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크롱에 성난 프랑스 시민 “당신, 이제 해고야”
  • 최정민 프랑스 통신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0.07.23 11:00
  • 호수 1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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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불감증’ 걸린 프랑스 대통령…성폭력 혐의 인사 등을 내각에 발탁

“무죄 추정의 원칙에 따라 임명을 번복할 의향은 없다.” 7월14일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프랑스 혁명 기념일을 맞아 언론과 가진 TV회견 자리에서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신임 내무부 장관 제랄드 다르마냉의 성폭행 혐의에 대한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마크롱 대통령은 그보다 일주일 앞선 7일 개각을 단행했다. 집권 후반기를 책임질 2기 내각이 본격 출범한 것이다. 코로나19 위기와 6월 치러진 지방선거의 참패를 돌파하기 위한 국정 쇄신 차원의 인사였다. 결과적으로 다수의 장관이 유임됐고, 일부는 수평 이동하면서 ‘조용한 개각’이라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그러나 새로 입각한 몇몇 장관의 면면이 연일 화제를 불러일으키면서 결코 조용하지 않은 개각의 후폭풍을 맞고 있다.

가장 이목을 끈 인사는 법무부 장관에 기용된 에릭 뒤퐁 모레티 변호사다. 모레티는 프랑스 법조계에서 손꼽히는 ‘스타 변호사’다. 이른바 ‘악마의 변호사’라고도 불리는, 논란이 돼 아무도 변론을 맡지 않는 범죄자들을 변호하며 화제를 몰고 다니는 간판급 변호사 중 한 사람이다.

7월7일 프랑스 정부 개각 발표 후 ‘성차별주의 정부’ ‘강간범 장관’이라고 적힌 피켓을 들고 정부에 항의하는 시위가 연일 파리 시내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AP 연합
7월7일 프랑스 정부 개각 발표 후 ‘성차별주의 정부’ ‘강간범 장관’이라고 적힌 피켓을 들고 정부에 항의하는 시위가 연일 파리 시내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AP 연합

범죄자 변호·여성 비하 인사가 법무장관

그가 변호한 대표적인 인물로는 2012년 툴루즈에서 발생한 유대인 학교 총격 사건 당시 테러리스트 모하메드 메라의 공범, 동료 선수의 성관계 영상을 빌미로 돈을 요구한 레알 마드리드 축구 스타 카림 벤제마 등이 있다. 최근엔 프랑스 정계 우파의 거물인 파트리크 발카니 전 르발루아페레 시장의 탈세 혐의에 관한 변호 또한 맡아 주목을 받았고, 현재 폭로 전문 웹사이트 위키리크스 설립자 줄리안 어산지에 대한 변호 및 프랑스로의 망명운동 역시 주도하고 있다.

그가 맡은 어느 사건 하나 유명세를 치르지 않은 것이 없었다. 무엇보다 그는 법정에 들어서기 전 카메라 앞에서 화려한 언론 플레이를 펼치며 판사들로부터 미운털이 단단히 박히곤 했다. 이러한 기질을 발휘해 지난해에는 1인극 배우로 무대에 오르기도 하는 등 예측불허의 다양한 활동을 하기도 했다.

게다가 지난해 세계적 미투운동을 촉발한 미국 유명 영화제작자 하비 와인스타인을 언급하며 “권력에 끌리는 여성이 있다”고 그를 두둔하거나, 2018년 정부의 캣콜링(거리에서 여성을 향해 휘파람을 부는 행동) 처벌안에 대해 “일부 여성은 캣콜링을 그리워한다”고 발언해 ‘미투 폄훼’ ‘여성 비하’ 논란에 꾸준히 오르기도 했다. 지난 7일 장관 취임식에서 그의 첫 일성은 “나는 정치인이 아니다”였다. 그러면서 “용기 있는 단 한 사람, 마크롱 대통령을 위해 장관직을 수락했다”며 대통령을 치켜세워, 정치인으로서의 가능성 또한 유감없이 발휘했다.

법무부 장관 인사가 프랑스 법조계 전체의 우려를 낳고 있다면, 또 다른 한 사람의 임명은 프랑스 여성계의 ‘경악’과 여론의 ‘우려’를 자아내고 있다. 바로 예산부 장관이었던 제랄드 다르마냉의 내무부 장관 임명이다. 그는 이미 오래전부터 ‘성폭행 의혹’으로 구설에 올라 있었다. 2009년 그가 우파 정당 ‘대중운동연합’의 법률 담당자로 일하던 중 한 여성에게 법적 지원에 대한 대가로 성관계를 요구하고, 호텔로 데려가 성폭행한 혐의를 받고 있다.

당시 다르마냉은 해당 여성을 무고 혐의로 고소했고 검찰은 2017년 이 사건을 증거 불충분으로 불기소 처분했다. 그러나 파리 항소법원이 지난 6월 검찰에 재수사를 명령하면서 그는 현재 끝맺히지 않은 성폭력 의혹의 주인공인 상태다. 이뿐만 아니라 다르마냉은 북부 투르코잉 시장 재직 시절이던 2014~17년에도 공공주택 지원을 대가로 한 여성에게 성관계를 요구했다는 의혹도 받고 있다. 그는 지방자치단체장과 공직을 겸할 수 있다는 프랑스 법에 따라, 지난 3월 장관 신분으로 지방선거에 출마해 시장 재선에도 성공했다.

지난 지방선거를 앞두고 다르마냉 장관이 재선에 도전하자, 정치권에선 정부 개각이 예상되는 시점에 그가 장관직을 더 유지할 수 없다고 예상해 빠르게 살길을 찾는 것이란 관측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실각은커녕 그가 내치를 총괄하는 내무부 장관 자리로 영전하자 비판 여론이 즉각적으로 일었다. 프랑스 언론은 일제히 우려를 쏟아냈으며 곧장 여성계의 시위가 이어졌다. 성폭력 혐의를 받고 있는 인물이 프랑스 공권력을 관장하는 제1호 경찰인 내무부 장관직을 수행하게 된 상황에 대한 저항이었다.

이번 개각에서 문제가 된 제랄드 다르마냉 내무부 장관(왼쪽)과 에릭 뒤퐁 모레티 법무부 장관 ⓒXinhua
이번 개각에서 문제가 된 제랄드 다르마냉 내무부 장관(왼쪽)과 에릭 뒤퐁 모레티 법무부 장관ⓒXinhua

2년 앞둔 대선 준비 위한 정치적 계산

흥미로운 것은 이런 무리수를 둘 수밖에 없는 마크롱의 상황이다. 다음 대선이 2년 앞으로 다가온 만큼 이번 내각으로 본격적인 대선을 준비해야 하는데, 대선을 앞두고 내무부 장관을 반드시 대통령 최측근으로 앉히는 일은 프랑스 정가에서 불문율이나 다름없다. 당초엔 대통령 내외와 사적으로도 친밀한 장 미셀 블랑커 교육부 장관을 기용할 것이라는 추측이 유력했다. 그가 야권의 대선 잠룡이자 전직 장관인 프랑수아 바루앙과도 가까운 점을 들어, 경쟁 후보 견제도 가능한 절묘한 인사가 될 것이라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막상 뚜껑을 열자 누구도 예상 못 한 결과가 나온 것이다.

이번 개각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은 바로 니콜라 사르코지 전 대통령이다. 마크롱이 개각을 앞두고 사르코지에게 자문을 구했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그 과정이 지나치게 노골적이었다. 다르마냉은 과거 사르코지에 의해 중앙 정계에 발탁된 대표적인 측근 인사다. 심지어 이번 개각에서 중앙무대에 데뷔한 장 카스텍스 신임 총리도 지명 직후 첫 통화를 사르코지와 한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사르코지는 감옥의 문턱에 있는 인물이다. 선거법 위반과 판사 회유, 정치자금법 위반 등 어느 것 하나 가볍지 않은 사안들로 가득한 혐의를 받고 있다. 이런 인사가 성폭행 혐의를 받고 있는 자신의 참모를 내무부 장관에 천거한 모양새를 프랑스 언론과 대중들은 쉽게 받아들일 수 없다는 분위기다.

7월14일 혁명기념일 기자회견을 마친 후 파리 시내 튈르리 공원 산책에 나선 마크롱은 대통령 부부를 야유하는 노란조끼 시위대와 마주쳐 설전을 벌였다. “대통령도 가족과 휴일을 즐기는 것을 존중해 달라”는 대통령의 요구에 한 시민은 “당신은 내가 고용했으며, 이젠 해고다”라고 쏘아붙였다. 성난 시민들이 프랑스 왕을 끌어내린 혁명기념일에 마크롱 역시 한 시민으로부터 해고 통보를 받은 셈이다.

마크롱이 여론의 비판을 무릅쓰고 자신의 2기 내각을 지켜낼 수 있을까. 일단 마크롱은 자신의 이번 인사에 대해 번복할 의사가 없음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대선을 2년 앞둔 시점에 철저히 정치적 계산으로 짜인 이번 개각이 마치 시한폭탄을 싣고 가는 듯한 인상을 주는 건 어쩔 수 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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