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업한 벽돌공장이 평화 문화 공간 되기까지 [김지나의 문화로 도시읽기]
  • 김지나 도시문화칼럼니스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0.12.25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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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도 아픔도 그대로 보여주는 곳, 경기 연천군 ‘DMZ피스브릭하우스’

경기도 연천군에 특별한 벽돌공장이 문을 열었다. 이름은 ‘DMZ피스브릭하우스’. 본래 이곳은 주식회사 신중앙요업의 벽돌공장이었다. 전곡읍 은대리에 위치해 ‘전곡공장’이라고 불렸던 이 벽돌공장은 2001년 폐업의 수순을 밟게 됐고, 이후 약 20년의 세월동안 그저 방치돼 있었다 한다. 그러다 올해 6월 연천군에서 이 공장부지 일대를 야심차게 매입하면서 미묘한 변화가 시작되고 있었다.

경기도 연천군 은대리에 남아 있는 신중앙요업의 벽돌공장. '신중앙요업'이란 글자가 아직 공장기둥에 남아 있다. ⓒ김지나
경기도 연천군 은대리에 남아 있는 신중앙요업의 벽돌공장. '신중앙요업'이란 글자가 아직 공장기둥에 남아 있다. ⓒ김지나

DMZ피스브릭하우스의 최종 목적지는 연천군을, 그리고 조금 더 욕심을 부려 DMZ 접경지역을 대표하는 복합문화공간으로의 재탄생이다. 그러나 버려진 공장을 군에서 큰 예산을 들여 사들였다는 소식은 기대만큼 우려도 동시에 고조시켰다. 실제로, 부지매입 이후로 이렇다 할 리모델링이 이루어지지 않은 탓에 거대한 폐건물을 그냥 방치해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사실이었다.

벽면보수라든가, 환기시설 설치라든가, 화장실 확충이라든가, 으레 예상되는 리모델링 공사는 없었다. 대신 연천군에서는 공장에 남아 있는 오래된 액자나 서류들, 무성하게 자라나 공장 건물 안까지 기웃거리고 있던 나뭇가지 따위를 기록하고 수집했다. 대충 청소만 한듯한 공간에 아티스트들이 모여 연주를 하고 작품을 전시했다. 하지만 아직 이곳은 여전히 ‘신중앙요업 벽돌공장’이었다.

11월 한달간 신중앙요업 벽돌공장에서는 '2020 지구라트 아트 페스티벌(Ziggurat Art Festival, ZAF)'이란 이름으로 전시회가 열렸다. ⓒ김지나
11월 한달간 신중앙요업 벽돌공장에서는 '2020 지구라트 아트 페스티벌(Ziggurat Art Festival, ZAF)'이란 이름으로 전시회가 열렸다. ⓒ김지나

공간이 바뀌는 과정 그대로 공개

그렇게 뭔가가 바뀌기 시작했음을 알리는 첫 번째 전시가 지난 11월 말까지 열렸다. 2020 ZAF 예술제라는 이름이 독특하기도, 생소하기도 하다. ZAF는 지구라트 아트 페스티벌(Ziggurat Art Festival)의 줄임말이다.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벽돌로 만들어진 성탑을 일컫는 ‘지구라트’의 이름을 차용했다고 한다. 공장건물에서 수집된 잡동사니들과 기록영상은 ‘아카이브 267’이라는 제목으로 ZAF 예술제의 한 부분을 장식하기도 했다. 역사가 그렇게 오래되지도, 특별한 사건이 있었던 것도 아닌 낡은 공장의 옛 파편들이 무슨 ‘아트’가 될 수 있을지 의구심이 들 법도 하다.

어쨌든 덕분에 주민들과 방문객들은 폐공장이 DMZ와 평화를 의미하는 문화공간으로 재생되는 과정 전체를 느긋하게 지켜보게 됐다. 뭐든 빠르게 새것으로 단장시키는 데 익숙한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드문 광경이다. 보통은 이미 다 완성된 공간이 어느 날 갑자기 짠하고 공개되며 ‘여기가 예전에 어떠어떠한 산업시설이었대’라는 이야기만 신기루처럼 남아 있기 마련이었지만, 이곳은 달랐다. 과거를 직접 목격할 기회가 있고, 앞으로의 변화를 상상해볼 여지가 주어졌다.

신중앙요업 벽돌공장 주변은 평범한 농촌마을의 풍경이었다. 아직 내비게이션에 제대로 나오지도 않는다. 그런 곳에 겉모습만 번듯한 대규모 문화시설이 들어선들 무슨 변화를 기대할 수 있을까. 말끔하게 단장됐다고 해서 좋은 문화예술 공간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걸 보여주는 사례들이 이미 수 없이 많다. 리모델링을 서둘러 그럴듯한 외관을 완성해 놓는 것보다 주민들과 함께 이 공간의 과거와 미래를 함께 그려보는 시간들이 더 중요한 이유다.

'DMZ피스브릭하우스'로 변화할 신중앙요업의 벽돌공장은 아직 본격적인 건물 리모델링이 진행되지 않아 옛 공장의 흔적들을 실감나게 볼 수 있다. ⓒ김지나
'DMZ피스브릭하우스'로 변화할 신중앙요업의 벽돌공장은 아직 본격적인 건물 리모델링이 진행되지 않아 옛 공장의 흔적들을 실감나게 볼 수 있다. ⓒ김지나

섣부르지 않게 진짜 평화를 보여주는 곳

‘지구라트 아트 페스티벌’이란 이름에는 벽돌로 만들어졌다는 단순한 공통점 이외에, 지구라트처럼 거대하고 역사적인 장소가 되겠다는 포부가 담겨 있는 듯하다. 80년대 후반에 문을 열었다가 20년을 채우지 못하고 폐업한 벽돌공장을 ‘지구라트’로 만드는 것은 누가 되어야 할까. 주민들은 그저 가만히 앉아서 지자체가 완벽한 문화시설을 만들어 내놓을 때까지 기다리기만 해도 좋은 건 아닐 것이다.

DMZ 접경지역에는 균형발전이란 명목으로 엄청난 예산이 투입되고 있지만, 맥락 없이 거대한 하드웨어를 지어놓고 ‘평화’란 이름을 붙이는 식의 일들이 비일비재하다. 마치 그런 단어가 들어가면 수 십 년간 이 지역을 집어삼키고 있는 소외의 그림자를 단숨에 지워버릴 수 있을 듯이 말이다.

희미해져 가는 한국전쟁의 상처, 산발적으로 남아 있는 지난 역사의 흔적들, 시간이 멈춘 듯한 풍경으로 점철된 이곳의 진짜 평화는 그런 네이밍만으로 실현시킬 수 없다. 섣부르지 않는 신중앙요업 벽돌공장의 시도가 그래서 반갑다. ‘DMZ피스브릭하우스’로의 변화는 이제부터 시작이며, 그 과정을 만드는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연천군민들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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