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공정 탈세에 국세청 칼날 날카로워지나
  • 이석 기자 (ls@sisajournal.com)
  • 승인 2020.12.02 10:00
  • 호수 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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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무조사 건수 줄이겠다더니…오뚜기·파라다이스·한독·휠라홀딩스 등에 잇달아 칼날 들이대

“올해 세무조사 건수를 지난해보다 2000여 건 감소한 1만4000건으로 축소하겠다.” 지난 8월21일 취임한 김대지 국세청장의 취임 일성이었다. 코로나19 팬데믹(대유행)으로 국내 기업들은 물론이고, 소상공인이나 자영업자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 점을 고려한 발언이었다.

9월15일 김 청장 취임 이후 처음 열린 전국 세무관서장 회의에서도 이 같은 기조는 유지됐다. 이전까지 국세청이 발표한 국세행정 운영방안 세무조사 파트에는 ‘대기업, 대재산가’가 가장 먼저 언급됐다. 대기업의 불법 자금 유출이나 비자금 조성, 대재산가의 편법 상속·증여 행위를 엄단하겠다는 얘기였다. 하지만 김 청장 취임 후 발표된 국세행정 운영방안에는 ‘대기업, 대재산가’ 대신 ‘민생침해 탈세 및 부동산 탈세’와 ‘다국적기업 탈세’ 등이 우선적으로 언급됐다.

김대지 국세청장이 9월15일 오전 세종시 나성동 국세청에서 열린 전국 관서장 회의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올해 세무조사, 지난해보다 2000건 감소?

실제로 김 청장 취임 후 가장 먼저 시작한 기획조사도 다국적기업 21곳에 대한 세무조사였다. 국세청은 지난 8월말 요기요(딜리버리히어로코리아)와 넷플릭스 한국법인 등에 대한 세무조사에 착수했다. 국내에서 벌어들인 막대한 소득을 정당한 세금 납부 없이 해외로 이전한 정황이 국세청에 포착됐기 때문이다.

특히 배달앱 요기요와 배달통 등을 운영하는 독일의 딜리버리히어로는 최근 국내 1위 배달앱인 배달의민족(우아한형제들)에 대한 M&A(인수·합병)에 성공하면서 독과점 논란에 휩싸였다. 현재 공정위의 기업결합 심사가 진행 중이다. 이 심사를 통과하면 독일 업체가 국내 1, 2, 3위 배달앱 시장을 싹쓸이하게 된다. 이런 와중에 국세청의 강도 높은 세무조사가 진행되면서 업계의 이목이 집중됐다. 

국세청은 미국에 본사를 둔 넷플릭스가 한국법인을 통해 조세를 회피했는지도 유심히 살펴보고 있다. 국내 자회사가 거액의 경영 자문료를 지급하는 방식으로 적자를 낸 후 법인세를 내지 않고 수익을 미국으로 이전했는지 여부가 현재 조사의 관건이다.

재계에서는 국내 최대 슈즈 멀티스토어를 운영하는 ABC마트에 대한 세무조사도 연장선으로 보고 있다. 국세청은 11월초 서울 중구 을지로에 위치한 ABC마트코리아 본사에 국제거래조사국 인력을 투입해 세무장부 등을 확보했다. ABC마트코리아 측은 언론에 “정기 세무조사 성격”이라고 밝혔다. 통상 기업의 정기 세무조사는 4~5년 주기로 실시된다. ABC마트코리아가 2016년 세무조사를 받은 만큼 정기 세무조사일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다른 시각도 나오고 있다. ABC마트코리아의 지분 99.96%는 현재 일본 본사인 ABC-MART, INC가 보유하고 있다. 이 때문에 ABC마트코리아는 매년 거액의 브랜드 로열티와 배당금을 일본 본사에 송금하면서 국부 유출 논란을 빚었다. 유통업계의 한 관계자는 “지난해 아베 정부의 기습적인 수출규제 조치로 일본 불매운동이 확산됐지만 ABC마트의 실적은 오히려 상승했다”면서 “국세청이 다국적기업의 역외탈세 혐의를 집중 점검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나왔을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문제는 다른 기업들을 상대로도 무차별적인 세무조사가 진행되고 있다는 점이다. 삼성전자와 오뚜기, 파라다이스그룹, 한독(옛 한독약품), 휠라홀딩스, NH캐피탈 등 기업의 규모나 업종도 다양하다. 지난해 말 국세청의 강도 높은 세무조사를 받았던 LIG그룹의 경우 최근 검찰에 고발당해 본사가 압수수색을 받기도 했다.

 

역대 청장들의 ‘세무조사 축소’ 립서비스 뒷말

물론 삼성전자와 NH캐피탈 등 일부는 정기 세무조사 성격으로 파악되고 있다. 하지만 오뚜기와 파라다이스그룹, 한독, 휠라홀딩스 등의 세무조사 주체는 ‘재계 저승사자’로 불리는 서울지방국세청 조사4국이다. 일부는 오너 일가까지 조사 대상에 포함된 것으로 알려지면서 볼멘소리가 터져나오고 있다. 한 재계 관계자는 “코로나19 확산으로 경영 불확실성이 커지고 실적 역시 악화되면서 정기 세무조사도 부담스러운 상황”이라면서 “기업들에 대한 동시다발적인 특별 세무조사는 이해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실제로 한국경제연구원이 최근 발표한 ‘KERI 경제동향과 전망’에 따르면 올해 한국의 경제성장률은 IMF 외환위기 이후 최저치인 2.7%를 기록할 것으로 예상된다. 정부는 코로나19 극복을 위해 추경예산 편성과 함께 금융지원 등의 지원책을 발표했다. 국세청 역시 코로나로 어려움을 겪는 기업에 대해 부가세 납부기한 연장과 세무조사 유예 등의 지원을 약속했다. 이런 상황에서 기업에 대한 세무조사를 확대하면서 뒷말이 나오고 있는 것이다.

국세청 주변에서는 역대 국세청장들의 ‘세무조사 축소’ 발언에 주목하고 있다. 김대지 신임 청장과 마찬가지로 역대 국세청장들은 취임 때마다 세무조사 축소 의지를 내비쳤다. 하지만 실제 세무조사 건수에는 사실상 변동이 없었다. 2017년 6월 취임한 한승희 청장(22대)은 시간 날 때마다 세무조사 건수 축소 계획을 밝혔지만, 재임 기간인 2017~19년 세무조사는 1만6713건에서 1만6008건으로 700여 건 줄어드는 데 그쳤다.

법인사업자에 대한 세무조사도 마찬가지다. 이 기간 법인사업자에 대한 세무조사는 5147건(2017년)→4795건(2018년)→4602건(2019년)으로 각각 352건과 193건 감소했다. 매출 5000억원 이상인 중견 및 대기업의 경우 세무조사 건수가 130건(2017년)→169건(2018년)→213건(2019년)으로 오히려 증가했다.

전임 김현준 청장(23대) 때도 마찬가지였다. 김 청장은 취임식에서 세무조사 건수와 함께 비정기 세무조사(특별 세무조사) 축소를 약속했지만 ‘립서비스’에 불과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이번에는 다르겠지”라고 믿었던 기업들은 김대지 청장(24대) 취임 이후 동시다발적인 세무조사가 진행되면서 또다시 고개를 떨궈야 했다. 한 기업 관계자는 “새로운 국세청장이 취임할 때마다 ‘납세자들이 경제활동에 전념할 수 있게 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전혀 지켜지지 않았다. 이럴 거면 뭐 하러 세무조사 축소를 외치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꼬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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