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松江 정철’ 딜레마 빠진 담양 송강고…현판 못 단 채 개교
  • 정성환·배윤영 호남본부 기자 (sisa610@sisajournal.com)
  • 승인 2021.03.03 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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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1호 공립대안학교 교명 부적절 논란…정철 호 송강 딴 교명 ‘역사 논쟁’으로 비화
광산이씨 종친회 등 반발, 교명 변경 요구

전남 담양의 송강고등학교가 2일 정식으로 개교했다. 광주·전남지역에 기숙형 공립 대안학교가 생긴 것은 처음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정문에 교명 명판(현판)을 달지 못한 채 문을 열었다. 학교는 완성됐지만 정작 학교 얼굴은 아직 없는 셈이다. 

최근 펼쳐진 학교 명칭 논란의 여파다. 송강(松江) 정철의 호가 들어간 교명을 둘러싼 논란이 역사논쟁으로까지 번져 ‘송강 정철 딜레마’에 빠진 것이다. 진퇴양난이다. ‘송강고’를 품자니 반대 여론이 워낙 높고, 개교한 이제 와서 개명하기에는 다소 때를 놓친 느낌이다.

3월 2일 개교한 전남 1호 공립대안학교인 담양의 송강고등학교 교문 현판 자리가 비어있다. ⓒ시사저널 정성환
3월 2일 개교한 전남 1호 공립대안학교인 담양의 송강고등학교 교문 현판 자리가 비어있다. ⓒ시사저널 정성환

‘송강의 불편한 진실’…교명서 퇴출 위기 

앞서 전남도교육청은 지난해 7월 전남 첫 공립대안학교 교명 공모를 통해 ‘송강고등학교’로 확정했다. 당시 교육청은 교명에 대해 우리나라 수종을 대표하는 소나무처럼 학생들이 곧고 푸르기를 바란다는 뜻의 ‘송(松)’과 강물처럼 자유로운 사고를 지니기를 희망하는 ‘강(江)’을 의미한다고 설명했다. 또 ‘송강’은 학교 주변에 흐르는 증암천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고 덧붙였다.

문제는 전혀 다른 방향에서 터졌다. 전남교육청의 설명과 달리 대부분 사람들이 교명에서 소나무와 강물이 아닌 송강 정철을 먼저 떠올리면서 정철 호 차용과 그로 인한 부적절성 논란이 벌어졌다. 송강은 정치인보다는 문인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한국 국문학사에서는 그를 관동별곡, 성산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 등을 남긴 가사문학의 대가로 칭송하고 있다. 

하지만 역사학계 내부에서는 송강은 정적에게 가혹했던 정치가로도 평가되는 인물이다. 송강 정철이 당대의 호남 학자 1000명을 죽음으로 내몬 잔혹한 정치인이자, 서인의 당수로 당파 이익에 골몰했다는 주장이다. 이에 향토사학자들과 일부 종친회를 중심으로 교명인 ‘송강고등학교’에 대한 반대 주장이 제기됐다. 송강의 사상과 업적은 뒤로 하고, 배움의 길·인간관계를 놓고 본다면 전남교육청이 설립하는 공립 대안학교의 ‘교명’으로는 부적절하다는 것이다.

 

“정철 호 왜 차용하나” vs “마을 하천서 이름 따와”

여론도 부정적이다. 전남교육청 홈페이지 청원마당에는 지난해 12월부터 송강고의 명칭을 반대하는 내용의 청원글이 30여 건 올라왔다. 청원인들은 “송강은 문장을 꾸미는 재주는 있었으나 인격적으로 본받을만한 인물이 아니기에 송강이라는 이름을 학교명으로 사용해서는 안된다”면서 “공모 절차를 다시 밟아 전남도민 모두가 인정하고 수용할 수 있는 명칭으로 변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마침내 일부 종친회가 정철의 호 ‘송강(松江)’을 딴 학교 명칭이 부적절하다고 이의를 제기하면서 그의 기축옥사 당시 행적을 거론해 역사논쟁으로까지 비화됐다.

광산 이씨, 나주 나씨, 문화 류씨, 고성 정씨, 전주 이씨, 창영 조씨 등 6개 문중 종친회장들은 1월 4일 보도자료를 내고 “송강 정철이 조선 선조의 재임 시기인 기축년(1589년) 위관(우의정)의 직책을 맡을 때 호남의 인재가 처형당하고 화를 입은 사실(기축옥사)이 있다”며 정철의 호를 따 공립대안학교 명칭을 부여한 것은 잘못됐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전남교육청과 전남도의회, 담양군에 교명 개명을 요구하는 공문을 보냈다.

2일 오후, 송강고 교정에서 시사저널과 만난 광산이씨 종친회 이남원 사무국장은 “추호도 송강에 대한 나쁜 감정의 발로에서 학교 명칭을 문제 삼는 것은 아니다”며 “비록 뒤늦게나마 역사적 사실을 바로 알리겠다는 ‘6문’(6개 종친회)의 진심을 이해해줬으면 좋겠다”고 가해자에 대한 보복 논란으로 확대되는 것을 경계했다.

그는 이어 “학교 명칭에 인명을 사용하려면 만세의 사표가 될 만한 인물을 골라야 하는데 아무리 자료를 뒤져봐도 사표로서 송강의 행적을 찾을 수 없었다”며 “논란이 있는 인물의 이름을 다른 곳도 아닌 교육현장에서 쓰는 건 두고두고 문제가 될 것이다.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교명을 바꾸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강조했다. 

3월 2일 오후 전남 담양 송강고등학교 교정에서 광산이씨 종친회 이남원(오른쪽) 사무국장이 “송강고 교명을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바꾸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시사저널 정성환
3월 2일 오후 전남 담양 송강고등학교 교정에서 광산이씨 종친회 이남원(오른쪽) 사무국장이 “송강고 교명을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바꾸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시사저널 정성환

전남교육청·학교 측 “당혹…교명 바꿀 여지 있어”

이에 대해 전남교육청은 송강고등학교 명칭은 정철의 호 ‘송강’을 딴 게 아니라 학교가 들어설 주변 하천의 이름을 딴 것이라는 입장이다. 도교육청 관계자는 “본래 취지와 달리 역사적 논쟁으로 이어져 당혹스럽다”며 “3월 개교한 뒤 학교장이 학생들의 의견을 청취해 교명을 바꿀 수는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송강고 선명완 교장은 “교명이 사회적으로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어 여러 가지로 궁리 중에 있다”며 “2~3학년이 다 채워지면 학생들에게 전후 사정을 충분히 설명한 뒤 의견을 청취해 결정하겠다”고 말했다. 선 교장은 “(교명 변경에 대비해) 교체가 쉽지 않은 교문 현판 등 영구시설물은 일부러 제작하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송강 후손 “역사적 인물에 대한 사자명예훼손” 반발

조선시대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서인 진영에 속했던 송강 정철은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선조 17년(1584년) 동인의 탄핵을 받아 대사헌직에서 물러난 후 담양군 고서면에 초막(죽록정·이후 후손들이 정자 이름을 송강정으로 지었음)을 짓고 지냈다. ‘정여립의 난’이 불러온 이른바 기축옥사(己丑獄事)로 동인 1000여 명이 화를 당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임진왜란으로 당시 국문 기록 등이 사라져 정철의 기축옥사 당시 행적은 학계에서도 이견이 분분하다. 

송강 정철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놓고 논란이 일자 정철의 후손들도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한 후손은 “정철이 기축옥사 때 전라도인을 1000명 넘게 죽였다는 내용은 터무니없고 ‘사자명예훼손’이나 다름없다”면서 “그동안 송강 정철에 대한 역사적 왜곡과 폄훼 등이 많았다. 이제는 후손으로서 더 이상 좌시할 수 없다. 잘못된 내용으로 조상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일이 발생한다면 법적 소송도 마다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한편 송강고는 광주와 가까운 담양군 봉산면 양지리 옛 봉산초 양지분교에 교육부 특별교부금 40억원, 전남도교육청 예산 28억원, 담양군청 예산 10억원 등 총 78억원을 재원으로 설립됐다. 올해 첫 신입생 25명을 받았다. 2~3학년은 조만간 전학생과 편입생으로 채울 예정이다. 교과중심의 교육에서 벗어나 진로교육과 체험학습 등을 중심으로 교육과정이 운영된다.

담양 송강고등학교 교정 ⓒ시사저널 정성환
담양 송강고등학교 교정 ⓒ시사저널 정성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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