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렌치 디스패치》, 인쇄 매체의 벨에포크를 향한 러브레터
  • 이은선 영화 저널리스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1.11.23 12:00
  • 호수 16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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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 앤더슨 감독 作

인쇄 매체에 아직 종말이 찾아오진 않았다. 하지만 그 운명은 아주 서서히 진행되는 긴 쇠락기 안에 있다. 아날로그보다는 디지털, 텍스트보다는 이미지, 사람을 넘어선 인공지능이 주목받는 시대. 이런 세상에서 인쇄 매체, 그중에서도 잡지를 만든다는 것은 외롭고 고된 작업이다. 그럼에도 세상에는 여전히 잡지가 존재한다. 매체라는 이름의 무언가들이 무수히 사라지면서도 끈질기게 다시 생기고, 또 살아남는다. 이야기를 전달하기 위해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 웨스 앤더슨 감독의 《프렌치 디스패치》는 이 모든 작업을 분해해 들여다보고 끝내 껴안기를 자처한다. 어쩌면 이 작품은 단순히 한 편의 영화라기보다, 차라리 인쇄 매체에 보내는 러브레터일지도 모른다.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팝업북을 넘어 보는 잡지를 지향하다

확실히 《프렌치 디스패치》는 관객보다 과거와 현재 매체 종사자들의 마음을 살 확률이 높은 영화다. 인쇄물의 목차나 판권을 옮긴 듯 디자인한 오프닝 시퀀스부터 엔딩 시퀀스까지, 영화는 그 자체로 한 권의 잡지다.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다. 말 그대로 《프렌치 디스패치》는 ‘보는 잡지’에 가깝다. 취재의 씨앗을 찾는 일, 그것이 하나의 글로 탄생하기까지의 고민, 따끈한 인쇄 과정을 통해 나온 결과물이 읽는 사람들에게 전달되는 짜릿한 희열. 이걸 경험해본 사람과 그러지 않은 사람이 《프렌치 디스패치》를 바라보는 감상은 완전히 다를 것이다.

영화의 배경은 프랑스 앙뉘 쉬르 블라제에 지부를 둔 ‘프렌치 디스패치’라는 잡지의 사무실이다. 도시와 매체 이름 모두 가상의 존재다. 편집장 아서 하위처 주니어(빌 머레이)의 급작스러운 사망으로 인해 이 잡지는 곧 폐간될 운명에 처해 있다. 편집장의 유서에 자신이 사망하면 매체 역시 문을 닫는 것으로 명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 호를 위해 모인 저널리스트들은 저마다 자신의 취재 영역에 맞는 기사를 준비한다.

《프렌치 디스패치》가 차례로 보여주는 것은 각 취재의 결과물이다. 하나의 매체라는 플랫폼을 중심으로, 각각의 기사가 단독 에피소드로 펼쳐지는 형태다. 자전거를 타고 앙뉘의 곳곳을 취재하는 허브세인트 새저랙(오웬 윌슨)의 칼럼, 현대미술 평론가이자 문화예술 전문 저널리스트 J.K.L 베렌슨(틸다 스윈튼)의 예술작품 소개, 학생운동을 취재하는 원칙주의자 루신다 크레멘츠(프란시스 맥도맨드)의 에세이, 일류 셰프의 레시피를 취재하려다 예상치 못한 추격전에 휘말린 해외파 저널리스트 로벅 라이트(제프리 라이트)의 기사까지 차례로 등장한다.

영화는 미국 시사주간지 ‘뉴요커’를 향한 웨스 앤더슨 감독의 오랜 사랑이 반영된 결과물이다. 고등학생 시절 도서관에서 우연히 일러스트 표지에 끌려 뉴요커를 읽게 된 감독은 이후 애독자가 되었고, 뉴요커의 느슨한 변형으로서 《프렌치 디스패치》를 만들었다. 실제로 새저랙이 취재하는 꼭지는 ‘뉴요커’의 유명 꼭지인 ‘talk of the town’을 어렵지 않게 연상시키며, 나머지 특종 역시 웨스 앤더슨 감독이 흥미롭게 읽은 이야기들을 변형하고 상상력을 보태 만들어낸 것들이다.

 

웨스 앤더슨 영화를 향한 오해들

웨스 앤더슨 감독의 연출작은 단 한 컷만 보더라도 그의 영화임을 바로 알아차릴 수 있을 만큼 개성이 분명하다. 인터넷 데이터베이스 IMDB에서 만든 시리즈인 ‘감독의 트레이드마크(Director’s Trademaeks)’ 중 웨스 앤더슨 편을 보면, 그가 자주 활용하는 장치들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다. 가상의 소설이나 신문 기사 등을 통한 스토리텔링, 오버헤드 숏, 손으로 만든 공예품들, 파스텔 톤의 색감, 프레임의 정중앙에 위치한 피사체, 완벽한 대칭 등이 그것이다. 실제로 감독의 영화에는 언제나 이 모든 것이 중요하게 등장하는데, 같은 장치들로 매번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점은 그만의 놀라운 능력이다.

이미지와 텍스트가 과도하게 넘쳐난다는 것도 특징이다. 잡지의 특성을 반영한 《프렌치 디스패치》는 감독의 연출작 중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로 시각 정보의 양이 방대하다. 그러니 만약 이 영화를 좇다가 당신이 맥락을 놓치거나 심지어 방금 본 장면을 전부 기억하지 못한다 해도, 그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극의 공기에 작은 여백도 허락하지 않는 웨스 앤더슨 특유의 강박적인 스타일은 서사와 연결된 메시지들을 오독하도록 설계된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의 영화는 자유로운 해석보다 난독의 가능성 쪽으로 좀 더 넓게 열려 있다.

마치 정확한 시계 같은 인상을 주는 웨스 앤더슨의 영화 안에서는 배우조차도 일종의 부품처럼 보인다. 영화 속에는 앞서 언급한 저널리스트 군단 외에도 그들의 취재원인 다양한 사람이 등장하고, 당대 최고의 배우들이 각각의 캐릭터를 연기하고 있다. 베니시오 델 토로, 레아 세이두, 애드리언 브로디, 티모시 샬라메 등 일일이 열거하기도 어려운 수준이다. 그러나 극 중에서 이 배우들의 웬만한 퍼스널리티는 대부분 진즉 제거된 상태다. 이들 모두는 마치 웨스 앤더슨이 만드는 완벽한 디오라마 속 소품처럼 보인다. 배우들이 감독과의 작업에서 창조적 재미를 느끼지 못할 것이라는 얘기는 아니다. 완벽하게, 때론 감정까지도 통제된 세계의 일부를 오차 없이 연기해 낸다는 색다른 쾌감이 존재할 것이다.

다만 웨스 앤더슨을 비주얼리스트라는 표현에만 가두기에는 아쉽다. 미술적으로만 완벽한 연출가라는 점은 그를 향한 가장 큰 오해다. 《문라이즈 킹덤》(2012),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2014) 등을 거치며 그의 영화가 미학적으로 더욱 완벽해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실제로 이 아름다움은 엄격한 형식 아래 존재한다. 핵심은 사회적 이슈를 반영한 서사와 완벽한 스타일 사이의 충돌이다. 웨스 앤더슨은 그 사이에서 발생하는 기이한 긴장과 아이러니를 포착하고 있다. 여학생 기숙사 출입을 요구하며 시작된 학생들의 일명 ‘체스판 혁명’이 프랑스를 뜨겁게 달군 68혁명과 궤를 나란히 한다는 점은 어렵지 않게 유추가 가능하다. 경찰서장 아들 납치 사건을 둘러싸고 느닷없이 벌어지는 추격전의 중심인물인 네스카피에(스티브 박)가 이민자이자 이방인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요리사라는 점 역시 의미심장하다.

웨스 앤더슨의 영화에서 현실세계의 사건이 그대로 재현되는 일은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다만 그만의 프레임을 통과한 이야기들은 계속 존재할 것이다. 그의 영화는 뜨거운 공감 대신 예민하고 정중한 거리 두기의 영역 안에 있다. 저널리즘의 가치와 필요성이 물음표로 남는 시대에 날아든 낭만적 헌사인 《프렌치 디스패치》처럼.
 

타협 없는 미술

《프렌치 디스패치》는 웨스 앤더슨이 추구하는 미학의 정점이다. 컬러와 흑백 전환, 애니메이션으로의 전환 등은 예삿일이다. 프레임 하나하나가 매거진의 한 페이지처럼 보이길 원했던 감독의 고집은 무려 130 여 개의 세트 제작으로 이어졌다. 실제 미술가가 여러 명 동원되기도 했다. 극 중 모세 로젠탈러의 작품인 ‘콘크리트 걸작’ 프레스코는 틸다 스윈튼의 파트너인 화가 산드로 코프가 완성했으며, 마지막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애니메이션은 촬영지인 프랑스 앙굴렘 지역에서 애니메이션을 공부하는 학생들과의 협업으로 완성한 결과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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