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가 바뀌어도 대선판 여전히 맴도는 풍수와 무속
  • 조문희 기자 (moonh@sisajournal.com)
  • 승인 2022.01.29 10:00
  • 호수 16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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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후보 부부 ‘무속’ 논란 계속 이어져…野 “민주당도 18대 대선 때 당선 기원굿 해” 역공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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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왕이 될 상인가.” 영화 《관상》에서 수양대군 역을 맡은 배우 이정재의 대사로 유명한 말이다. 왕이 되고자 역모를 앞두고 있던 수양대군이 미래를 점치기 위해 관상가에게 던진 질문이었다. 수양대군뿐만이 아니다. 대다수 사람들은 미래를 알고 싶어 한다. 신년에 운세를 확인하거나 중요한 일을 앞두고 길일을 받아오는 것들은 모두 미래를 미리 들여다보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된다. 21세기 최첨단 사회라지만, 무속신앙은 여전히 우리 일상에 뿌리 깊게 박혀 있다.

정치도 예외는 아니다. 선거철이 가까워지면 용하다는 점집에 정치인들이 드나든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후보들의 관상을 비교하는 일은 부지기수이고, 풍수지리에 따라 조상의 묘를 이장했거나 선거사무실을 옮겼다는 일화는 숱하게 전해진다. 정치와 무속신앙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인 셈이다.

2022년 대선도 마찬가지다.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에게 ‘무속’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붙고 있다. 윤 후보는 지난해 경선 당시부터 손바닥에 적은 ‘왕(王)’자가 발각되면서 주술 논란에 휩싸였고, 천공스승이나 건진법사 같은 역술인과 관상가 노병한, 항문침 전문가 이병환씨 등과의 친분관계가 도마에 오른 바 있다. 최근에는 윤 후보의 부인 김건희씨가 “내가 되게 영적인 사람이라 도사들과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말한 사실이 공개돼 논란을 키웠다. 보수진영에서는 박근혜 전 대통령의 최측근이었던 최순실(최서원의 개명 전 이름) 사건을 계기로 무속인의 국정 개입을 최대 아킬레스건으로 꼽는다. 이 때문에 윤 후보를 둘러싼 무속인 논란이 계속된다면 ‘최순실 트라우마’를 재연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이 같은 사정은 여권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다. 더불어민주당은 윤 후보의 무속인 논란을 꼬집으며 “샤먼(무속신앙)이 국정을 결정해선 안 된다”고 공격했지만, 민주당도 과거 유명 역술인을 선거대책위원회 일원으로 임명한 사실이 드러났다. 하태경 국민의힘 의원은 지난 18대 대선에서 문재인 후보 측 시민캠프가 당선 기원굿을 한 사실을 공개하면서 “내로남불식 억지비방을 멈추라”고 비판했다.

지난해 10월 국민의힘 대선 경선 TV토론에 참가한 윤석열 후보의 손바닥에 '왕(王)'자가 적힌 모습(왼쪽)과 하태경 국민의힘 의원이 19일 공개한 18대 대선 당시 문재인 후보의 시민 캠프가 당선 기원 굿을 지내는 모습 ⓒ 시사저널
2021년 10월 국민의힘 대선 경선 TV토론에 참가한 윤석열 후보의 손바닥에 '왕(王)'자가 적힌 모습(왼쪽)과 하태경 국민의힘 의원이 1월19일 공개한 18대 대선 당시 문재인 후보 측 시민캠프가 당선 기원굿을 하는 모습 ⓒ시사저널

풍수지리 신경 쓰고 길일 받은 역대 후보들

역대 대선에서도 풍수지리와 무속신앙 논란은 끊이지 않았다. 독실한 개신교 신자로 알려진 김영삼(YS) 전 대통령조차 풍수지리를 외면하지 않았다. YS가 민자당(국민의힘의 전신) 대선후보 시절이던 1991년 당시 당은 서울 종로 관훈동에서 여의도로 당사를 옮겼다. 그러나 한 무속인으로부터 “관훈동 터가 좋아 이곳을 떠나면 결과가 안 좋을 수 있다”는 말을 전해 듣고는, 옛 당사에 YS의 사진을 그대로 걸어뒀다고 한다. 이듬해 YS는 야당의 김대중, 정주영 후보를 꺾고 대통령에 당선됐다. YS는 지난 2012년엔 풍수학계에서 유명한 황영웅 교수에게 “현충원에 아직 좋은 자리 남아있나”라며 묏자리를 알아봐 달라고 부탁한 것으로도 알려졌다.

천주교 신자이던 김대중(DJ) 전 대통령도 풍수지리 하면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DJ는 네 번째 대권 도전을 2년여 앞둔 1995년 선친 묘소를 옮겼다. 전남 신안에 있던 아버지 묘소와 경기도 포천에 있던 어머니 묘소를 경기도 용인 봉리산에 함께 이장했다. 당시 그 터는 “하늘에서 신선이 내려오는 명당”이라는 평가를 받았다고 한다. DJ가 1997년 대선에서 승리한 후 정치권에서는 한때 풍수 열풍이 일기도 했다. DJ의 경쟁자였던 이회창 당시 후보는 그 뒤 세 차례나 조상 묘를 이장했다.

대통령이 국가의 중요한 결정을 앞두고 역술가에게 날짜를 받아왔다는 사례도 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대표적이다. 1990년대 초반의 언론보도를 보면, 박 전 대통령이 1972년 10월17일 유신 조치를 단행하기 전에 용하다고 소문난 점술가로부터 날짜를 받아왔다는 소문이 돌았다. 또 1987년 제13대 대선 날짜도 당시 전두환 정권의 청와대와 여당이 점술가에게 노태우 민정당 후보가 승리할 수 있는 날짜를 물어 결정한 것이라는 보도도 나왔다.

박근혜 대통령이 2013년 2월25일 서울 광화문에서 열린 ‘희망 열리는 나무’ 오방낭 제막식에서 메시지를 낭독하고 있다. © 사진공동취재단
박근혜 전 대통령이 2013년 2월25일 서울 광화문에서 열린 ‘희망 열리는 나무’ 오방낭 제막식에서 메시지를 낭독하는 모습 © 사진공동취재단

최순실 사건 계기로 정치권에선 ‘무속 OUT’

그래도 이 정도까지는 당시 국민 정서와 크게 어긋나지 않았다. 하지만 박근혜 전 대통령은 비선 실세로 알려진 최순실씨가 무속신앙을 국가 주요 행사에 동원한 것을 계기로 큰 지탄을 받았다. 가령 우주와 인간을 이어주는 기운을 지녔다는 ‘오방낭’을 대통령 취임식에 등장시키는 식이었다. 최순실씨의 아버지인 고 최태민 목사도 무속적 성향이 많은 인물로, 박근혜 정부의 ‘미신 통치’ 논란을 가중시켰다.

여야를 막론하고 무속과 역술의 힘을 빌리려는 사례가 나오지만, 정치권에선 이 같은 시도를 이젠 자중해야 한다는 경고도 나온다. 서복경 더가능연구소 대표는 “정치인이 개인적으로 무속신앙을 찾는 것은 용인 될 여지가 있지만, 공공 영역에 가지고 들어오는 순간, 사달이 난다”고 평가했다. 서 대표는 “최순실 사건을 계기로 무속신앙이 공적 업무에 개입해선 안 된다는 암묵적 합의가 생겼다”며 “비과학적인 무속의 문제가 세금이 들어가는 공적 행위에 영향을 끼쳐선 안 된다는 것”이라고 부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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