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찾은 일상, 한 줄기 햇살 같은 뮤지컬
  • 조용신 뮤지컬 평론가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1.11.21 12:00
  • 호수 1675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스테디셀러 뮤지컬 《빨래》 팬데믹 이후 첫 재개막

국내에 코로나19 첫 확진자가 발생한 작년 1월 이후 우리의 일상은 큰 폭의 변화를 겪었다. 사람들이 모이는 극장은 위험한 공간으로 여겨졌고 저녁 시간에 외출을 억제하는 이른바 ‘사회적 거리 두기’ 정책이 오랜 기간 시행됐다. ‘사람들이 저녁에 모여서 공연을 함께 관람하는’ 대학로를 위시한 공연계는 기나긴 동면의 밤을 인내하며 버텨야만 했다.

이처럼 어려운 시기에 방역 당국이 올해 11월부터 위드 코로나 정책을 시행하고 일상 회복 첫 단계가 시작되며 간만에 훈풍이 불고 있다. 오랫동안 관객들에게 사랑받았던 스테디셀러 명작 공연들이 다시 무대를 열고 차가워졌던 객석에는 온기가 스며들고 있다.

ⓒseoul studio
뮤지컬 《빨래》가 1년간의 공백을 깨고 재개막 했다. 지난해 코로나19로 24차 프로덕션에서 조 기 폐막했지만, 11월1일 티켓 오픈과 함께 프리뷰 공연 전석 매진을 기록하며 뜨거운 반응을 얻고 있다.ⓒseoul studio

한국 뮤지컬 역사에 한 획을 그은 ‘그 공연’

한국 창작자들이 만든 이른바 ‘한국 창작 뮤지컬’ 중에서 오랫동안 사랑받고 있는 《빨래》도 작년 사회적 거리 두기 방침에 따라 공연을 멈추었다가 거의 1년 만에 25차 프로덕션으로 재개막했다. 《빨래》의 공연 재개는 그동안 작품이 쌓아온 역사와 업계에서 차지하는 위상만큼 공연을 통한 일상 회복의 여정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소식이라고 할 수 있다.

뮤지컬 《빨래》의 역사는 200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졸업 공연으로 관객들에게 첫선을 보인 이후 국립극장에서 초연을 갖고 2005년 대학로 상업무대에 소개되어 평단과 관객에게 고른 지지와 호평을 받았다. 그해 한국뮤지컬대상에서 작사, 극본상을 수상했다. 누적 공연 횟수 5000회, 누적 관객 80만 명, 평균 유료 객석 점유율 80%를 기록한 작품으로 대학로 한국 뮤지컬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2017년에는 한국 뮤지컬 발전에 기여한 공적이 인정되어 예그린어워즈 예그린 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추민주 작가·연출가, 민찬홍 작곡·편곡자, 여신동 무대디자이너, 서정선 안무가는 이 작품과 함께 성장해 현재 뮤지컬 업계의 대표 창작자군으로 많은 활동을 하고 있다.

뮤지컬 《빨래》는 일단 처음 접한 사람들에게도 쉽게 기억에 남는 특이하고 인상적인 제목을 가졌다. 그런데 춤추고 노래하는 뮤지컬과 빨래가 대체 무슨 연관이 있는 것일까? 혹시 현대사회의 빨래터인 ‘코인세탁소’에서 만난 청춘 남녀의 사랑 이야기인가? 그렇지는 않다. 이 작품에서 빨래는 액면 그대로 극 중 동네 사람들이 실제로 행하는 ‘빨래’ 자체의 의미도 있지만 현실을 초월하는 꿈과 희망을 품고 있는 단어다. 《빨래》의 노랫말 중에서 ‘얼룩 같은 어제를 지우고, 먼지 같은 오늘을 털어내고, 주름진 내일을 다리는’이라는 말이 보여주는 것처럼 빨래는 우리 가슴에 돋아있는 슬픔을 깨끗하게 승화시키는 행위임을 상징한다. 비록 극 중 주요 인물들이 처한 현실이 완전히 개선되거나 해결되지는 않지만 그보다 소중한 사랑을 얻었고 신뢰를 얻었다.

 

빨래로 현대사회 희로애락 풀어내

구질구질한 빨랫감 같은 산동네 셋방살이 인생들의 비애는 ‘생활유머’와 ‘인간애’가 받쳐주며 그 괴로움을 희석시켜준다. 배꼽 빠지게 웃을 수 있는 포인트가 있는가 하면 어느 순간 눈시울이 붉어지는 가슴 아픈 이웃의 사연이 펼쳐진다. 이 작품은 뮤지컬에서 중요한 희극과 비극의 두 요소를 적절히 배합해 달콤하면서도 씁쓸한 현실을 잘 표현했다. 서구 뮤지컬에서 장르를 설명하는 두 축인 ‘뮤지컬 코미디’와 ‘뮤지컬 플레이’가 이 작품에서는 하나로 통합돼 있다고 볼 수 있다.

배경은 서울의 어느 변두리. 강원도에서 상경해 서울 생활 5년 차인 여주인공 나영은 반지하 사글셋방에 살며 서점에서 일하는 27세 비정규직 직원이다. 상대역인 남자 주인공 솔롱고는 몽골에서 한국으로 단기 연수를 왔다가 눌러앉은 불법체류자 신분의 이주노동자로 필리핀 출신 이주노동자 친구와 함께 산다. 이웃사촌인 두 사람은 밀린 빨래를 널기 위해 올라간 옥상에서 만나 사랑을 키운다.

하지만 분홍빛 사랑 이야기만을 기대하기엔 등장인물들의 일상은 참으로 팍팍하다. 솔롱고는 서울 생활 6년 차에 밀린 월급이 받은 월급보다 많은 상태다. 나영 역시 직원들의 피와 땀을 쥐어짜 서점을 주식시장에 상장한 사장의 면전에서 입바른 말을 했다는 이유로 하루아침에 매장에서 창고로 좌천된다. 나영이 사는 사글셋방의 주인 할머니는 마흔이 다 되도록 방 안에 갇혀 기저귀 신세를 져온 지체장애인 딸을 눈물을 삼키며 보살펴왔다. 나영의 옆방에서 매일같이 고성을 터뜨리는 과부 희정 엄마와 홀아비 구씨의 사랑은 위태롭다.

《빨래》는 기존 뮤지컬들에서 거의 다루지 않는 부당 해고, 외국인 노동자, 장애인 소외 등 우리 사회의 어두운 문제와 소시민의 삶을 진정성 있게 다루고 있다. 저소득층의 일상이라는 소재는 규모가 크고 화려한 뮤지컬에 비해 촌스럽고 신파적이거나, 아니면 고단한 일상을 적나라하게 묘사해 보는 이로 하여금 불편한 감정을 느끼게 할 것이라는 선입견을 줄 수 있다. 그러나 《빨래》는 이들의 소박하고 따스한 일상사가 자연스러운 햇살처럼 느껴져 절로 흐뭇한 미소를 짓게 한다. 작가 추민주는 관객을 계몽하려 하지 않고 공감할 수 있는 사건들에 과장되지 않은 코믹함을 가미해 촘촘한 스토리라인을 짜놓았다. 작곡가 민찬홍이 빚어낸 20곡의 유려한 노래는 드라마 진행의 적재적소에 자리해 작품을 풍성하게 만든다.

《빨래》의 감동은 기나긴 역사의 프로덕션을 거쳐간 많은 배우의 안정된 연기에서도 나온다. 특히 연극판에서 잔뼈가 굵은 실력파 배우들의 진지한 연기와 노래 실력은 캐릭터와 짝을 이루며 다양한 장르를 넘나드는 음악적인 재미를 안겨준다. 이 작품은 객석의 웃음을 이끌어내기 위해 배우들로 하여금 과장된 즉흥 대사를 쏟아내게 하는 여타의 소극장 창작 뮤지컬들에 비해 가감이 불필요할 정도로 탄탄하고도 자연스러운 연기가 돋보인다. 이정은, 홍광호, 임창정, 정문성, 곽선영 등 뮤지컬과 TV, 영화에서 큰 인기를 얻는 배우들도 이 무대를 거쳤다.

추운 겨울이 다시 찾아오고 있는 계절, 따스한 뮤지컬 《빨래》를 관람하기에 지금이 적기다. 다중이용시설의 운영시간 제한 규제가 완화되고, 공연·전시·영화 등 7개 분야에 문화소비할인권 지원도 재개되었기 때문이다. 11월1일부터 인터파크, 예스24, 멜론티켓, 티몬, 티켓링크, 위메프, 빵야티브이 등 8개 온라인 예매처를 통해 공연 예매 시 8000원의 관람료 할인권인 ‘소소티켓’을 이용할 수 있다. 2주마다 1회당 1장씩 최대 3만2000원(할인권 4장)을 다운로드해 사용할 수 있고 기존 할인과도 중복 적용이 가능하다. 대학로 유니플렉스2관에서 내년 5월29일까지.  

관련기사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