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역 경쟁 더 치열했던 UEFA 챔피언스리그
  • 서호정 축구 칼럼니스트 (goalgoalsong@naver.com)
  • 승인 2020.08.30 15:00
  • 호수 161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3일 간격 단판 토너먼트 이변 속출… 무관중 시대 맞아 새로운 축구 문화 생기나

바이에른 뮌헨의 주장인 마누엘 노이어가 골키퍼 장갑 없이 맨손으로 거대한 ‘빅이어(트로피 양쪽 손잡이가 큰 귀를 닮았다는 데서 붙은 별명)’를 잡아 힘차게 들어올렸다. 동료들의 환호 속에 화려한 폭죽이 터졌지만 적막감을 감출 순 없었다. 파리생제르맹을 1대0으로 꺾고 바이에른이 구단 통산 6번째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리그 우승이라는 역사를 쓴 포르투갈 리스본의 경기장 이스타디우 다 루스의 6만5000석 관중석은 텅 비어 있었다. 평소라면 유럽 축구를 대표하는 VIP와 구단 레전드들이 우승 메달을 걸어주며 축하할 일이었지만, 경기 운영을 위한 최소 인원들이 지켜볼 뿐이었다. 그런 모습을 보며 비슷한 독일어 발음의 두 단어를 이용해 ‘가이스터 마이스터(유령 챔피언)’라는 타이틀이 바이에른 앞에 붙었다.

조별리그부터 결승전까지 11경기를 모두 승리하는 압도적인 우승을 일궜지만, 2019~20 시즌 UEFA 챔피언스리그의 주인공은 바이에른이 아니었다. 코로나19(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확산으로 인해 이전과는 확 달라진 대회 방식, 치밀한 방역 지침으로 인해 등장한 생소한 모습들이 더 화제였다. 자연스럽게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축구계가 택하게 될 ‘뉴 노멀’도 확인할 수 있었다.

주장 마누엘 노이어를 비롯해 독일 바이에른 뮌헨 선수들이 8월23일(현지시간)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열린 시상식에서 우승 트로피 ‘빅이어’를 들고 환호하고 있다. ⓒREUTERS
주장 마누엘 노이어를 비롯해 독일 바이에른 뮌헨 선수들이 8월23일(현지시간)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열린 시상식에서 우승 트로피 ‘빅이어’를 들고 환호하고 있다. ⓒREUTERS

모여서, 몰아서 치른 대회…메날두 시대 종언

지난 3월 코로나19가 본격 확산되며 유럽 축구계도 올스톱에 돌입했다. 일부 리그는 중단 상태로 우승팀을 정해야 했다. EPL(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을 비롯한 일부 리그는 확산세가 주춤하자 무관중 형태로 잔여 일정을 급히 마무리하며 시즌을 정리했다. 유럽 축구 전체의 최고 클럽을 가리는 챔피언스리그도 초유의 방식을 택했다.

원래 챔피언스리그를 비롯한 클럽대항전은 공정성을 위해 결승전만 미리 결정한 중립 지역에서 치르고 나머지 토너먼트는 양팀의 연고지를 오가는 홈 앤드 어웨이 방식을 원칙으로 삼는다. 이번 시즌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은 터키 이스탄불의 아타튀르크 올림픽 스타디움에서 열릴 예정이었다. 하지만 코로나 위기로부터 최대한 빨리, 몰아서 일정을 소화해야 하는 만큼 단일 지역에서 단판 승부로 치르는 ‘그린존’ 방식을 결정하며 포르투갈로 모든 장소를 이전했다.

8월12일부터 23일까지로 확정된 대회 기간으로 인해 각 팀은 승리해 다음 라운드로 가도 사흘 만에 경기를 준비해야 했다. 월드컵 이상의 빡빡한 일정 속에 이변이 속출했다. 21세기의 세계 축구를 양분했던 ‘축구의 신’ 리오넬 메시와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중 한 명도 없는 4강 대진이 무려 15년 만에 탄생했다. 오직 바르셀로나에서만 뛴 메시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레알 마드리드, 그리고 현 소속팀 유벤투스까지 빅클럽을 거친 호날두는 2005년 이후 항상 준결승 이상의 무대에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바르셀로나는 8강전에서 바이에른에 무려 2대8로 패하는 역사적 참패를 기록했다. 유벤투스는 아예 16강전에서 프랑스의 올림피크 리옹에 패해 탈락했다. 이른바 ‘메날두(메시+호날두)’ 시대의 종언을 알린 대회가 되고 말았다. 최근 반복된 바르셀로나의 부진과 구단 수뇌부의 독선에 실망한 메시는 팩스로 구단에 이적 요청을 담은 내용증명 서류를 보내 계약해지를 통보했다.

또 다른 강력한 우승 후보였던 펩 과르디올라 감독의 맨체스터시티는 8강에서 리옹에 패하며 짐을 쌌다. 다음 시즌부터 황희찬이 활약하게 될 새 소속팀인 독일의 RB 라이프치히도 챔피언스리그 준우승만 3회 차지한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를 8강에서 제압했다. 단판 승부의 특성을 활용한 맞춤 전술로 빅클럽을 무너트린 리옹과 라이프치히는 모든 전문가의 예상을 깨고 4강에 올랐다. 라이프치히는 분데스리가에서 3위를 기록했지만 우승권과 거리가 멀었다. 리옹은 프랑스 리그1 7위에 그쳤던 팀이라는 점에서 역대급 이변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최종 승자는 전력 면에서 가장 잘 준비된 바이에른이었지만, 3일 간격의 단판 승부라는 방식이 돌풍을 유도한 것은 분명했다.

UEFA는 우승을 위한 경쟁뿐만 아니라 코로나19의 방역을 위한 전쟁도 치열하게 진행해야 했다. 이번 대회를 앞두고 새롭게 내놓은 챔피언스리그 경기 매뉴얼에 따르면 시작 10분 전 감염되지 않은 공을 골라 배치하는 것을 시작으로, 선수들이 라커룸을 떠나 운동장으로 들어서는 시점, 동선에서의 간격 유지, 단체 촬영 시간, 경기 시작까지 분 단위로 일정이 짜였다.

각 팀 선수들은 출국 전, 리스본에 도착한 뒤 각 한 차례 코로나19 검사를 받았다. 매일 체온 체크가 이뤄지고 검사 결과는 경기 6시간 전까지 제출했다. 숙소에서의 동선 제한은 물론이고, 훈련장 내 훈련 구역도 표시된 경로로만 이동할 수 있었다. 땀을 흘리는 워밍업은 잔디 밖에서 해야 하고, 골대 입구 쪽 잔디는 건드리지 말아야 한다고 규정했다. 잔디가 감염되는 걸 막기 위해서다. 경기장 내에는 각 팀 선수와 스태프도 최소 인원만 들어갈 수 있으며, 구역별로 최대 120명 이상은 몰릴 수 없도록 조치했다. 이런 내용들이 담긴 각종 규정 및 설명 사항, 즉 코로나19 대응 매뉴얼은 무려 130페이지에 달했다. 마치 군사작전 수행을 연상케 하는 치밀함이었다.

2019~20 시즌 유럽 챔피언스리그 8강전에서 바이에른 뮌헨에 2대8로 대패한 뒤 낙담한 표정을 짓고 있는 FC바르셀로나의 리오넬 메시 ⓒAP 연합
2019~20 시즌 유럽 챔피언스리그 8강전에서 바이에른 뮌헨에 2대8로 대패한 뒤 낙담한 표정을 짓고 있는 FC바르셀로나의 리오넬 메시 ⓒAP 연합

군사작전 연상시킨 방역 대책, 다음 시즌도?

해프닝도 있었다. 파리생제르맹 공격수 네이마르가 4강전이 끝난 뒤 상대 팀 선수와 땀에 젖은 유니폼을 교환한 것이다. 영국의 일간지 ‘더선’은 “네이마르가 감염 가능성이 있는 행위로 방역 매뉴얼을 위반했다. 출장 정지 징계를 받을 수 있어 결승전에 결장할 것”이라고 보도했다. 결승전에 에이스가 출전하지 못한다는 소식에 하루 종일 뜨거웠지만, UEFA는 “유니폼 교환 금지는 권고 사항”이라며 오보임을 밝혔다. 하지만 유니폼 교환이나, 경기 중 음료를 나눠 마시는 등 그동안 익숙했던 인간미 있는 행위들이 코로나19 시대에는 위험한 시도로 보여질 수밖에 없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축구 생태계는 더 이상 그라운드 위에서 펼쳐지는 경기에만 몰두할 수 없게 됐다. 그라운드 위는 물론 관중석까지 세세하고 엄격한 방역 대책과 규정들이 적용될 수밖에 없다. 이번 챔피언스리그는 무사히 마쳤지만, 만일 단 1명이라도 감염 사태가 발생했다면 무책임한 대회 운영이었다는 지적을 피할 수 없었다. 실제 UEFA도 대회의 목표를 흥행이 아닌 안전에 맞춰야 했다.

향후 챔피언스리그나 올림픽, 월드컵 같은 대형 스포츠 이벤트 진행에 대규모 방역전선이 깔리게 될 것이라는 예고편과 같았다. UEFA의 알렉산더 세페린 회장은 향후에도 챔피언스리그가 단판 승부, 그리고 한곳에 모여 진행하는 형태로 갈 수도 있다는 생각을 밝혔다. UEFA는 오는 9월 예정된 챔피언스리그 우승팀과 유로파리그 우승팀이 격돌하는 슈퍼컵에 대해 경기장 수용 규모의 30%까지 관중을 입장시키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현재 UEFA 주관 경기 전체를 무관중으로 치르고 있지만 코로나 사태가 안정세를 보인다는 판단에 첫 유관중 계획을 밝힌 것이다. 세페린 회장은 “팬이 없는 축구는 무언가를 잃었다. 슈퍼컵이 팬들을 경기장에 돌아올 수 있게 하는 시험대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지만 벌써부터 세계 축구계는 우려와 반대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관련기사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