉴스 내 여성 직원들이 실제로 들었던 얘기다.

영화는 폭스뉴스의 간판스타였던 그레천 칼슨(니콜 키드먼)과 메긴 켈리(샤를리즈 테론)를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부당 해고를 당한 뒤 폭스뉴스 회장 로저 에일스(존 리스고)를 정조준한 칼슨의 소송은 폭스 그룹뿐 아니라 미디어 산업 전체를 뒤흔드는 일대 사건이 된다. 처음에는 달걀로 바위 치기처럼 보인다. 칼슨은 “더 많은 여성이 나올 것”이라고 예상하지만, 연대는 쉽게 이뤄지지 않는다. 여기에 힘을 실은 건 켈리의 고백이다. 칼슨의 소송 상황을 지켜보던 그는 자신 역시 10년 전 에일스에게 성희롱을 당했음을 고백한다.

월스트리트를 뒤집었던 괴짜 천재 네 명의 이야기를 깔끔하게 담아냈던 《빅쇼트》(2015)의 각본가 찰스 랜돌프의 솜씨는 《밤쉘》에서도 빛을 발한다. 수많은 인물, 복잡한 사건 국면의 핵심을 정확하게 짚으면서도 몰입을 높이는 속도감 넘치는 각본으로 돌파해 간다. 영화 초반, 켈리는 카메라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다큐멘터리의 해설자처럼 폭스뉴스의 건물 구조를 설명하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이 요약만으로 폭스뉴스 내부를 지탱했던 위계질서의 양상이 또렷하게 보인다. 영화가 모두 일일이 지적하지 않아도 그 안에서 벌어진 수많은 폭력을 짐작하게 하는 방식이다.

《밤쉘》은 켈리가 회사 밖에서 견뎌야 했던 압박 역시 공들여 묘사한다. 그는 미국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TV 생방송 토론회에서 당시 공화당 후보였던 도널드 트럼프의 여성 비하 발언들에 대해 질문하며 설전을 벌인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이후 1년이 넘는 시간 동안 트위터를 중심으로 한 트럼프의 인신공격, 이에 따른 일부 매체와 대중의 비난 어린 관심을 받아야 했다. 영화가 공개된 후 이 같은 묘사를 둘러싸고, 트럼프와 관련한 폭스뉴스의 역할은 정작 제대로 지적되지 않는다는 비판도 있었다. 그러나 성희롱을 고발하고 나선 여성들의 이야기에 초점을 맞춘 작품임을 감안할 때 해당 비판은 적절하지 않다. 오히려 켈리의 상황을 통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여성을 막아 세우는 것은 무엇인가. 남성 권력은 어떤 부당한 방식으로 작동하며 여성의 몸과 커리어를 통제하는가.

실존 인물들이 당시 사건의 양상을 또렷하게 보여주는 사이, 가상 인물인 케일라 포스피실(마고 로비)의 존재 역시 중요하게 다뤄진다. 패기 넘치는 신입사원인 그는 우연히 에일스와의 대면 기회를 잡는다. 그리고 그날 이후 “충성”을 강요당하며 지속적인 성추행 피해자가 된다. 영화는 “치마를 올려보라”는 요구에 속수무책으로 응할 수밖에 없는 포스피실의 모습을 담는다. 이 장면에서 카메라는 에일스의 관음적 시선이 되기도 하고, 무력하게 성추행 상황을 바라봐야 하는 관객의 위치를 강력하게 상기시키는 존재가 되기도 한다.

 

가상 인물을 통해 영화가 보여주고자 했던 것

적나라한 묘사가 담긴 장면이지만 ‘재연의 윤리’에 어긋나는 연출은 아니다. 여기에서 포시피실의 감정만큼이나 관객이 느끼는 수치심과 불편함은 중요하다. 그것이 남성 권력의 부당한 요구 앞에 침묵할 수밖에 없던 여성의 감정이기 때문이다. 실재하는 피해자의 고통을 다시 들추는 대신, 케일라 포스피실이라는 가상의 인물을 통해 당시 여성들에게 가해졌던 폭력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게 하는 영화의 판단 역시 사려 깊다.

이 영화의 여성들은 미디어가 만들어낸 ‘피해자다움’의 공식에서 벗어난다. 《밤쉘》은 피해 여성들이 모든 면에서 완전무결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연대란 말처럼 쉽지 않다는 뼈아픈 사실 역시 피하지 않고 그려낸다. 용기 있는 고백을 막아 세우는 개인의 상황들, 조직 안에서의 역학관계 묘사 역시 충실하다. 그러면서 영화가 결국 드러내는 건 암묵적 방관에 대한 일침이다. 단지 침묵을 선택하는 것이 범죄와 무관한 일이 될 수는 없다는 것. 이것은 성별과 성향을 떠나 누구에게나 벌어질 수 있으며, 모두가 마주해야 하는 일이라는 것.

그레천 칼슨 폭로 그 이후

2016년 당시 메긴 켈리를 포함해 20명 이상의 여성이 에일스의 성희롱 고발에 힘을 보탰다. 그중 한 여성은 비디오 영상 촬영을 통해 협박당했음을 털어놓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폭스뉴스 남성 앵커 빌리 오라일리의 성추행도 밝혀졌다. 그의 범죄 행각이 밝혀지지 않도록 그간 에일스가 힘썼고, 회사 측이 오라일리의 성추행 사건 합의 사실을 알면서도 재계약했다는 사실 역시 드러났다. 폭스뉴스에서 불명예 사임 이후 에일스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캠페인의 비공식 고문으로 일했고, 2017년 플로리다 자택에서 사망했다.

그레천 칼슨은 2017년 회고록 《나는 더 이상 침묵하지 않기로 했다(Be Fierce)》를 발간했다. 메긴 켈리는 폭스뉴스를 떠나 NBC의 앵커가 되었고, 인종주의에 대한 무신경한 발언으로 논란에 시달리다 2018년 프로그램에서 하차한 뒤 NBC와 결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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