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배터리 동맹 속 다시 불거진 K배터리 전쟁
  • 조유빈 기자 (you@sisajournal.com)
  • 승인 2020.07.31 11:00
  • 호수 1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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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G화학-SK이노베이션 소송 장기전 양상…포드와 폭스바겐·GM이 참전한 이유

정부가 추진하는 ‘한국판 뉴딜’, 그 한 축은 ‘그린 뉴딜’이다. 그린 뉴딜의 중심에는 친환경 전기차가 있다. 전기차의 핵심은 배터리. 그렇기 때문에 친환경 모빌리티 강국을 실현시키기 위한, 국내 배터리 3사(LG화학, SK이노베이션, 삼성SDI)의 경쟁과 협력을 통한 기술력 제고가 관건으로 꼽힌다.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수석부회장이 연이어 배터리 3사 리더를 만나 협력을 논의한 일명 ‘배터리 회동’을 두고 업계는 “K배터리 동맹이 맺어졌다” “그린 뉴딜 연합이 결성됐다”고 평가를 내리기도 했다.

그러나 지난 6월말 LG화학이 서울중앙지검에 SK이노베이션을 상대로 고소장을 제출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두 회사 간 소송 이슈가 다시 불거졌다. LG화학은 지난해 4월 SK이노베이션을 상대로 미국 국제무역위원회(ITC) 등에 영업비밀 침해 관련 소송을 제기한 바 있다. 이후 1년3개월 넘게 소송의 돌파구가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업계 갈등 상황이 확전되면서 K배터리 동맹은 ‘사실상 물 건너간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최근에는 양 사의 배터리 분쟁에 이해관계가 얽힌 글로벌 완성차 업체들까지 가세해 ‘전기차 동맹전’ 양상으로까지 확산되는 모양새다.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 LG화학 본사가 위치한 LG트윈타워(왼쪽 사진)와 종로구 서린동 SK 이노베이션 본사가 위치한 SK빌딩(오른쪽 사진) ⓒ연합뉴스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 LG화학 본사가 위치한 LG트윈타워(왼쪽 사진)와 종로구 서린동 SK 이노베이션 본사가 위치한 SK빌딩(오른쪽 사진) ⓒ연합뉴스

 

전직 과정에서의 영업비밀 유출 두고 공방

양 사 갈등의 핵심은 ‘채용’, 그리고 그에 더해진 ‘영업비밀 침해’였다. 이미 2017년 LG화학은 SK이노베이션으로 전직한 직원 5명을 대상으로 전직 금지 가처분 소송을 제기해 승소한 바 있다. 지난해 LG화학은 SK이노베이션이 LG화학의 핵심 인력 76명을 빼갔고, 이 과정에서 LG화학의 핵심 기술 자료를 유출했다며 미국 ITC와 델라웨어주 연방지방법원에 소송을 제기했다. 미국에서 소송을 제기한 이유에 대해 LG화학은 “소송 과정에 강력한 ‘증거개시(디스커버리)’ 절차가 있어 증거 은폐가 어렵고, 이를 위반 시 소송 결과에도 큰 영향을 주는 제재로 이어지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분쟁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LG화학은 산업기술 유출 방지 보호법 위반 혐의로 SK이노베이션을 경찰에 형사 고소했고, 이에 대해 SK이노베이션은 서울중앙지법에 명예훼손에 대한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소송을 걸면서 반격에 나섰다. 지난해 8월에는 SK이노베이션이 ITC에 소송을 제기했다. LG화학과 LG전자가 자사 배터리 특허를 침해했다는 이유에서다. 9월에는 다시 LG화학이 SK이노베이션을 상대로 ITC에 특허침해 소송을 냈다.

이렇게 국내외에서 여러 건의 소송으로 맞붙은 가운데, 먼저 유리한 고지를 점한 것은 LG화학이었다. 지난 2월 ITC는 영업비밀 침해 소송 예비 결정을 통해 SK이노베이션에 대한 조기 패소 판결을 내렸다. SK이노베이션의 증거인멸 혐의가 명백하다며 내린 결정이었다. SK이노베이션은 곧바로 이의를 제기하며 해당 혐의에 대한 소명에 나섰고, ITC는 이를 받아들여 전면 재검토에 들어갔다. ITC의 최종 판결은 올해 10월5일 나올 예정이다.

ITC가 SK이노베이션에 대한 패소 판결을 최종적으로 내리게 되면, SK이노베이션의 배터리 셀과 모듈, 팩, 관련 부품·소재에 대한 미국 내 수입 금지 효력이 발생한다. 사실상 전기차 배터리의 미국 내 공급이 불가능해지는 셈이라, 패소 판결에 이어지는 리스크가 크다. 지금까지 ITC 예비결정이 뒤집힌 경우가 거의 없어 판결이 유지될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지만, ITC가 전면 재검토 결정을 내린 가운데 판결이 일부 바뀔 가능성도 존재한다. 이와 관련해 SK이노베이션은 “좋은 결과가 나올 수 있도록 최대한 노력하고 있다”고 밝혔다.

국내 기업 간의 분쟁이 해외 소송을 통해 진행되고 있는 것에 대해 '국익 훼손'이라는 비판도 나온다. 막대한 소송 비용으로 경제적 피해만 남긴다는 시각도 적지 않다. 업계에 따르면 양 사의 소송 비용은 4000억원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대해 LG화학은 “소송의 본질은 국내 기업 간의 불필요한 다툼이 아니라, 세계시장에서 정당한 방법으로 경쟁하고, 오랜 연구와 막대한 투자로 확보한 핵심기술 등의 지식재산권을 보호하기 위함”이라며 “지식재산권 보호를 위한 정당한 소송”이라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

폭스바겐을 중심으로 전기차 부품과 배터리 간 수직 계열화를 꾀하는 유럽, 자국 시장을 바탕으로 배터리 기술 고도화에 역량을 집중하고 있는 중국으로 인해 배터리 산업 패권이 위협받고 있는 상황에서 국내 배터리 업계가 분쟁을 이어 나가는 것이 좋은 모양새는 아니라는 시각도 나온다. 대대적인 협력을 모색하던 중 등장한 고소장으로 인해 K배터리 동맹에 대한 기대감이 식을 우려도 존재한다.

양 사 이견으로 합의 도출 아직 미지수

LG화학은 지난 2월 미국 ITC가 내린 SK이노베이션의 조기 패소 판결과 관련한 입장문에서 “이번 소송의 본질은 30여 년 동안 축적한 당사의 소중한 지식재산권을 정당한 방법으로 보호하기 위한 데 있고, 대화의 문은 열려 있다”고 밝힌 바 있다. 업계나 전문가들도 양 사가 최종 판결이 나오기 전 대화를 통해 합의를 시도할 것이라고 전망한다. 한 증권가 애널리스트는 “미국 공장 추가 증설 등을 감안할 때 ITC 판결 이전에 합의가 원만하게 이뤄질 것”이라는 분석을 내놨다. 그러나 판결이 3개월도 채 남지 않은 지금도 구체적인 안은 마련되지 않았다. 업계 관계자에 따르면 양 사의 이견이 좁혀지지 않아 유의미한 합의 자리는 아직 만들어지지 않은 것으로 전해진다.

일단 소송에 대한 두 회사의 입장 차가 크다. LG화학은 “도를 넘은 인력 빼가기 과정에서 광범위한 영역에서 영업비밀이 다량으로 유출된 정황들을 확보했고, 그에 따라 연구개발, 생산, 기술, 품질관리, 구매, 영업 등 세부 항목을 나눠 구체적인 자료를 토대로 소장을 제출했다”고 밝힌 바 있다. 이에 반해 SK이노베이션은 “공개채용을 원칙으로 한 자발적인 이직이었으며 기술 유출은 없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결국 LG화학은 SK이노베이션이 영업비밀 침해를 인정하고 그에 맞는 손해배상을 해야 한다는 입장이지만 SK이노베이션은 영업비밀을 침해한 것이 없기 때문에 배상할 수 없고, 만약 LG화학이 침해 사실과 피해액을 객관적으로 제시할 경우 그에 대해 논의해 보겠다는 입장이다. 배상 수준도 쟁점이다. 영업비밀 침해의 범위와 해석에 따라 합의금 규모는 달라질 수 있다. 천억원 단위에서 조 단위까지의 합의금 액수가 구설에 오른다.

 

'일자리' 이유로 미 행정부가 개입할 가능성 있어

배터리 공방전은 글로벌 완성차 업체로까지 확산됐다. 7월23일(현지시간) 블룸버그통신과 로이터통신 등에 따르면 SK이노베이션의 전기차용 배터리를 납품받기로 한 미국 포드와 독일 폭스바겐은 ‘한국 배터리 업체들 간의 법적 분쟁이 미국 내 전기차 생산 차질 및 일자리 감소를 야기할 수 있다’는 우려를 ITC에 전달했다. SK이노베이션의 전기차용 배터리는 2022년부터 생산되는 포드의 전기트럭 ‘F-150’과 같은 해 미국 테네시주에서 가동을 시작하는 폭스바겐의 전기차 공장에 적용될 예정이다. SK이노베이션이 패소할 경우 부품 조달이 불안정해질 가능성이 존재한다. 이 때문에 폭스바겐은 조지아주 공장의 배터리 생산을 허용해야 한다고 요청했고, 포드 역시 의견서를 통해 “(전기차용) 배터리는 차종에 따라 설계하기 때문에 갑자기 다른 배터리로 대체할 수 없다”고 전한 바 있다.

반면에 LG화학과 전기차용 배터리 관련 합작사를 건설하는 미국 제너럴모터스(GM)는 지난 4월 ITC에 “지식재산권과 영업비밀은 철저히 보호돼야 한다”며 LG화학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다. LG화학 생산기지가 들어설 오하이오주의 마이크 드와인 주지사는 “SK이노베이션의 불공정 경쟁 행위를 제재하지 않으면, 미국에서 최소 1100개 이상의 일자리를 창출할 LG화학의 투자가 보장될 수 없을 것”이라고 언급했다.

국내 배터리 회사의 분쟁은 글로벌 기업의 개입을 넘어 미국 정부까지 관심을 보이는 사안이 됐다. ITC 결정에는 미국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의 확산세로 경기 회복이 쉽지 않은 상황에서, 미 행정부가 ‘일자리’를 이유로 소송전에 개입할 여지도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SK이노베이션의 조지아주 배터리 공장이 2000개 이상의 일자리를 창출할 것이라 예상했다. WSJ는 2019년 12월 “미 행정부는 현지 배터리 공장 수를 늘리고 싶어 한다”며 “트럼프 대통령은 ITC가 SK이노베이션에 관대한 결정을 내리길 원할 것”이라고 보도했다.

실제로 대통령이 ITC 결정에 거부권을 행사한 전례가 있다. 2013년 삼성이 애플을 상대로 건 3G 이동통신 특허 침해 소송에서 ITC가 애플의 특허 침해를 인정해 ‘미국 내 수입 금지 판결’을 내렸을 때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미국 경제의 타격을 이유로 거부권을 행사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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