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여줄게, 제대로 된 악녀를
  • 이은선 영화 저널리스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1.05.28 13:00
  • 호수 1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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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 탄생기’를 입체적으로 다룬 영화 《크루엘라》

디즈니의 세계관은 공주들만의 것은 아니다. 악녀들의 것이기도 하다. 사랑보다는 모험을, 운명에 순응하기보다는 야망을 발휘할 기회를 택하는 이들의 관점에서 서술되는 이야기에서는 색다르고 불온한 매력이 발견되곤 한다. 《크루엘라》는 디즈니의 애니메이션 실사화 프로젝트인 ‘라이브 액션(live action)’의 일환으로, 《101마리 달마시안 개》(1961) 속 악당의 기원을 파헤치는 작품이다. 천국에 갈 착한 여자가 되는 대신 스스로 기꺼이 악마가 되기를 선택한 여자, 크루엘라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악녀는 어떻게 탄생하는가

한쪽은 흰색, 다른 한쪽은 검은색. 정확하게 색이 절반으로 나뉜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달마시안 개들을 노리는 악당, 크루엘라 드빌은 1956년 도디 스미스의 소설에서 처음 등장한 캐릭터다. 달마시안 개들의 무늬에 반한 그는 모피 코트를 만들 흉악한 계획으로 개들을 납치한다. 이 이야기는 디즈니 클래식 애니메이션 《101마리 달마시안 개》(1961)로, 이후 실사영화 《101 달마시안》(1996)으로 만들어졌다. 이 영화에서는 글렌 클로즈가 크루엘라를 연기하며 강렬한 인상을 남긴 바 있다.

《크루엘라》는 슈퍼히어로 영화가 영웅의 시작점을 그리듯 크루엘라 드빌의 사연을 다룬다. 어머니의 비극적인 죽음을 목격한 뒤 떠돌이 좀도둑으로 살아오던 에스텔라(엠마 스톤)가 타고난 천부적 재능을 살려 패션계에 들어가기까지가 전반부, 그를 고용한 남작 부인(엠마 톰슨)을 위협하는 존재로 성장하며 자신의 진짜 뿌리를 탐색해 가는 과정이 후반부를 이룬다.

어린 시절 타고난 기질을 억누르고 사람들과 어울려 살고 질서에 순응하기 위해 노력했던 에스텔라. 하지만 패션이라는 기회와 자신의 성장기에 숨겨진 비밀에 다가선 뒤에는 ‘날 때부터 뛰어났고, 원래 못됐고, 좀 돌았고, 복수하고 박살 낼 게 많은’ 본연의 모습을 드러낸다. 말하자면 영화는 에스텔라가 과거의 자신과 이별하고 크루엘라라는 본성을 되찾기까지의 여정, 즉 ‘크루엘라 비긴즈’에 해당한다. 원작 동화와 애니메이션, 1990년대 실사영화에서는 전혀 다뤄지지 않았던 새로운 스토리다. 물론 크루엘라와 달마시안 개들과의 인연, ‘드빌’이라는 성을 스스로에게 주는 과정 등 이전 작들과의 연결점은 살뜰하게 챙긴다.

에스텔라에서 크루엘라로 변화하는 진폭이 워낙 큰 데다 파격적인 면모를 갖춘 캐릭터니만큼 캐스팅이 중요한 작품인데, 결과적으로는 탁월한 선택으로 보인다. 하이틴 코미디 《이지 A》(2010), 인종차별 시대에서 용기와 연대의 이야기를 건져 올렸던 《헬프》(2011), 스파이더맨의 리부트 시리즈 《어메이징 스파이더맨》(2012~14), 놀라운 영화적 실험 《버드맨》(2014), 아름다운 뮤지컬 로맨스 《라라랜드》(2016), 세 여성이 벌이는 욕망의 파워 게임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2018) 등등에서 매력적인 활약을 펼쳐온 배우 엠마 스톤이 크루엘라의 옷을 입었다. 풍부하다는 말로도 부족할 정도의 감정 표현부터 캐릭터 소화력, 드라마와 코미디를 능수능란하게 줄 타는 엠마 스톤 특유의 연기는 《크루엘라》를 그의 새로운 대표작으로 손꼽게 만든다.

 

확실하게 달라진 디즈니의 노선

이 영화는 동화와 애니메이션 속이 아니라 현실세계가 배경이 된 디즈니 최초의 작품이기도 하다. 제작진은 크루엘라의 무대를 패션이 활황이던 1970년대 영국 런던으로 옮겨놓았다. 극 중 크루엘라의 모든 활약은 기존 질서를 전복하고 해체하는 방식에 기초한다. 내로라하는 디자이너와 수선사들이 완성하는 오트 쿠튀르(haute couture, 고급 주문 의상)로 대변되는 남작 부인 스타일과는 달리, 크루엘라는 펑크록 스타일에 더해 성별의 이분법에 갇히지 않는 젠더 프리를 추구하는 과감함을 선보인다.

이는 디즈니의 기존 작들과 궤를 달리하는 이 영화만의 방식과도 닮아 있다. 크루엘라와 남작 부인의 대결 구도가 본격적으로 펼쳐지기 시작하면서는 범죄 드라마의 성격이 두드러지기도 한다. 살해 사주, 방화 같은 다소 과감한 상황들도 추가된다. 욕망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전쟁 같은 싸움도 불사하며 질주하는 여성들의 대결이 짜릿하게 펼쳐지는 것이다. 《크루엘라》의 연출을 맡은 이가 《아이, 토냐》(2017)의 크레이그 질레스피 감독인 점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는 이 영화에서 미국 최초로 세계선수권대회에서 트리플 악셀을 성공시켰던 훌륭한 피겨스케이팅 선수였지만, 문제아 이미지를 뒤집어쓴 채 세간으로부터 온당한 평가를 받지 못했던 토냐 하딩의 실화를 색다른 관점에서 드러낸 바 있다. ‘악녀 탄생기’를 이보다 더 입체적으로 다뤘던 사례는 이전에도 흔치 않다.

동시에 《크루엘라》는 2000년대 들어 문화적 다양성, 달라진 시대의 가치관을 꾸준히 반영해 온 디즈니의 노력을 한층 적극적으로 상징하는 작품으로도 읽힌다. 동화를 바탕으로 만든 애니메이션 라인업에서 《인어공주》(1989), 《미녀와 야수》(1992) 등 ‘프린세스 스토리’를 선보이던 디즈니는 《라푼젤》(2011), 《모아나》(2016) 등을 통해 보다 주체적인 여성 주인공 캐릭터 서사를 만드는 방향으로 변화를 꾀해 왔다. 운명에 근거하는 로맨스 대신 자매의 우애와 모험을 강조한 《겨울왕국》 시리즈(2013~) 역시 중요한 분기점이 됐다.

라이브 액션 시리즈를 통해서는 한층 과감한 인식의 전환을 선보이는 중이다. 디즈니 영화 최초의 악녀 캐릭터를 주인공으로 내세웠던 안젤리나 졸리 주연작 《말리피센트》(2014)는 마녀 캐릭터를 통해 애니메이션 《잠자는 숲속의 공주》(1959)를 재해석해 낸 시도였다. 바통을 이어받은 《크루엘라》를 통해서는 괄목할 만한 여성 악당 캐릭터를 선보였고, 이는 하나의 새로운 가능성으로 완벽히 자리매김하게 된 인상이다. 뒤이어 나올 《인어공주》 실사영화에서 공주보다 악녀 우르슬라(멜리사 맥카시)의 활약이 더 기대되는 이유다.

칙릿이 달라졌다

패션산업 종사자인 주인공이 등장한다는 점에서 《크루엘라》는 칙릿(chick-lit)의 폭넓은 변주로도 보인다. 젊은 여성을 뜻하는 속어 ‘치크(Chick)’와 문학을 뜻하는 ‘리터래처(Literature)’가 합쳐진 단어로, 최신 유행에 민감하며 주로 패션이나 출판 산업에서 일하는 20~30대 여성의 일과 로맨스를 다루는 장르다. 2000년대 초중반 《브리짓 존스의 일기》시리즈(2001~),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2006), 1998년부터 방영된 미국의 동명 TV 시리즈를 스크린으로 옮긴 《섹스 앤 더 시티》(2008~) 등이 대표적이다. 액션·스릴러 장르의 강세로 한동안 주춤했던 경향성은 최근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에밀리, 파리에 가다》(2020)를 신호탄으로 재조명된 바 있다. 《크루엘라》는 로맨스의 비중을 없애고 성공을 꿈꾸는 주인공의 야심만을 부각한다는 점에서 신선한 해석을 보여준다. 새로운 시대상에 발맞춘 접근법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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