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차 산업혁명’ 구호는 있어도 ‘정책’이 없다 [김상철의 경제 톺아보기]
  • 김상철 경제 칼럼니스트(전 MBC 논설위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1.03.30 10:00
  • 호수 1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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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변하는 디지털 환경과 낡은 아날로그 정책 간 괴리 극복 시급

지난 3월17일,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에서 여야는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제출한 4차 추가경정예산안의 단기 일자리 사업을 두고 공방을 벌였다. 과기정통부는 이날 1327억원 규모의 추경예산안을 제출했다. 추경예산안에는 데이터 엔지니어 1000명을 포함해 디지털 일자리라며 모두 2200명의 고용을 위한 일자리 사업 예산이 담겼다. 모두 고용기간이 6개월 미만에 불과한 단기 일자리였다. 그럴듯한 이름과는 달리 최저임금을 받으면서 단순히 기초 수준의 데이터를 입력하는 단기직이었던 것이다.

2019년 3월21일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린 제2회 대한민국 지방정부 일자리정책 박람회에서 관람객들이 부스를 돌아보고 있다.ⓒ뉴시스
2019년 3월21일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린 제2회 대한민국 지방정부 일자리정책 박람회에서 관람객들이 부스를 돌아보고 있다.ⓒ뉴시스

청년 학습 도우미가 디지털 일자리?

정부가 추경예산안을 편성하면서 구상한 ‘청년층을 위한 디지털 일자리’의 예로는 온라인 튜터도 있다. 정부 추산 4000명 정도가 종사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는 이 직종은 청년들이 저소득층 어린이들을 위한 비대면 교육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다. 청년 학습 도우미 한 명이 아동 3명을 밀착 컨설팅하게 한다는 계획인데, 이걸 디지털 일자리라고 하는 이유는 오로지 온라인으로 진행하기 때문이다. 코로나19라는 특수한 사정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이른바 4차 산업혁명에 대응한다는 정부의 일자리 대책은 획기적이지도 않고 체계적인 것과도 거리가 멀다.

정부가 4차 산업혁명 종합대책을 발표한 것은 2017년이었다. 21개 부처가 합동으로 작업하고 4차산업혁명위원회 논의를 거쳐 의결된 것이 ‘혁신성장을 위한 사람 중심의 4차 산업혁명 대응계획’이었다. 당시에도 과거 각 부처에서 이미 조금씩 나왔던 대책들을 다시 모은 수준에 불과하다는 지적을 받았다. 하지만 거창한 제목을 붙여 발표한 대응계획에 그나마 고용 대책이라고 할 만한 내용은 없었다. 그저 4차 산업혁명으로 인한 고용 변화에 선제 대응해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하는 기회로 활용한다는 정도가 전부였다.

혁신의 확산은 생산성 향상과 경제 회복의 원동력이 될 수 있다. 그러나 혁명적인 신기술은 전통적인 기술을 와해시킨다. 인공지능(AI)과 빅데이터, 클라우드, 사물인터넷(IoT), 가상현실(VR), 바이오, 자율주행차, 양자컴퓨팅 등 흔히 말하는 미래기술은 자금과 인재를 빨아들이는 블랙홀이다. 기계적이고 반복적인 일을 하는 블루칼라의 일자리만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4차 산업혁명의 진전은 신산업 창출 및 신규 일자리 생성과 기존 산업의 일자리 감소를 동시에 가져온다. 경제사회 전반에 기회와 위기가 동시에 발생할 수 있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모든 국가는 정부의 역할을 재정의해야 한다. 정부는 혁신을 준비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혁신의 부작용을 줄여야 한다. 일자리가 우려하는 만큼 크게 줄지 않는다고 해도 일자리 구성 요소의 변화나 취약한 고용 형태의 확산, 이와 관련된 임금 및 소득의 불평등, 그리고 이로 인한 노사관계의 불안정성은 피하기 어려울 것으로 전망된다.

정부가 할 일은 크게 세 가지다. 4차 산업혁명을 주도하는 신산업 육성을 통해 새로운 일자리를 만드는 일과 기존 산업에 대한 혁신을 통해 일자리가 유지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일, 그리고 사회 구성원들이 일자리 변화와 달라진 노동환경에 유연하게 적응할 수 있도록 돕고 제도적 기반을 구축하는 일이다. 여기에는 당연히 디지털 기술 혁신에 따른 일자리 취약계층을 지원하는 사회적 보호 시스템도 포함된다.

4차 산업혁명의 파괴적 혁신에 따른 시장의 변화에 노출된 국가들은 일자리 감축과 노동 내용의 변화에 따른 대책 마련에 부심하고 있다. 독일은 ‘Industrie 4.0’의 시행을 일자리 파괴로 의심하는 노동계의 우려와 반발에 대응하기 위해 정부 차원에서 ‘노동(Arbeit) 4.0’ 프로젝트를 2015년부터 추진해 왔다. 노동 4.0의 목표는 노동자 참여를 늘려 기업의 혁신을 유도하고 이를 토대로 경제의 성장 잠재력을 키우자는 것이다. 노동인구에게 지속적인 교육 기회를 제공하고, 변화하는 환경에 노동자들이 적응할 수 있도록 생애주기 모형을 토대로 사회보험 확대 등 사회보장성과 유연성 강화를 동시에 추구하는 것이 핵심이다.

독일이 변화에 대응하는 사회적 기반 구축과 제도를 마련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면 미국은 교육훈련을 통한 인력 양성으로 혁신 능력을 높이는 데 주력한다. 민간기업 주도로 혁신이 이뤄지는 미국의 경우 4차 산업혁명에 대비하기 위한 정부의 종합대책이 없다. 미국 정부는 제조기술 혁신을 통해 제조업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 중점 육성 분야를 선정해 왔다. 특히 벤처기업 육성을 위한 오바마 정부의 ‘Startup America Initiative’는 벤처기업의 창업과 일자리 창출 지원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기 위한 것이었다.

2015년에는 4차 산업혁명의 일자리 대책과 관련해 정보기술 관련 일자리를 늘리기 위한 ‘테크하이어(TechHire)’ 프로젝트를 발표하기도 했다. 프로젝트는 학교와 민간기업, 정부가 협력해 IT 부문의 기술훈련을 시민에게 제공하고 인력이 필요한 기업에 훈련된 노동력을 공급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양질의 일자리 창출을 통해 중산층의 소득을 높이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트럼프 정부도 2017년 교육기관과 기업들의 협력으로 독일식 도제제도(Apprenticeship)를 도입하고 프로젝트에 2억 달러의 예산을 투입했다. 학자금 부담을 줄여주고, 대중 개방형 온라인 과정을 통한 일반인의 평생교육 기회를 확대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4차 산업혁명의 시작은 ‘기업 혁명’

4차 산업혁명의 승자가 되기 위한 국가 간 패권 경쟁이 치열하다. 미래기술 주도권을 확보하려는 자국 이익 우선주의가 득세한다. 많은 나라가 과감한 규제 완화와 기술개발 투자 지원으로 민간부문의 혁신을 촉진하고 있다. 새로운 산업의 변화를 이끄는 힘은 결국 기업의 혁신에서 비롯된다. 민간부문의 역동성을 회복시키는 일이 급하다. 하지만 기술의 발달은 기업 형태, 생산방식, 직무 내용 및 일하는 방식, 고용 형태 등 다양한 변화로 이어져 노동시장과 개인의 삶 전반을 바꿔놓는다. ‘초연결 사회’를 특징으로 하는 4차 산업혁명 시대에는 유연한 노동(flexible labor)이 대세로 자리 잡게 된다. 비정규직을 없애겠다는 단순한 발상에서 벗어나 새로운 고용 형태의 노동자들을 위한 제도와 규범이 필요할 것이다.

다보스포럼 보고서는 4차 산업혁명으로 노동시장이 파괴돼 대량실업이 불가피하고 경제적 불평등도 심화될 수밖에 없다며 정부와 기업이 서둘러 교육과 고용 정책을 혁신할 것을 주문했다. 4차 산업혁명으로 인한 노동환경의 다양성과 불확실성은 계속 증가할 것이다. 정부는 장기적 비전을 담은 시선으로 시장을 지원하면서 또 그 이면에서 불거질 고용과 복지의 사각지대를 최소화하는 데 정책의 초점을 맞춰야 한다. 빠르게 변화하고 있는 디지털 환경과 낡은 아날로그 정책 간 괴리를 극복하기 위한 법과 제도의 정비는 필수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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