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명절 쇨 정신없어”…한숨 쉬는 구례 ‘恨가위’
  • 정성환·전용찬 호남본부 기자 (sisa610@sisajournal.com)
  • 승인 2020.09.30 1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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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구례 수재민의 첫 추석 “시름 가득”
180명 임시시설 신세…“차례 엄두 안나”
“올 추석은 일가친척이 찾아와도 달갑지 않아”

지난 8월 초 폭우와 섬진강댐 무단 방류로 큰 피해를 본 전남 구례군 주민들이 풍성해야 할 추석을 앞두고 긴 한숨만 내쉬고 있다. 지난 29일 오후 전남 구례군 구례읍 5일 시장. 시장통 안에서 생선가게를 운영하는 이아무개(63)씨의 얼굴에선 시름이 한가득 묻어났다. ‘추석 경기가 어떻느냐’고 묻자 “손님이 없어 이렇게 앉아 있다”고 했다. 쌀가게를 하는 김아무개(65)씨는 “올해는 코로나19 때문에 가족들이 모여 음식을 먹지 말라고 해서인지 도통 장사가 안 된다”며 “추석에 지내야 할 차례 등은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라고 말했다.

'썰렁한' 구례 5일 시장 ⓒ시사저널 정성환
추석을 불과 이틀 앞뒀지만 명절 대목 특수가 사라져 '썰렁한' 구례 5일시장 ⓒ시사저널 정성환

‘추석 같지 않은 추석’…문 닫은 구례 5일시장

구례읍 5일시장은 정기 장날인 전날 잠깐 문을 열었을 뿐 이날은 일제히 가게 문을 닫아 명절 대목 특수를 잃고 한가했다. 가게 문을 열어봤자 별 소득이 없을 것이란 ‘계산’이 섰기 때문으로 보인다. 시장의 야전 초소격인 상인회 사무실 출입문은 자물쇠로 굳게 잠겨 있었다. 그나마 시장통을 빠져 나와 농협하나로마트 거리에 이르자 추석 상차림을 위해 찾은 사람들로 붐벼 추석 분위기를 느낄 수 있을 뿐이었다.   

이곳 5일시장과 함께 기자들이 몰려들어 수해 피해를 취재하는 곳이 대규모 축산단지인 구례읍 봉서리 양정마을이다. 수해 50여일이 지났지만 마을 농로 주변의 일부 시설하우스는 아직도 엉망이었다. 겨우 비닐만 제거된 상태로 뼈대만 앙상하게 남은 비닐하우스 철제 구조물과 유류저장 탱크가 그대로 방치돼 있었다. 아직 치우지 못한 쓰레기더미도 보였다. 마을은 여전히 수마(水魔)가 할퀸 상처와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전남 구례읍 봉서리 양정마을 입구 농로 주변에 비닐만 제거된 상태로 뼈대만 앙상하게 남은 비닐하우스 철제 구조물과 유류저장 탱크가 그대로 방치돼 있었다. ⓒ시사저널 정성환
전남 구례읍 봉서리 양정마을 입구 농로 주변에 비닐만 제거된 상태로 뼈대만 앙상하게 남은 비닐하우스 철제 구조물과 유류저장 탱크가 그대로 방치돼 있었다. ⓒ시사저널 정성환
전남 구례읍 양정마을 봉성농장 주인 백남례(61)씨가 “겉으론 멀쩡해 보이지만 크고 작은 부상과 기름 물 흡입으로 인해 하루가 멀다하고 소가 죽어나가고 있다”고 하소연 하고 있다. ⓒ시사저널 정성환
전남 구례읍 양정마을 봉성농장 주인 백남례(63)씨가 “겉으론 멀쩡해 보이지만 크고 작은 부상과 기름 물 흡입으로 인해 하루가 멀다하고 소가 죽어나가고 있다”고 하소연 하고 있다. ⓒ시사저널 정성환

양정마을에서 만난 김아무개(61·여)씨는 “전 재산이나 다름없는 소들이 사라졌다”며 “추석은 다가오는데 지붕에 올라간 소들 때문에 집이 붕괴돼 어쩔 수 없이 철거하고 컨테이너에서 생활하고 있다”며 “올 추석은 제사도 명절도 없다. 일가친척이 찾아와도 달갑지 않다”며 “세간살이가 있어야 음식을 장만할 텐데 준비할 겨를이 없다”고 참담한 분위기를 전했다. 서시천 제방 붕괴로 인해 김씨가 애지중지 키우던 한우 5마리가 죽거나 떠내려갔고, 현재 키우는 소는 달랑 2마리다. 그나마 이웃 봉성농장에서 준 1마리와 최근 읍내 한우시장에서 350만원에 1마리를 샀다.

대부분 농가들은 복구 자금이 부족해 애를 태우고 있는 것이다. 전용주(56) 양정마을 이장은 “축산하면서 대부분 억대의 빚을 안고 소를 키우고 있다”며 “축사를 신축하려면 평당 50만~60만원이 드는데 보상이 더뎌 고통이 크다”고 했다. 봉성농장 주인 백남례(61)씨는 “난리가 난 뒤 매일 축사 복구작업에 매달렸지만 폭싹 주저앉은 제2봉성농장은 손도 못 대 언제쯤 원상회복이 될지 막막하다”며 “복구비 마련도 걱정되고 생계를 생각하면 눈앞이 캄캄해 명절 쇨 정신이 어디 있겠느냐”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백씨는 “축사를 신축하고 소를 새로 들이려면 5~6억원은 드는데 어제(28일) 받은 재난지원금 5000만원으로는 택도 없다”고 하소연했다. 

정부는 추석을 사흘 앞두고 28일 수해 피해를 입은 구례지역 1400여세대에 44억원의 재난지원금을 지급했다. 축산농가에 따르면 990㎡ 크기의 축사 1동을 신축하려면 소 입식을 제외하고 5억4000만원 가량 소요된다. 

 

“재난지원금 턱없이 부족…빚내야 할 판”

정치인들의 ‘기획 방문’으로 카메라 앵글이 구례읍 5일시장과 양정마을으로 모아지면서 상대적으로 언론의 관심에서 소외된 농가의 시름도 깊다. 많은 시설농가들은 수해 피해에 비해 재난지원금이 턱없이 부족해 다시 일어설 기력조차 없다. 구례군 마산면에서 30년간 오이를 재배한 임병준(56)씨는 “올해 겨울 농사는 망쳤다”며 “한해 벌어 그 해 먹고 사는데 쌓아둔 돈이 어디 있겠느냐. 현실과 동떨어진 재난지원금 상한선 5000만원으로는 어림없어 다시 농사를 지으려면 빚을 더 내야 할 판”이라고 하소연했다. 농가에 따르면 660㎡ 크기의 비닐하우스 1동을 복구하는데 철제 구조물을 제외하고도 2000만원가량 들어간다. 

전남 구례군 마산면에서 30년간 오이를 재배하고 있는 임경준(55)씨가 “올해 겨울 농사는 망쳤다”며 망연자실하고 있다. ⓒ시사저널 정성환
전남 구례군 마산면에서 30년간 오이를 재배하고 있는 임병준(55)씨가 “올해 겨울 농사는 망쳤다”며 망연자실하고 있다. ⓒ시사저널 정성환

더 큰 문제는, 수해 피해는 어느 정도 응급 복구가 이뤄졌지만 피해 보상은 한 걸음도 나가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주민들은 피해 배상 및 법적·제도적 장치 마련을 촉구하고 있지만 이들 기관이 이렇다 할 답변을 내놓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 수해의 직접적인 원인을 조사할 ‘위원회’ 구성도 난항을 겪고 있어 주민들의 속은 시커멓게 타들어 가고 있다. 

지난 9월19일 구례 집중호우 수해 현장을 찾은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이재민 편에서 댐 무단 방류에 의한 인재 의혹을 규명할 최적의 방법을 찾겠다”고 밝혔지만 수해 원인을 찾기 위한 조사위원회 구성조차 제대로 되지 않고 있다. 이를 반영하듯 구례읍 길목 곳곳에는 환경부와 수자원공사를 규탄하는 현수막이 내걸려 있다. 양정마을 입구에는 ‘환경부와 한국수자원공사는 죽은 소를 살려 내라’고 적힌 검은 깃발이 세워져 있었다. 

전남 구례읍 봉서리 양정마을 입구에는 환경부와 수자원공사를 규탄하는 현수막이 내걸려 있다. ⓒ시사저널 정성환
전남 구례읍 봉서리 양정마을 입구에는 환경부와 수자원공사를 규탄하는 현수막이 내걸려 있다. ⓒ시사저널 정성환
정세균 국무총리가 수해 복구 현장답사를 위해 찾은 9월 26일 오후 구례군 상하수도사업소 앞에서 “천재(天災)인지 인재인지 냉정하게 확인하고 또 공정하고 투명한 조사와 책임규명을 하겠다”고 약속했다. ⓒ시사저널 전용찬
정세균 국무총리가 수해 복구 현장답사를 위해 찾은 9월 26일 오후 구례군 상하수도사업소 앞에서 “천재(天災)인지 인재인지 냉정하게 확인하고 또 공정하고 투명한 조사와 책임규명을 하겠다”고 약속하고 있다. ⓒ시사저널 전용찬

수해 50일 지나도록 원인규명·피해보상 ‘감감무소식’

주민들은 정세균 국무총리가 수해 복구 현장답사를 위해 찾은 9월26일 오후 구례군 상하수도사업소 앞에서 ‘섬진강 수해참사는 인재다. 정부가 100% 배상하라’, ‘구례를 살려달라’는 내용의 현수막을 들고 시위를 벌였다. 정 총리는 이 자리에서 “섬진강댐의 물관리 문제와 관련해 환경부는 적당하게 감추거나 사실을 왜곡하거나 할 생각이 전혀 없다”며 “천재(天災)인지 인재인지 냉정하게 확인하고 또 공정하고 투명한 조사와 책임규명을 하겠다”고 약속했다. 

이을재 구례5일시장 상인회장은 “일상을 되찾기 위해선 많든 적든 신속한 보상이 절실한데 여전히 감감무소식이다”며 “한순간에 생업을 잃은 주민은 추석을 앞두고 생계유지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먼저 보상을 한 뒤 나중에 정산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구례읍은 지난 8월7~8일 내린 폭우와 댐 방류로 섬진강 지류인 서시천 둑이 터지면서 전체 1만 3000가구 중 10%에 달하는 1165가구가 침수 피해를 입었고, 이재민 1318명이 발생했다. 총 1807억원의 재산피해가 났으며 농경지 400여ha가 물에 잠기고, 비닐하우스 546동이 피해를 봤다. 

또 가축 1만5846마리가 죽거나 물에 떠내려갔다. 5일 시장 157개 점포는 모두 2.5m 높이의 물에 잠겼다. 구례군은 상가당 최소 피해액을 평균 3000만원으로 예상했다. 상하수도사업소가 완전히 침수돼 한동안 하수처리 기능이 마비됐고 생태공원, 어류생태관, 종합사회복지관, 문화예술회관, 평생교육원 등 공공시설 67개소도 물에 잠겼다.

현재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 이재민 180여명은 구례군이 빌린 숙박업소나 공공기관 연수시설 등에서 임시 거주 중이다. 이재민들은 문재인 대통령의 지시로 설치 중인 전기와 수도 설비를 갖춘 조립주택 50동에 28일부터 입주해 이곳에서 추석을 보낼 예정이다. “집으로 돌아간 주민 상당수도 불안정한 생활을 하고 있다. 방바닥 습기가 제거되지 않아 축축한 바닥 위에 텐트나 스티로폼을 깔고 생활하는 주민도 있다”고 정영이 구례군 수해피해대책위원회 공동대표는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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