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억원대 미술품 낙서 소동, 누구의 책임일까
  • 반이정 미술 평론가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1.04.25 12:00
  • 호수 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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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에선 미술품 보호를 관람객 자율에 맡겨…무조건 막는 게 능사일까

상반기 미술계의 핫이슈는 잠실 롯데월드몰에서 열린 ‘스트리트 노이즈’라는 기획 전시에서 발생한 작품 훼손 사건이었다. 이 전시에 출품된 유명 그래피티 미술가 존원의 그림에 관객이 낙서를 하는 일이 일어났다. 흔히 예술품 파괴 행위는 전쟁 중 상대국의 문화유산을 파괴하면서 점령 행위를 상징화하는 반달리즘 현상이나, 부주의한 관객의 실수로 작품이 훼손되는 일들로 나타난다. 고의냐, 실수냐의 차이가 있을 뿐 훼손 대상이 예술품임을 파괴한 이가 인식한 경우로서 둘 다 지탄을 받게 된다.

그런 점에서 롯데월드몰 그림 낙서 소동은 결이 다르다. 그림 위에 녹색 물감을 덧칠한 커플은 “그림 앞에 물감과 붓이 비치되어 있어서 참여형 작품인 줄 오해했다”고 해명했고, 전시 기획사에서도 형사책임을 묻지 않기로 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훼손된 작품이 추상화여서 낙서로 오인할 만했고 전시장에서 소품으로 비치한 물감과 붓이 낙서를 유인했다는 여론까지 일었다. 그림을 훼손한 커플을 지탄하는 의견보다는 선처해야 한다는 동정 여론이 훨씬 컸다.

서울 송파구 롯데월드타워몰에서 열린 ‘스트리트 노이즈’ 전시회에서 존원의 대형 작품이 훼손되는 일이 발생했다. 사진 가운데 녹색 물감 부분이 이날 훼손된 부분ⓒ연합뉴스
서울 송파구 롯데월드타워몰에서 열린 ‘스트리트 노이즈’ 전시회에서 존원의 대형 작품이 훼손되는 일이 발생했다. 사진 가운데 녹색 물감 부분이 이날 훼손된 부분ⓒ연합뉴스

미술품 훼손 커플에 대한 동정 여론

그림 앞에 안내문 비치와 작품 감시에 소홀했던 전시 기획사를 탓하는 여론도 적지 않았다. 커플을 두둔하는 여론 중에는 추상화에 가필된 낙서가 사람 형상처럼 보여서, 훼손되기 전보다 오히려 나아졌다는 억지스러운 응원도 보이고, 이번 사건으로 존원의 작품 가격이 오히려 상승할 수 있지 않겠냐는 보도까지 나왔다.

누군가에게 선명한 책임을 따지기 어려운 불상사라는 게 세상에는 존재하는 법이다. 이번 롯데월드몰 그림 낙서 소동의 경우가 그렇다. 그렇지만 이 사건을 통해 우리 공동체의 안전지상주의와 평균적 예술 감각을 돌아볼 필요가 있겠다. 

2월말 개막한 ‘스트리트 노이즈’는 이번 낙서 소동이 있기 전까지, 1개월 넘는 기간 동안 어떤 일반 관객도 앞선 커플처럼 ‘참여형 작품’으로 오해하지 않았다. 훼손된 그림 앞에 현장감을 더하려고 붓과 물감을 소품으로 널브러뜨렸어도 ‘작품으로 진입하지 말라’는 가이드라인 테이프를 바닥에 둘러친 상태였고, 그림이 걸린 벽에도 안내문을 붙여 최소한의 안전장치를 마련한 상태였다.

낙서한 커플을 옹호하는 의견 중에는 책임 소재를 전시 관계자에게 돌리려는 흐름도 보인다. 요컨대 그림 앞에 ‘보호유리’를 했어야 한다거나, 경고 문구를 지금보다 훨씬 큼지막하게 써붙여서 보기 쉽게 했어야 한다는 의견 댓글에는 공감도 많이 찍혔다. 아니나 다를까, 그림 훼손 사건이 보도된 후 전시 기획사에서 문제의 그림이 걸린 벽면과 바닥면에 ‘작품을 눈으로만 관람하라’는 친절한 경고문을 추가했고, 그림 앞에 붙여놓은 진입 금지 테이프에 더해 넘어오지 못하도록 낮은 차단봉까지 비치했다.

이처럼 안전 지상주의를 앞세운 주문은 우리 사회에서 제재를 받지 않는다. 나는 순간 무수한 서양 명화를 보유한 유럽과 영국의 미술관을 방문했던 지난 기억이 떠올랐다. 지명도 높은 미술관들이고 관광 명소로 여행책자에 소개된 터라, 관람 인파도 밀집한 곳이건만 미술 화집에서나 구경했던 무수한 서양 명화들이 아무런 진입 금지 표시 없이 고스란히 관객에게 상설 전시된 걸 본 기억이 선명하고 그런 개방성이 내겐 감동이었다. 전시회를 연다는 것, 전시된 미술품을 감상하는 목적은 팍팍한 일상에서 일시적으로 벗어나 해방감을 맛보고 교양을 함양하는 데 있을 것이다. 그에 앞서 만인에게 공개된 예술품의 안전을 보장하는 장치는 마련되어야 할 것이되, 작품 안전을 어떻게 고민하느냐가 관건이어야 한다.

 

미술품에 대한 존중과 관람의 기초상식 아쉬움

예술품 안전장치는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로 구분될 수 있다고 본다. 그림 앞에 진입 금지 표시를 세우거나, 조명이 반사되는 걸 무릅쓰고 보호유리나 아크릴판을 그림 앞에 덧씌우는 경우가 하드웨어적인 안전장치라 하겠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나 구스타프 클림트의 《키스》처럼 세계적으로 높은 인지도와 관람객의 관심이 집중되는 극소수 명작의 경우 보호유리로 그림 앞을 가린 매우 드문 사례다. 십 수년 전까지만 해도 이 두 그림은 별도의 보호유리 없이 공개됐다. 그렇지만 문화가 다른 여러 나라에서 밀려드는 여행객과 작품의 희소가치를 고려한 미술관 측에서 특단의 안전장치를 결정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여전히 관람에 시각적인 방해가 되는 하드웨어적인 안전장치를 대다수의 서구 미술관에선 만나기 어렵다.

소프트웨어적인 안전장치란 미술품에 대한 기본적인 존중과 관람의 기초상식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이 제동장치는 예술적 해방감을 맛볼 사람이 지켜야 할 최소한의 선이기도 하다. 엄격한 진입 금지 표시 없이도 작품에 손을 대지 않는 유럽 미술관의 관람 풍경은 이런 소프트웨어 때문에 가능한 경우랄 수 있다. 유럽 미술관에서 관찰되는 최소한의 진입 방지 표시와 관람객의 자율에 맡기는 분위기야말로 예술의 해방감과 등가의 가치라 하겠다.

안전을 빙자해 삼엄한 관람 분위기를 만들지 않으려는 공동체의 합의가 문화 성숙도를 재는 지표라고 생각한다. 전시 관람의 기본은 뭔가를 온전히 바라보는 것일진대, 작품 안전을 명분 삼아 철통같은 하드웨어를 고집할 게 아니라, 설령 시행착오가 따르더라도 공동체에게 소프트웨어가 이식되도록 돕고 기다리는 것이 문화 선진국의 자세다. 무단횡단을 원천 단속한답시고, 고속도로도 아닌 일반도로의 중앙선에 기둥을 박는 각박한 도시 광경이 몇 해 전부터 우리 사회에 번지고 있다. 꽉 막힌 엄벌주의의 풍경이 갑갑하다.

정황으로 볼 때 그림에 낙서한 커플은 고의로 훼손할 의사 없이 실수를 범한 것 같다. 그렇지만 안내문과 진입 금지 테이프를 무시한 부주의한 처신에 대해선 책임을 지는 게 맞다. 고의성이 없다는 점만을 들어 커플을 두둔하고, 현대미술의 난해함을 성토하고, 관람을 방해하는 묵직한 안전장치를 청원하는 것보다, 실수를 공동체가 인정하고 최소한의 책임을 묻는 것이, 문화적 성숙으로 가는 길에서 마땅히 치러야 할 통행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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