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쉐 장군, 수치 여사 기운 누르려 미얀마 전국에 짯수삔 나무 심어
  • 조용경 여행작가 (chunyg@sisajournal.com)
  • 승인 2021.03.26 14:00
  • 호수 1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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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웅산 수치와 세 명의 미얀마 정치군인
민 아웅 흘라잉은 군부 회사의 회장…자식들은 건설·보험사 소유

2021년 2월1일 새벽, 미얀마 군부가 세 번째 쿠데타를 일으켰다. 1962년, 1990년에 이은 이번 쿠데타는 자유민주주의를 향한 미얀마인의 열망도 함께 짓밟아버렸다. 미얀마의 운명은 왜 이렇게 기구한가. 미얀마 상황을 이해하려면 알아야 할 다섯 가지 키워드가 있다. 독립의 영웅 아웅산 장군(Bogyoke Aung San)과 그의 딸 아웅산 수치 여사, 그리고 세 차례 쿠데타의 주역인 네윈(Ne Win), 탄쉐(Than Shwe), 민 아웅 흘라잉(Min Aung Hlaing)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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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2월2일 야당 지도자인 아웅산 수치 여사와 미얀마 군통수권자인 민 아웅 흘라잉 장군이 네피도에서열린 회담에서 악수를 하고 있다.ⓒAP 연합

독립 영웅 아웅산 장군 , 정적에 피살

아웅산(1915.2~1947.7) 장군은 미얀마(버마)의 독립운동을 이끈 국민적 영웅이다. 그는 1936년 명문 랑군(양곤)대학을 졸업하고, 민족주의 조직인 ‘우리 버마인 연맹(Dobama Asi Ayone)’에 가입해 총서기가 되었다.

1941년 봄 그는 ‘30명의 동지들(Thirty Commrades)’과 함께 하이난(海南) 일본군관학교에서 군사교육을 받았으며, 1942년 1월 일본군과 함께 미얀마로 진격해 영국 군대와 전투를 벌였다.

1942년 일본의 꼭두각시 정부인 버마 임시정부(1943~1945) 국방장관이 되지만 뒤늦게 일본의 속셈을 알아차리고, 1944년 8월 이후에는 일본군과 싸운다. 1945년 일본의 항복 이후 아웅산은 1947년 영국 총리와의 담판을 통해 ‘1948년 1월에 버마를 독립시킨다’는 협정을 이끌어내지만, 7월19일 그는 정적들의 흉탄에 쓰러졌다.

그리고 버마는 1948년 1월4일, ‘버마 연방(Union of Burma)’으로 국제무대에 등장하게 된다. 연방의 초대 총리로 우누(U Nu)가 선임되어 계속 집권하다가 1962년, 네윈의 쿠데타에 의해 축출당하게 된다. 1911년에 태어난 네윈의 원래 이름은 슈마웅(Shu Maung)인데, 그는 랑군대학을 중퇴하고 아웅산이 이끌던 ‘우리 버마인 연맹(Dobama Asi Ayone)’에 가입한다.

 

첫 쿠데타 군인 네윈 , 나라 황폐화시켜

1941년 2월 아웅산 휘하의 ‘30명의 동지들’의 일원으로 하이난 군관학교에서 군사훈련을 받았으며, 아웅산과 함께 영국군과 싸운다. 이때 그는 네윈(Ne Win·빛나는 태양)으로 개명했다. 네윈은 1949년 국방장관, 1958년에는 총리권한대행이 되었으나, 1962년 3월 쿠데타를 일으켜 버마사회주의계획당(BSPP)을 창당해 권력을 장악했다. 그는 식민지 시절부터 미얀마의 농민·불교도들과 견원지간인 로힝야족의 재산을 몰수하고 서북쪽 라카인주 ‘난민캠프’로 추방해 불교도의 호응을 받았다.

1974년 대통령이 되었으며, 1981년 대통령직 사임 후 버마사회주의 계획당 의장으로서 1988년까지 국정 실세로 군림했다. 네윈은 사회주의라는 이름으로 토지와 기업을 국유화하고, 고립주의를 지향했다. 민족주의를 명분으로 ‘영어교육 철폐’ 등 우민화 정책을 시행해 교육을 황폐화시키고 경제는 악화일로를 걸었다. 60년대 초까지 아시아의 부국이었던 버마가 최빈국으로 전락하게 되자, 1988년 국민의 불만이 활화산처럼 폭발한다. 이때 반군부 세력의 구심점으로 등장한 인물이 바로 ‘아웅산 수치’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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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월4일 미얀마 군정 최고책임자인 탄쉐 장군이 독립기념일 만찬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AP 연합

수치 , 1988년 민중항쟁 지도자로 부상

‘아웅산 수치(Aung San Suu Kyi)’는 1945년 6월19일 아웅산 장군과 킨치(Khin Kyi) 여사의 막내로 태어났다. 인도 대사인 어머니 곁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수치는, 15세 때 영국으로 가 옥스퍼드대학에서 수학했으며, 1972년 ‘마이클 애리스’와 결혼해 두 아들을 낳은 후 1988년 봄 킨치 여사의 병간호를 위해 버마로 돌아왔다. 얼마 뒤 1988년 8월8일, 랑군의 대학생과 승려들이 일으킨 ‘8888 민중항쟁’이 발생했다. 아웅산 수치는 민주 세력의 간곡한 요청에 따라, 야당 세력을 결집한 민주주의민족동맹(NLD·National League for Democracy)을 창당하고 고달픈 민주투사의 길에 들어서게 된다.

‘8888 항쟁’은 8월18일 네윈 정권의 2인자 ‘소마웅(Saw Maung)’ 장군이 이끄는 국가법질서회복위원회(SLORC)가 국가 전권을 장악하면서 3000명 이상의 대학생, 승려, 시민의 희생을 남기고 수습되었다. 막강한 권력자 네윈은 8월18일 군부의 2인자인 소마웅이 전면에 등장하면서 모든 직책에서 퇴임한다는 발표를 한다.

8월8일의 봉기 이후 약 2주 동안 최고권력자 네윈과 2인자 소마웅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 그때부터 네윈은 2002년 12월5일 사망할 때까지 자택에 연금된 상태였다. 혹시 네윈은 강경 세력의 유혈진압을 반대하고, 군부통치를 마감하려 했던 것이었을까.

소마웅의 국가평화발전위원회가 1988년 8월, 시위를 무력으로 진압할 당시 탄쉐(Than Shwe)는 소마웅의 오른팔이었다. 서방국가들의 포괄적 경제제재를 견디기 힘들었던 군사정부는 1990년 5월 총선거를 실시했다.

 

1990년 수치 82% 지지,  군부가 선거 무효화

아웅산 수치의 NLD는 82%의 지지를 받았지만 ‘소마웅 군부‘는 선거를 무효화하고, 수치를 자택에 연금했다. 수치는 1991년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되었으나 군사정권은 수치의 출국을 불허한다. 몇 달 후 소마웅이 느닷없이 모든 공직에서 사퇴하고 탄쉐는 국가평화발전위원회 의장, 군최고사령관 등 4개 주요 직책을 독점한 전무후무한 실력자로 등장한다.

탄쉐는 1993년 새로운 헌법을 제정해 국가원수가 되었고, 국호를 ‘미얀마’로 바꾸었다. 그는 집권 중 대학생과 불교계의 간헐적 시위를 잔인하게 탄압했다. 2선으로 물러나기까지 18년 동안 탄쉐의 최대 관심사는 아웅산 수치였다.

미얀마 중부지역에는 ‘짯수삔(Kyat Su Pin)’이라는 나무가 많은데, 1990년대 후반 한 예언자가 수치와 이름이 비슷한 짯수삔을 많이 심으면 그 기운을 누를 수 있다고 하자, 탄쉐가 전국에 짯수삔 나무를 심으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그는 2006년 미국의 공격에 대비해 수도를 내륙의 ‘네피도’로 옮겼다. 탄쉐는 소수민족에 대한 박해를 계속했으며, 서북부 라카인주에 집단거주하고 있던 로힝야족 수백 명을 살해하고 30만 명 이상을 추방했다.

탄쉐는 부정부패로도 악명이 높다. 세계적인 마약왕 쿤사(Khun Sa)가 서방세계의 제거 대상이 되자 1996년 미얀마군에 투항했는데 그는 탄쉐의 보호하에 양곤 교외의 저택에서 살다가 2007년 사망했다. 쿤사는 구금되어서도 자유롭게 경제활동을 했으며, 그의 아들은 건설업과 보석사업, 그리고 대규모 호텔과 카지노를 경영하는 미얀마 굴지의 재벌로 성장했다. 미국이 국제 마약 범죄자인 쿤사의 신병 인도를 끈질기게 요청했음에도 탄쉐가 끝내 그를 비호한 이유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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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3월31일 미얀마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한 아웅산 수치 여사의 사진이 아버지 아웅산 장군 사진과 나란히 걸려 있다.ⓒEPA 연합

탄쉐의 손자, 맨유 매입하려 1억 달러 베팅도

2008년 탄쉐의 젊은 손자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매입하기 위해 1억 달러 규모의 계약 협상을 벌이다 여론이 악화하자 포기하기도 했다. 아웅산 수치의 정치적 시련기는 탄쉐의 집권기와 정확하게 겹친다.

수치는 1995년 가을, 유엔과 국제사회의 압력으로 6년 만에 가택연금에서 풀려나 잠시 자유로운 몸이 되었지만, 1999년 남편이 사망했을 때도 출국을 포기하고 민주화 투쟁을 재개했으며 군부는 2000년 9월 2차 연금 조치를 단행했다. 이 구금은 2010년 11월 최종적으로 해제되었다. 이로써 수치 여사의 연금 기간은 총 15년을 기록했다.

미얀마에 대한 경제 제재와 국제적 압력이 가중되자 버티기 힘들어진 군부는 2008년 가을, 다당제 민주주의 도입과 정·부통령의 의회간선제를 골자로 한 개헌을 실시한다. 개정 헌법의 핵심적 내용은 ‘배우자나 자녀가 외국 국적자인 경우 정·부통령이 될 수 없고, 국회 의석의 25%는 군부에 배정하며, 군최고사령관이 군과 경찰 통수권을 갖는다’는 것들이다. 민주주의의 숨통을 약간 터주면서 수치의 집권을 막고, 군부가 실권을 계속 쥐고 가겠다는 개헌이었다.

NLD가 불참한 2010년 가을 총선거에서 군부 위성정당인 UNDP가 다수당이 되고, 테인 세인(Thein Sein) 장군이 대통령으로 당선되며, 이때 ‘민 아웅 흘라잉(Min Aung Hlaing)’이 혜성처럼 등장한다. 2011년 봄, 테인 세인 정부의 출범과 함께 78세의 탄쉐는 여러 선임자를 제치고, 55세의 육군 중장 민 아웅 흘라잉을 최고사령관으로 지명한다.

 

민 아웅 흘라잉, 소수민족 탄압에 능력 발휘

‘민 아웅 흘라잉’은 양곤대학교 법학부에서 2년을 수학한 후 육군사관학교에 입교했으며, 졸업 후 탄쉐(당시 대령)가 연대장인 제88 경보병연대에 배속되었으며, 그때부터 탄쉐를 롤모델로 삼고 그의 그림자처럼 행동했다. 그는 초급장교 시절 소수민족 탄압에 능력을 발휘해 탄쉐의 눈에 들었으며, 탄쉐가 1992년 군부 최고지도자가 되자 본격적으로 정치군인의 길로 들어섰다.

군최고사령관이 된 민 아웅 흘라잉은 2014년 인사규정을 고쳐 자신의 정년을 65세인 2021년까지로 연장했다. 2015년에는 ‘폭넓은 민주화 개헌’을 지지한 UNDP 실력자 쉐만(Shwe Mann) 하원의장을 축출하며 정치적 야망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한편 아웅산 수치 여사는 헌법 질서를 존중한다는 약속하에 2012년 4월1일 보궐선거에 출마, 하원의원에 당선된다. 2015년 11월8일 시행된 총선거에서 NLD는 상·하원 전체 657개 의석 중 390석을 얻어 집권여당이 되었고, 수치는 2016년 3월 민간정부의 국가최고자문역 겸 외무부 장관으로 취임해 미얀마를 이끌게 된다.

아웅산 수치와 민 아웅 흘라잉이 공존한 지난 5년 동안, 미얀마에는 해와 달이 함께 떠 있는 정치 상황이 지속되었다.

두 사람의 모든 정치적 행위는 2020년 11월 총선거에서의 승리를 겨냥한 것으로, 수치 여사는 미얀마의 실질적 자유민주주의 회복을 위해 압승을 거두어야 했고, 민 아웅 흘라잉으로선 수치의 NLD를 꺾는 것이 지상과제였다.

2017년 수치 측은 경찰을 중앙경찰과 지방경찰로 분리하고 지방경찰을 주지사가 관장하도록 하는 법개정을 시도했으나 민 아웅 흘라잉의 반발로 무산되었다. 서북부 국경지대의 난민촌에 거주하는 ‘로힝야족’에 대한 대학살(Genocide) 및 추방 사건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 민 아웅 흘라잉으로서는 2020년 총선거에서 수치 정권과 불교도들을 대립시키는 구도를 만드는 것이 중요한 과제였고, 그 수단이 바로 로힝야족 탄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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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아웅산 수치 여사 뒤로 그의 아버지 아웅산 장군의 사진이 있다. (오른쪽)2008년 9월24일 미얀마 국민통합당 마웅기 총서기가 기자회견을 하는 뒤로 네윈 장군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EPA 연합

수치가 군부의 ‘로힝야 학살’에 침묵했던 이유

군부는 로힝야 탄압이 국제적으로 부각되면 인권의 아이콘인 수치가 로힝야족을 지지하고 미얀마 불교계를 비판할 것이라는 계산을 했던 것 같다. 이 음모에 빠지는 순간 2년 남은 선거 승리는 물거품이 되고, 미얀마가 또다시 군정으로 가야 하는 상황에서 수치는 입을 다물었고, 그로 인해 국제적으로 호된 비판을 받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2019년 유엔과 국제사회가 민 아웅 흘라잉을 로힝야 학살의 주범으로 규정하고 헤이그 국제사법재판소에 기소했으며, 그와 가족의 미국 입국이 금지되었다.

민 아웅 흘라잉은 부정축재자로 국민 사이에 원성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는 군부 소유의 ‘미얀마경제지주회사(Myanmar Economic Holdings Limited·MEHL)’ 회장으로서 매년 막대한 배당금을 받고 있다. 40대 초반인 그의 아들은 ‘스카이원건설’과 AMMM보험회사, Azura Beach Resort, A&M Mahar라는 제약회사를 소유하고 있으며, 최근에 양곤인민공원의 군부 소유 박물관을 사유화해 최고급 식당과 미술관을 운영 중이다.

딸과 며느리도 각각 최대 영화사와 엔터테인먼트 회사를 경영하고 있다. 한마디로 10년 사이에 복마전 같은 재산 증식을 이루었다. 이런 재산을 지켜야 하는 것도 그에게는 참으로 중요한 과업이다. 이 기업들은 미국의 제재 대상에 올라 있다.

그는 코로나19를 핑계로 총선거를 미루기 위해 노력했으나 실패했다. 그런데 총선거에서 수치의 NLD가 5년 전보다 더 큰 압승을 거두자, 패닉 상태에 빠진 것이다. 민 아웅 흘라잉은 원래 임기만료에 따른 은퇴, 군부에 주어지는 제1부통령으로의 전직 등을 놓고 저울질하던 차였다. 그러다 새 국회가 개원하면 여당이 헌법 개정을 시도하며, 여기에 일부 군 출신 의원들까지 합류할 것이라는 기류가 감지되자 ‘당장 죽느냐, 나중에 죽느냐’란 절박한 심정으로 쿠데타를 감행한 것이다.

미얀마 국민으로서는 새로운 군정은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선택이다. 중국의 든든한 지원을 업고 있는 민 아웅 흘라잉 역시 물러설 여지가 없다. 이제 공은 미얀마 국민과 미국 등 서방세계의 손으로 넘어갔다. 어쩌면 이것이 수치의 마지막 카드인지 모르겠다. 여기에 미얀마의 미래가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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