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재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
  • 하은정 우먼센스 기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0.08.08 14:00
  • 호수 1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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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악에서 구하소서》로 스크린에 돌아온 배우 이정재

배우 이정재가 영화 《사바하》 이후 1년 반 만에 스크린으로 돌아왔다. 이번에도 악역이다. 1993년 드라마로 데뷔한 그는 올해로 연기 경력 27년의 베테랑이다. 그동안 《태양은 없다》(1998), 《시월애》(2000), 《오! 브라더스》(2003), 《하녀》(2010), 《암살》(2015) 등 다양한 영화에 출연하며 20년째 톱스타 자리를 지키고 있다. 최근엔 인상 깊은 악역이나 조연으로 사랑을 받고 있다.

8월5일 개봉한 누아르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감독 홍원찬)는 마지막 청부살인 미션 때문에 새로운 사건에 휘말리게 되는 인남(황정민)과 그를 쫓는 무자비한 추격자 레이(이정재)의 처절한 추격과 사투를 그린 하드보일드 추격액션 영화다. 극 중 이정재는 레이 역을 맡아 집요한 추격전을 펼치는 무자비한 킬러로 활약했다. 피도 눈물도 없는, 그러나 패션모델처럼 근사한 캐릭터다.

깊이 있는 캐릭터 분석과 표현 능력으로 영화판 사람들의 지지를 받아온 그는 이번 캐릭터에도 기존과 다른 독특함을 부여하기 위해 고민을 거듭했다(연기에 깐깐하기로 소문난 황정민도 “이토록 집요하게 캐릭터를 분석하는 연기자는 처음 봤다”고 말할 정도다). 초반 시나리오에서는 레이 캐릭터에 대한 설명이 많지 않았다. 오히려 그 상황이 배우로서는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귀금속으로 온몸을 휘감은 화려한 의상에 목을 뒤덮은 타투 등 화려하고 섹시한 레이의 스타일링은 모두 이정재의 의견이 반영된 결과물이다. 개봉 직전 그를 만났다.

개봉을 앞둔 소감은 어떤가.

“개인적으로 엔딩을 포함해 많은 것을 잘 풀어낸 영화라고 생각한다. 재미있게 봤다.”

 

그런 말 들어본 적 있나? ‘이정재가 악역 맡으면 흥행한다’는 말.

“하하. 사실 뭐가 됐든 흥행하면 좋은 거 아닌가. 악역은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는 캐릭터라 매력적이다. 이번 ‘레이’ 역할을 제안받았을 때도 그 때문에 즐거웠다. 내가 고민한 것을 테스트하고 공유하는 과정이 재미있었다.”

 

어떤 아이디어를 공유했나.

“개인적으로 캐릭터를 분석할 때 스태프의 의견을 따르는 편이다. 왜냐면 내 생각을 고집하면 결국 ‘이정재’가 나올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한데 이번 캐릭터만큼은 내 상상력이 개입되는 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서 이런저런 의견들을 냈다.”

 

어떤 의견을 냈나.

“의상팀에 개인 스타일리스트와 협업을 하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했다. 룩 자체에 대한 아이디어보다는 의상에 ‘묘한 부분’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묘함을 어떻게 비주얼적으로 풀어낼 것인가에 대해 스타일리스트의 도움을 받고 싶었다. 이국적인 장면이 많은 영화에서 과하지 않되 어떻게 하면 묘한 매력을 만들어낼 수 있을지 고민했다. 문신도 해 봤다. 보통 문신을 하는 사람을 보면 문신 하나하나에 의미를 담는다. 한데 그 의미가 영화에서 보일까라는 의문이 들어서 오히려 무슨 문신인지 잘 안 보이게 꽉 채우자 싶었다(웃음).”

 

감정이 없는 캐릭터다.

“그래서 ‘묘함’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레이가 하는 행동에 대해선 굳이 말로 설명할 필요 없이 ‘그냥 그럴 것 같아’라는 믿음을 관객에게 주고 싶었다. 그러다 보니 비주얼, 표정, 눈빛이 중요했다. 무서워 보이는 연기는 1차원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섬뜩하기만 하면 됐다. ‘섬뜩함’은 공포와는 또 다른 감정이다. 그 찰나의 순간을 잘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레이의 독특한 말투와 목소리가 인상적이었다.

“일본 생활을 오래한 사람의 말투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게 감독님의 제안이었다. 여러 톤으로 영상을 찍으면서 조율해 나갔다. 이것 역시 과하지 않은 게 중요했다.”

 

이정재 특유의 목소리가 있다. 이른바 ‘긁는 저음’이라고 할까?

“어렸을 땐 내 목소리에 대해 잘 알지 못했는데 나이 들어가면서 긁는 저음이 생긴 것 같다. 예능에서 내 목소리를 성대모사 하는 분들을 보면 재미있다.”

 

이정재의 등장 신은 언제나 화제가 됐다.

“모든 배우가 영화에서 자신이 나오는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래서 그 어떤 장면보다 신중하게 찍게 된다. 혼자 스토리를 끌고 가는 역할이 아니기에 나오는 장면의 횟수가 한정적이다. 다양한 모습을 보여드릴 순 없었지만 그 최선의 경계치가 어디일까 하는 고민을 했다. 매 장면마다 의미를 많이 집어넣고, 조그마한 설정들을 깨알같이 넣었지만 그건 나만 아는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최선을 다했다.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

 

액션 촬영 중 왼쪽 어깨가 파열됐다고 들었다.

“수술을 해야 하는데 요즘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오징어게임》을 촬영하고 있어 미루고 있다. 수술을 하면 한동안은 아무것도 못 하니, 어쩔 수 없이 진행 중인 촬영을 끝내고 할 생각이다.”

 

충무로에서 가장 핫한 박정민도 출연한다. 어땠나?

“일단 다리가 너무 예뻐서 스태프가 다 놀랐다. 하하. 그리고 무대에서 춤추는 장면이 있었는데 춤 선이 아주 곱더라. ‘무용을 배웠었나’ 했을 정도로 말이다. 사실 박정민씨가 맡은 유이라는 역할이 연기하기 참 어려운 캐릭터다. 과하면 보기 불편하고 덜하면 맛이 안 나는 역할인데, 그 안에서 재미있게 똑똑하게 표현하는 걸 보고 놀라웠다. 저 연기는 애드리브인가 설정을 한 건가 헷갈릴 정도로 잘했다. 물론 나도 이런 역할에 욕심이 나기도 하지만 정민이의 연기를 보고 난 다음이라 엄두가 안 난다.”

 

이정재의 액션을 오랜만에 보는 것 같다.

“배우에게 액션 장면에서 중요한 건 동작보다 표정이다. 잠깐 지나가는 찰나의 표정에서 폭력적인 느낌, 혹은 잔인한, 또는 절실한 감정이 스쳐야 한다. 액션이 흘러가는 동작을 보여주는 것이라면 찰나의 표정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 짧은 순간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배우는 온종일 캐릭터의 감정을 유지해야 한다. 그게 또 영화라는 작업, 배우라는 직업의 묘미이기도 하다.”

 

영화 《신세계》의 주역 이정재와 황정민이 7년 만에 호흡을 맞췄다는 사실로 개봉 전부터 주목받고 있다.

“형(황정민)은 하나도 바뀐 게 없다. 그때도 체력이 좋다고 느꼈는데 여전했다. 기본적으로 체력이 좋아 집중력이 좋고, 그렇다 보니 현장에서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가 보통이 아니다. 현장을 누비며 오로지 영화만 생각하는 사람이다. (박)정민이도 그렇고 형(황정민)도 그렇고 다들 영화 얘기밖에 안 한다. 서로 얘기하지 않아도 잘 안다는 느낌, 무언의 소통이 잘되는 형이다. 그런 게 현장에서 참 중요하다. 아, 요즘 정민이 형은 골프에 빠져 있는 것 같더라.”

 

첫 연출작 《헌트》(가제)는 어떤 상황인가(《헌트》는 이정재의 첫 연출작으로, 지난 1999년 영화 《태양은 없다》에서 호흡을 맞춘 절친 정우성과 이정재가 21년 만에 다시 만나는 작품으로 화제가 됐다).

“사실 지금도 (정우성의 출연이) 확실히 결정된 건 아니다. 제가 계속 어필하는 중인데 빨리 결정을 해 줬으면 좋겠다. 하하. 《헌트》는 예전부터 써온 시나리오다. 쓰다 보니 자연스럽게 연출에도 관심을 두게 됐다. 내년에 찍을 예정이다.”

 

친한 친구이기도 한 정우성 역시 현재 영화 《강철비2》 개봉을 앞두고 있다.

“《강철비2》를 봤다. 제가 데뷔한 지 오래됐지만 아직도 시사회가 끝난 후 기자들을 만나는 자리가 두렵다. 한데 친구 작품은 제 작품인 것처럼 엄청 찾아 본다. 지금 극장가가 예전 같지 않아 경쟁보다는 동맹을 해야 할 때다(웃음). 동맹을 해서 극장가에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으면 좋겠다.”

 

요즘 언제 가장 행복한가.

“매년 나이를 먹으며 더 느끼는 것이지만 일할 때가 가장 행복하다. 배우로서 캐릭터를 분석하고 고민하는 자체가 즐겁다. 동시에 일을 꾸준히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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