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인 모두가 긴즈버그에게 빚을 지고 있는 이유
  • 이철재 미국변호사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0.09.21 21:22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미국 사회에 '법의 공정성' 일깨운 '평등의 아이콘' 세상 떠나

미국 사회 여성의 법적 권리는 대법관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어떤 법이든 성별을 근거로 차별을 하는 것은 위헌”이라는 그의 말은 이제 영어의 한 관용적 표현이 됐다. 

지난 9월18일 저녁 미국에서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인터넷 서핑을 하고 있던 많은 사람들은 일순간 ‘헉’하고 숨을 멈췄을 것이다. 갑자기 핸드폰에 긴즈버그가 세상을 떠났다는 속보가 떴기 때문이다. 대법원 진보진영의 대들보인 그는 미국 대선을 한 달 반 앞두고 세상을 떠났다.

미국 연방대법원 대법관 중 최고령인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대법관. 췌장암 전이에 따른 합병증으로 9월18일(현지시각) 워싱턴 자택에서 향년 87세로 숨을 거뒀다. ⓒ 연합뉴스
미국 연방대법원 대법관 중 최고령인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대법관. 췌장암 전이에 따른 합병증으로 9월18일(현지시각) 워싱턴 자택에서 향년 87세로 숨을 거뒀다. ⓒ 연합뉴스

 

긴즈버그는 1933년 러시아 출신 유태인 이민자와 오스트리아 유태인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긴즈버그의 키는 150cm나 될까 싶을 정도로 왜소했지만, 여러 면에서 강단 있고 특출났다.  

긴즈버그는 17세 때 코넬대에 전액 장학생으로 입학했다. 이후 그곳에서 만난 마틴 긴즈버그와 고교를 졸업하는 해에 결혼했다. 1년 먼저 졸업한 남편은 결혼 당시 이미 하버드 법대 1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긴즈버그도 법대에 진학할 예정이었으나 남편이 ROTC 장교에 임관하면서 남편의 복무지인 오클라호마로 이주했다. 이때 긴즈버그는 공무원 시험에 합격해 사회연금사무실에서 일을 했다. 

이후 남편의 복무가 끝나고 긴즈버그도 함께 하버드 법대에 진학한다. 그 해 신입생 500명 중 여자는 단 9명이었다. 법대학장은 여학생들을 집으로 초청해 저녁을 먹으며 “왜 굳이 남자들의 자리를 빼앗아 가며 법대에 입학했느냐”고 물을 정도였다. 

긴즈버그가 법대에서 가장 고되고 정신없는 1학년 생활을 보내고 있을 때, 남편이 암 선고를 받게 됐다. 긴즈버그는 항암치료 때문에 학교에 가지 못하는 남편 대신 남편 수업에 들어가 필기를 했다. 동시에 본인 수업에도 계속 참석했다. 당시 긴즈버그에겐 딸아이도 있었다. 그는 수업이 끝나면 집에 돌아와 딸을 돌보며 저녁을 만들었다. 또 다음날이면 수업 준비를 하는 고된 생활을 이어갔다. 

콜롬비아대 수석 졸업

그럼에도 긴즈버그는 1학년을 우수한 성적으로 마쳤다. 2학년 때 그는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학술지 《하버드 로 리뷰》의 편집장이 됐다. 여성 편집장은 그가 최초였다. 긴즈버그는 법대 졸업반인 3학년 때 뉴욕으로 이사를 갔다. 이미 졸업한 남편이 그쪽에 직장을 잡았기 때문이다. 긴즈버그는 콜럼비아대 법대로 학적을 옮긴 뒤 또 《콜럼비아 로 리뷰》의 편집장으로 활동하며 1959년 수석 졸업의 영예를 안았다.

보통 사람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초인적인 능력이다. 항상 최고를 달린 그였지만 세상은 여성 법조인을 맞을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뉴욕 로펌들은 모두 긴즈버그가 여자라는 이유로 채용을 거부했다. 대법관 펠릭스 프랑크푸르터 밑에서 일을 하려고 지원했지만 이마저도 여자라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직장을 찾지 못한 긴즈버그는 한때 로펌 사무장으로 일하기도 했다. 1963년 럿거스 대학의 법학과 교수직에 뽑혔을 때 받아들여야 했던 조건은 남성 교수들보다 월급을 적게 받는다는 것이었다. 

치욕스러운 삶을 견디던 긴즈버그에게 1971년 승리의 기회가 찾아왔다. 당시 아이다호주에서 ‘유언장 집행인은 마땅한 남자 후보자가 없을 때만 여자가 맡을 수 있다’는 법이 위헌인지 묻는 대법원 항소심이 있었다. 이에 긴즈버그는 무료로 서면을 작성했다. 

"만인은 법의 평등한 보호를 받아야 한다" 주장

미국 사법제도는 한국과 달리 관습법 제도를 택하고 있다. 즉 대법원의 판결 한마디에 있던 법이 무효가 되고 새 법이 생긴다. 긴즈버그는 이러한 위상을 지닌 대법원을 움직였다. 성별을 근거로 차별하는 법률은 미국 수정헌법 14조 ‘평등보호’에 위배된다는 판결을 받아낸 것이다. 이로 인해 여성을 공식적으로 차별하던 모든 법률 조항들이 하루아침에 위헌이 됐다. 또 성차별과 관련된 의심이 드는 모든 법은 엄격한 법률적 검토의 대상이 됐다. 

이 일을 계기로 긴즈버그는 여성 인권의 대모로 불렸다. 하지만 그가 비단 여성의 법적 권리만을 위해 싸운 건 아니었다. 그는 만인이 법의 평등한 보호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신념을 토대로 그는 남자가 역차별 당하는 사례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맞서 싸웠다.

1975년 긴즈버그는 ‘생존한 부인은 사망한 남편의 사회연금을 상속받을 수 있으나, 생존한 남편은 사망한 부인의 사회연금을 상속받을 수 없다’는 법이 남성을 차별한다며 위헌이라고 주장했고, 승리했다. 이로써 미국의 연금법도 바뀌게 되었다. 

1970년대는 긴즈버그의 시대였다고 할 만했다. 그는 대법원 항소에서 승승장구했고, 그로 인해 법과 사회가 바뀌었다. 1980년이 됐을 때 긴즈버그는 지미 카터 대통령에 의해 워싱턴DC 항소법원의 판사로 임명된다. 이곳은 엘리트 법조인들이 대법관으로 가기 전의 디딤돌이라 불리는 곳이다. 그리고 1993년 긴즈버그는 빌 클린턴 대통령에 의해 드디어 대법관으로 임명된다. 1981년 미국 최초의 여성 대법관 샌드라 데이 오코노에 이어 두 번째 여성 대법관이 탄생한 순간이다.

미국 대법원의 판결문은 단순한 법조문 해석에 그치지 않는다. 그 자체로 법률이 된다. 때문에 이를 작성하는 대법관은 그 안에 자신의 법철학과 인생 경험을 녹여낸다. 두고두고 회자되는 명문장들이 대법원 판결문에서 쏟아지는 이유다. 긴즈버그가 쓴 판결문 중 세상을 다시 한번 떠들썩하게 바꿔놓은 것이 1996년 VMI 판례다. 이는 모든 남성 학교들이 성차별을 철폐하고 여성 신입생을 받도록 한 내용을 담고 있다. 긴즈버그가 변호사가 아닌 대법관으로서 평등보호의 헌법 가치를 지켜낸 대목이다. 

이 판결문은 원래 긴즈버그가 작성할 것이 아니었다. 14년 전에 최초 여성 대법관 오코노가 작성한 판례를 조금 확대 해석한 것이기 때문에 대법원장은 당사자에게 판결문을 쓰도록 지시했다. 하지만 오코노가 “이는 긴즈버그가 써야 할 판결문입니다”라며 사양했다. 역사에 남을 획기적인 판결문을 본인이 쓰고 싶은 욕망은 모든 대법관에게 있을 터다. 단 오코노는 평등을 위해 평생을 싸운 긴즈버그에게 그 영광이 돌아가야 한다고 믿은 것이다.

후임 놓고 공화당-민주당 줄다리기

긴즈버그는 1999년 대장암 선고를 받은 후 십이지장암, 폐암 등 계속되는 건강상의 문제로 몸이 급속히 쇠약해졌다. 그래도 특유의 정신력으로 운동을 거르지 않았고, 병원에 입원했을 때도 대법원 업무에 차질을 주지 않았다. 그랬던 그는 지난 9월18일 유대인들의 새해 명절인 로슈 하샤나(나팔절) 때 영면에 들었다. 

공화당은 긴즈버그의 시신이 식기도 전에 “11월 대선 이전에 후임을 정하겠다”고 공언했다. 민주당은 “대법관을 새로 정하는 일을 그렇게 서두를 수 없다”며 맞섰다. 이제 살아남은 자들은 긴즈버그가 남기고 간 자리를 자신들의 성향에 맞는 대법관으로 채워 넣으려 ‘혈전’을 벌일 것이다. 

단 긴즈버그가 남긴 것은 대법관 자리 하나뿐만이 아니다. 그는 여자라고 자신을 홀대하던 세상을 바꿨다. 항상 공정성을 법의 최우선의 가치로 삼았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미국 전역에서 마치 아이돌 스타를 추모하는 듯한 행렬이 이어지는 것은, 긴즈버그의 삶이 미국인 모두의 삶을 바꿔 놓았기 때문이다. 여자, 남자, 흑인, 백인, 아시아인, 동성애자, 성전환자. 이들 모두가 긴즈버그가 일평생 추구한 평등 원칙의 수혜를 입게 될 것이다. 평등이란 가치는 남이 아닌 우리 모두를 보호하기 때문이다.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긴즈버그의 업적이다.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연방대법관이 별세한 9월18일(현지시각) 워싱턴DC 연방대법원 청사 앞의 한 추모객이 성소수자의 인권을 상징하는 무지개 깃발을 들고 있다. ⓒ 연합뉴스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연방대법관이 별세한 9월18일(현지시각) 워싱턴DC 연방대법원 청사 앞의 한 추모객이 성소수자의 인권을 상징하는 무지개 깃발을 들고 있다. ⓒ 연합뉴스

 

관련기사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