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정은 어떻게 아카데미 정복했나
  • 이은선 영화 저널리스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1.05.01 12:00
  • 호수 1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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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형성 벗어난 다양한 캐릭터에 도전…미국 현지 매체들도 주목

현지시간으로 4월25일, 제93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윤여정이 《미나리》로 여우조연상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한국 배우 최초이며, 《사요나라》(1957)의 우메키 미요시 이후 64년 만에 역대 두 번째 아시아 배우의 여우조연상 수상이다. “할머니는 진짜 할머니 같지 않아요.” 《미나리》 속 어린 손자는 한국에서 온 할머니에게 입을 삐죽거리며 말한다. 쿠키도 구울 줄 모르고, 레슬링을 보며 환호하며 종일 화투만 치는 것에 대한 불만이다. 그러나 이 ‘할머니 같지 않음’이야말로 영화 밖, 배우 윤여정의 행보를 가장 잘 대변하는 말이기도 하다. 70대가 되어서도 엄마, 할머니라는 안전한 수식 안에만 갇히지 않는 배우. 데뷔 이후 5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전형성을 벗어난 캐릭터들의 옷을 용기 있게 골라 입어온 윤여정에게 마땅한 전성시대가 열렸다.

4월25일(현지시간) 제93회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 한국 배우 최초로 여우조연상을 받은 윤여정이 할리우드 스타 배우 브래드 피트와 함께 포즈를 취하고 있다.ⓒEPA연합

아카데미 시상식 사로잡은 한국 할머니

“저는 한국에서 온 윤여정이다. 그간 제 이름을 여영이라고 하거나 그냥 정 등으로 잘못 부르신 많은 분들, 오늘 밤 전부 용서해 드리겠다(웃음).” 아카데미 시상식 무대에 선 윤여정의 수상 소감은 위트와 진심, 감동이 어우러진 완벽한 하나의 ‘쇼’였다. 첫마디는 시상하러 나온 브래드 피트에게 던진 뼈 있는 농담이었다. “드디어 만났네, 우리가 털사에서 영화를 찍는 동안 어디에 있었죠?” 《미나리》의 제작사 플랜B 대표인 그를 향해 던진 윤여정의 말에 박수가 터져 나왔다.

후보에 함께 오른 배우들을 향해 “각자의 영화에서 다른 역할을 맡았을 뿐 경쟁이란 있을 수 없고, 내가 운이 더 좋았던 것”이라고 언급한 대목에서는 품격이, 자신을 배우로서 이끌어준 김기영 감독을 언급하며 “그분이 살아계셨다면 오늘 무척 기뻐하셨을 것”이라 말한 데서는 자신의 시작점뿐 아니라 한국영화의 중요한 역사를 짚어주는 관록마저 돋보였다.

그의 수상 소감은 현지 매체들 사이에서도 단연 화제였다. 뉴욕타임스는 “윤여정의 소감은 고루했던 시상식에서 만난 뜻밖의 선물”이라고 평했고, CNN은 “(윤여정이) 쇼를 훔쳤다”고 평했다. 한국에서는 이미 새삼스럽지 않은 그의 연기 경력도 해외에서 앞다퉈 조명되는 분위기다. 로이터, AP 통신 등은 시상식 현장에서 보여준 윤여정의 재치를 평하며 동시에 그의 수상 배경에 한국에서 오랫동안 활동해 온 이력이 있었음을 집중적으로 보도했다.

농담과 진심 사이. 이는 《미나리》 속 순자와 현실 세계의 윤여정이 흥미롭게 공명하는 지점이다. 앞서 4월11일 열린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여우조연상을 받은 뒤 영국인들을 향해 “콧대 높다(snobbish)”고 은근한 핀잔을 주는 동시에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남편인 필립 공을 향해 애도를 표한 윤여정은 분명 짓궂은 데가 있지만 사랑스럽다. 그리고 그 모습이 다시 《미나리》 속 순자에게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는 점이 전 세계에 불고 있는 ‘윤여정 열풍’의 배경이다.

1980년대 아메리칸 드림을 좇아서 온 가족의 풍경을 이야기하는 《미나리》의 잔잔함 속에서 윤여정이 연기한 순자는 뛰어난 개별적 개성을 발휘하는 캐릭터다. 손자를 향한 무조건적인 사랑을 바탕에 둔 전통적 할머니의 모습이 있는가 하면, 떨어져 있는 동안 전혀 알지 못했던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에서 짓궂은 유머를 던지는 모습도 존재한다. 그리고 그런 순자의 개성과 사랑은 가족을 하나로 묶어두는 매개가 된다. 배우의 실제 모습과 캐릭터를 유연하게 오가는 매력에 힘입어 아카데미 시상식까지 내로라하는 해외 영화상이 그를 여우조연상 후보로 올렸으며, 윤여정은 30개가 넘는 트로피의 주인공이 됐다.

영화 《미나리》 스틸컷ⓒ판시네마
영화 《미나리》 스틸컷ⓒ판시네마

“나는 오늘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살어. 대신 애써서 해”

1966년 TBC 공채에 합격하면서 연기자의 길을 걸은 윤여정의 영화 데뷔작은 김기영 감독의 《화녀》(1971)다. 이듬해 《충녀》(1972)까지 중산층 가정을 해체하고 그 과정에서 자신 역시 히스테리를 겪는 여성 캐릭터를 연기했다. 김기영 감독과 함께한 작품에서 윤여정은 언제나 당대의 관습을 벗어나는 배우였다. 같은 시기 MBC 드라마 《장희빈》에서 타이틀롤을 연기한 것도 윤여정이 ‘욕망하는 여자’라는 별칭으로 불리는 데 한몫을 했다.

결혼 후 미국으로 건너가며 활동을 중단했던 윤여정은 이혼과 함께 1990년대 TV 드라마를 통해 복귀를 알렸다. 한동안 존재했던 윤여정의 스크린 공백기를 메워준 이는 임상수 감독이다. 임 감독은 연속극의 자장 안에 머무르던 윤여정을 스크린으로 불러와, 조금 무뎌졌던 그의 날을 다시 날카롭게 벼리게 만든 주인공이다. 병든 남편을 두고 초등학교 동창과 바람이 난 채로 “몸이 원하고 마음 가는 대로 살련다”를 외치는 《바람난 가족》(2003) 속 병한, 《하녀》(2010)에서 “아더매치(아니꼽고 더럽고 매스껍고 치사한)”를 입에 달고 사는 능구렁이 같은 늙은 하녀, 《돈의 맛》(2012) 속 탐욕스러운 재벌집 안주인은 그렇게 탄생했다. 《하하하》(2010)부터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2015)까지 이어진 홍상수 감독과의 작업도 윤여정의 연기 인생 2막을 알린 작품들이다.

배우들이 각각 그 자신을 느슨하게 변형한 캐릭터를 연기하는 페이크 다큐 《여배우들》(2009)에서 윤여정은 “난 (늙었으니) 재래시장이나 지키겠다”며 “(하이힐 말고) 지팡이나 달라”고 호언한다. 이때 윤여정에게서 만만치 않은 입담과 과감한 캐릭터성을 발견한 이재용 감독은 이후 《죽여주는 여자》(2016)라는 문제적 작품을 만든다. 서울 종로 일대에서 노인들을 대상으로 성매매를 하는 일명 ‘박카스 할머니’에 대한 이야기로, 윤여정은 늙음과 죽음 그리고 빈곤에 부딪친 노년의 수치심과 허무함을 색다른 방식으로 체화해 낸다. 같은 해 그의 필모그래피에는 손녀를 향한 지고지순한 사랑을 발휘하는 제주 해녀로 변신한 《계춘할망》 같은 작품도 존재한다. 가히 변신의 귀재다.

차기작은 웬만한 젊은 배우들보다 화려하다. 넷플릭스 《센스8》으로 시작됐던 윤여정의 할리우드 진출은 《미나리》 그리고 연내 방송을 앞둔 애플 TV의 시대극 《파친코》로 한층 더 확고해지는 분위기다. 동시에 윤여정은 요즘 자신이 부리는 ‘사치’에 대해 자주 말하는 중이다. 잉여로운 물질적 소비가 아니다. 작품이 좋다면 분량과 개런티에 상관없이 출연을 결정하고, 함께 작업하고 싶은 이들이 만든 영화에 기꺼이 참여하는 것. 그는 그런 것을 배우로서 부릴 수 있는 최고의 사치라 말한다. “난 오늘 하고 싶은 것만 하면서 살어. 대신 애써서 해.” 《찬실이는 복도 많지》(2019) 속 집주인 할머니의 얼굴로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것은 응당 현실 세계의 배우 윤여정의 말이기도 하다. 그의 오늘을 만든 비결은, 단지 그것뿐인지도 모른다.

 

오스카의 벽 넘은 아시아 여성들

이번 아카데미 시상식의 이변은 아시아 여성들이 만들었다. 윤여정이 여우조연상 트로피를 거머쥔 사이, 중국계 미국 감독 클로이 자오가 《노매드랜드》로 작품상과 감독상을 차지했다. 2008년 미국 금융위기 이후 집을 버리고 길 위의 삶을 택한 ‘노매드’들의 삶을 주목한 작품이다. 이 영화에서 주인공 펀을 연기한 프랜시스 맥도맨드는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봉준호 감독의 시상으로 감독상을 받은 클로이 자오는 “오스카상을 선함을 유지하는 모든 분에게 돌리고 싶다”는 소감을 남겼다. 여성 감독이 감독상을 거머쥔 것은 《허트 로커》(2008)의 캐스린 비글로 감독 이후 두 번째이며, 아시아계 여성 감독으로는 최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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