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공정’이 새로운 시대정신으로 떠올랐다. 촛불집회 열망을 배신한 조국과 추미애의 불공정 행위에 대한 반작용이다. 일자리와 부동산의 양극화를 해결하지 못한 정부의 무능에 대한 분노도 폭발했다. 그러나 아직도 공정의 개념에 대한 오해가 많다. 서양에서 공정을 상징하는 ‘정의의 여신’이 저울을 들고 있는 것처럼, 공정은 평등의 좌표에서 실현된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정의를 법을 지키거나 올바른 행동의 의미뿐 아니라 평등의 형태로 보았다. 평등이 없다면 정의도 공정도 없다.
오늘날 평등은 크게 법률적 평등, 기회의 평등, 결과의 평등 세 가지 범주로 구분된다. 먼저 ‘법률적 평등’은 법 앞의 평등과 절차적 정의를 강조한다. 이는 재능과 재산의 불평등은 존재해도 시민의 법률적 권리는 평등해야 한다는 로마 철학자 키케로의 주장까지 거슬러올러갈 수 있다. 영국 혁명과 미국 혁명에서 자유주의자는 신체의 자유, 언론의 자유, 재판을 받을 권리를 획득했다. 그러나 법률적 평등은 기본적으로 소극적이다. 법률적 평등은 특권과 반칙의 근절에서 멈춘다. 재벌 3세와 비정규직 노동자가 동시에 법률에 의해 도둑질이 금지되었다고 해서 그들이 평등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법률적 평등이라는 원칙에서 ‘기회의 평등’과 ‘결과의 평등’이라는 관념이 탄생했다. 프랑스 혁명 직후 《인권 선언》은 “사람은 평등한 권리를 가지고 자유롭게 태어났다”고 천명했다. 평등한 권리란 부모의 재산과 세습적 지위가 아니라 개인의 역량을 실현할 균등한 기회를 의미한다. 평등하게 의무교육을 받을 권리가 대표적이다. 기회의 평등은 20세기 자유주의자와 사회민주주의자의 지지를 받았다. 1971년 미국 철학자 존 롤스는 《정의론》에서 사회 정의의 토대가 ‘공정’이라고 주장하며, 취약계층에게 최대 혜택을 제공하는 ‘최소극대화 원칙’을 주장했다. 미국 대학에서 빈곤한 가정의 자녀에게 긍정적 우대를 제공하는 것이 대표적 예다. 한국에서도 지역 균형 할당제와 사회적 배려 제도를 실시한다. 보편적 사회보장도 중요하다. 부모에 따른 ‘기울어진 운동장’을 공정하게 만들기 위함이다.
그러나 평등한 기회를 제공해도 불평등은 커질 수 있다. 부모의 배경을 무시한 능력주의는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오류에 빠질 수 있다. 이에 사회주의자들은 사유재산제의 철폐를 주장했지만, 자본주의에서도 누진세는 결과의 평등에 기여한다. 미국 철학자 로버트 노직 같은 자유지상주의자들은 세금을 도둑질이라고 비난했으나 결과의 평등을 무시하는 국가는 없다. 미국에서 극빈층을 위한 공공부조는 결과의 평등에 도움이 된다. 한국에서 노인에게 기초연금과 지하철 무료승차권을 제공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또한 지나친 불평등은 저소득층의 소비를 침체시켜 경제 성장을 저해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로버트 쉴러가 제안한 대로 불평등 수준과 과세율을 연동시키는 제도가 바람직하다.
소련 공산주의의 기계적 평등주의는 성공할 수 없다. 자본주의에서 불평등은 어느 정도 불가피하다. 그러나 빈부 격차가 극심해지면 사람들의 상대적 박탈감이 커지고 사회 갈등이 심각해질 수 있다. 2008년 세계 금융위기가 발생하면서 1929년 이래 역사상 최고 수준으로 불평등이 커지자 세계적으로 분노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미국의 ‘월가를 점령하라’ 시위에서 ‘아랍의 봄’과 한국의 촛불집회에 이르기까지 저항운동이 폭발했다. 양극화에 따른 극단적 포퓰리즘이 확산되면서 민주주의가 위기에 직면했다. 현재의 불평등은 위험한 수준이다. 특권과 차별 반대를 넘어 사회 정의와 공정을 추구하는 새로운 비전과 전략이 시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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