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운 맛으로 세계를 울린 ‘라면왕’ 신춘호의 발자취
  • 조유빈 기자 (you@sisajournal.com)
  • 승인 2021.03.27 1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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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일 신춘호 농심 회장 별세
"나는 국민을 위해 라면을 만들었다"

27일 92세의 나이로 별세한 고(故) 신춘호 농심 회장은 신라면, 짜파게티 등을 개발해 ‘K식품 시대’를 연 주역으로 평가받는다. 농심이 세계 라면 시장 점유율 5위의 글로벌 기업이 된 데에는 신 회장의 도전과 집념이 있었다. 그는 자신의 자서전 《철학을 가진 쟁이는 행복하다》에서 “평생 라면을 만들어 왔으니 스스로를 ‘라면쟁이’라고 부르기를 좋아한다”며 “라면은 서민만 먹는 게 아니다. 나는 국민을 위해 라면을 만들었다”고 했다. 배고픔을 덜어주는 음식에서 개인의 기호가 반영된 간편식으로 라면을 진화시키며 한국의 맛을 지켜 온 ‘라면쟁이’ 신 회장의 집념은 ‘가장 맛있는 라면’이라는 수식어로 되돌아 왔다. 대중이 별세한 신 회장을 ‘라면왕’으로 기억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가 라면 사업을 시작한 것은 1965년이다. 라면 사업 추진을 놓고 형인 고 신격호 롯데그룹 명예회장과 갈등을 겪은 끝에 롯데공업을 설립하며 독립했다. 1966년 자본금 500만원으로 공장을 준공해 본격적으로 라면을 생산했고, 1978년 사명을 ‘농심’으로 바꾸면서 롯데와 결별했다. 농심은 ‘농부의 마음’이다. 신 회장의 경영철학은 ‘이농심행 무불성사’였다. 농사를 짓는 마음으로 일하면 못 이룰게 없다는 뜻이다. 농부가 자연의 섭리 속에서 땅을 일구듯, 신 회장은 새로운 도전과 사명으로 오늘의 농심을 이뤄냈다.

농심 사옥 ⓒ시사저널 최준필
농심 사옥 ⓒ시사저널 최준필

'신라면' '짜파게티' 등 직접 이름 붙인 작명왕

농심은 닭고기 육수 시장이 주를 이룬 라면 시장에서 존폐의 기로까지 몰렸지만 라면 출시를 멈추지 않았다. 신 회장은 소고기 육수를 사용한 라면으로 승부수를 던져 재기에 성공했다. 이때 탄생한 것이 지금의 히트 제품들이다. 너구리와 육개장 사발면(1982), 안성탕면(1983), 짜파게티(1984), 그리고 1986년에 출시한 신라면이 있다. 신 회장은 대중들의 사랑을 받는 이 라면들의 이름을 직접 짓고 개발했다. 그래서 사내에서 그는 ‘작명왕’이라고 불렸다.

매운 라면이라는 의미와 본인의 성을 함께 담은 ‘신라면’이라는 이름은 당시에는 파격적이었다. 대부분 회사명을 중심으로 제품을 만들던 시대였다. "발음이 편하고 소비자가 쉽게 주목할 수 있는 네이밍이 중요하다"며 신 회장이 임원들을 설득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사나이 울리는 신라면’ ‘너구리 한 마리 몰고 가세요’ 등의 유명한 광고 문구도 신 회장이 직접 만들었다.

신 회장은 그의 저서에서 “내 손으로 만들고 이름까지 지었으니 농심의 라면과 스낵은 다 내 자식 같다"고 언급한 바 있다. 특히 신라면은 신 회장의 특별한 자식이다. 매운 맛이 너무 강해 상품화가 어려울 것 같다는 개발팀의 우려에도 “독특한 매운 맛이 라면 시장에 차별화를 이끌어 낼 수 있을 것”이라며 제품 출시를 밀어붙였다. 신 회장이 제품명과 포장 디자인까지 챙긴 신라면은 출시 3개월 만에 30억원의 매출을 올렸고, 출시된 지 수십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국내 라면 시장에서 부동의 1위 자리를 지키고 있다.

 

'한국의 매운 맛' 고집해 세계 진출

해외 시장을 개척한 주력 상품도 신라면이다. 매운 맛 때문에 성공하기 어렵다는 우려가 있었지만 시식행사 등의 한국적인 마케팅으로 우려를 돌파했고, ‘한국식 매운 맛’을 고집해 한국에서 판매하는 라면 그대로의 맛을 해외로 수출했다. “한국적인 맛이 가장 세계적인 맛”이라는 그의 지론은 세계에 통했다. 지난해 미국 뉴욕타임즈는 신라면 블랙을 세계 최고의 라면 1위에 선정하기도 했다.

신 회장은 ‘스프 경쟁’을 넘어서 ‘제면 경쟁’ 시대를 예고하기도 했다. 경쟁사와의 연구 개발 역량 경쟁에서 절대 뒤지지 말 것을 강조했고, 이 같은 전략의 결과물로 짜왕, 신라면 건면 등의 혁신 제품이 탄생했다. 라면 외에서도 지금의 농심을 만들어낸 제품들이 많다. 국내 최초 스낵의 타이틀을 가지고 있는 새우깡도 신 회장의 작품이다. 신 회장이 막내 딸이 어렸을 때 ‘아리랑’을 ‘아리깡’이라고 부른 것에 힌트를 얻어 ‘새우깡’이라는 이름을 붙이게 됐다. 농심이 장수 식품인 꿀꽈배기는 국내의 아카시아꿀 생산량의 25%를 사용한다. 국내산 농산물을 활용해 식품 산업의 근간을 지킨다는 원칙 역시 지금의 농심을 일군 신 회장의 신념 중 하나다.

신 회장은 ‘은둔의 경영자’이지만 제품의 개발에 끊임없이 참여했고, 고령임에도 회사 현안을 직접 챙겨왔다. 지난해 농심이 사상 최대 실적을 내며 국내외 주력 사업이 모두 안정적인 상승 궤도에 오르자 지난 2월 퇴임했다. 농심의 지난해 매출은 전년보다 12.6% 증가한 2조6398억원, 영업이익은 103.4% 증가한 1603억원이었다. 해외 매출도 사상 처음으로 1조원을 돌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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