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만장굴, 완전한 암흑과 빛 한 줄기의 경이로움
  • 정재숙 전 문화재청장 (johantol61@gmail.com)
  • 승인 2022.01.27 12:00
  • 호수 16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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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숙 전 문화재청장의 ‘나의 설 문화유산 여행지’ 두 곳
뭍에서 절대 만날 수 없는 억세고 질긴 바람이 제주의 매력
부여, 검소하나 누추하지 않은 古都…국립박물관 꼭 들르시길

문화재청은 보람차고 즐거운 일터였다. 남들은 별러서 돈 들여 찾아가는 문화유적지를 월급 받으며 주유(周遊)했다. 복이다. 하늘의 독수리부터 땅 밑의 화석까지, 보호해야 할 문화유산이 전국 방방곡곡에 흩어져 있으니 청장 재임 2년4개월 동안 길 위에 있는 시간이 많아 ‘이동 중’이란 별명까지 얻었다. 소임을 마치고 국민의 한 사람으로 돌아온 지 1년여,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이 “그래, 어디가 제일 좋더냐”다. 한마디로 다 좋았다. 산골짜기에 묵묵히 서있는 ‘나 홀로 문화재’ 앞에 서면 문화유산에 켜켜이 쌓인 사람들의 땀내가 절절해서 속울음을 삼켰다. 그래도 더 그리운 곳이 있긴 하다. 공무(公務)를 벗어나니 발걸음이 가벼웠다. 기억을 더듬으며 떠났다. 앞으로도 또 가게 될 ‘나만의 보물 지대’ 두 곳으로.

가고, 또 가도 새 얼굴을 내미는 곳이 제주도다. 문화재청이 2020년부터 시작한 ‘세계유산축전’의 첫 선발지가 ‘제주 화산섬과 용암동굴’이었다. 시간이 꽤 흘렀는데도 그때 추억이 삼삼하다. 1년에 딱 한 번, 축전 기간에만 문을 여는 미공개 동굴 체험을 한 뒤의 기록이다.

제주 만장굴
제주 만장굴
제주 산굼부리
제주 산굼부리

세계유산이 된 그 섬에 가고 싶다-제주

“완전한 암흑. 빛이 사라졌다. 눈앞에 손을 가져와도 보이지 않는다. ‘톡 토독.’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가 점점 또렷이 들린다. 칠흑보다 더한 새까만 어둠뿐이다. 생명 탄생 이전의 세계가 이랬을까. 1분 남짓 시공을 가늠할 수 없는 정지 상태에 몸을 맡긴다. 이마가 서늘해진다. 제주시 구좌읍 만장굴 2입구 구간. 손전등을 켜자 다시 빛이 돌아왔다. 안전모의 전등까지 켜니 시야가 확보되면서 잠깐 떠나 있던 세상 속이다. 동굴 안은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빛이 완전히 차단되는 공간. 이 순간을 경험하는 것만으로도 동굴 탐험은 값어치가 있다. 트레킹 코스였던 ‘불의 숨길’은 자연과 교감하는 제주만의 매력이 물씬했다. 거문오름에서 용암동굴계의 흐름을 따라 불이 흘러갔던 바다 입구까지 약 21km 구간을 세 개의 길, ‘용암의 길’ ‘동굴의 길’ ‘돌과 새 생명의 길’로 냈다. 제주 여행객이 사랑하는 올레길이 제주의 속살을 보는 치유의 길이라면, 용암길은 인류의 기원까지 생각하는 사색의 길이었다. 한국 근대사에서 큰 고난을 겪은 제주 땅의 아픔, 제주 사람들의 살 냄새가 곳곳에 녹아들어 있는 길이라 걸을 때마다 새롭고 소중하다.”

2021년 12월31일 한 해의 마지막 날, 다시 제주를 찾았다. 봄, 여름, 가을 제주는 여러 번 갔는데 겨울 제주는 처음이었다. 발이 눈에 푹푹 빠지는 ‘사려니 숲길’ 들머리에서 도종환 시인의 시비(詩碑)를 만났다. “(…) 길을 끊어 놓은 폭설이/ 오늘 하루의 속도를 늦추게 해 준 걸/ 고맙게 받아들인 삼나무 숲길/ 문득 짐을 싸서 그곳으로 가고 싶은/ 길 하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한라산 중산간/ 신역(神域)으로 뻗어 있는 사려니 숲길 같은.”

이 시에 취해서 천연기념물인 산굼부리에 올랐다. 뭍에서는 절대 만날 수 없는 억세고 질긴 바람이 어찌나 세차게 몸을 흔들던지 해묵은 마음의 때가 날아가는 환상을 보았다. 바다보다 더 장한 겨울 억새밭 앞에 오래오래 서있었다.

부여 정림사지 5층 석탑
부여 정림사지 5층 석탑
백제 금동대향로

백제의 부활을 꿈꾸는 옛 도읍-부여

충남 부여군은 선친(先親)의 고향이다. 청장 시절에 부여에 가면 박정현 군수가 ‘부여의 딸’이라고 소개해 웃곤 했다. ‘2020 문화유산 방문캠페인-백제고도의 길’ 행사 덕에 오랜만에 부여를 찾은 때가 2년 전 가을이었다. 부여는 여느 고도(古都)보다 발굴이나 복원 작업이 더딘 지역이다. 그런 느린 걸음이 부여의 멋이자 맛이랄까. 처음 오른 곳은 부여읍 쌍북리 금성산 정상. 옛 도읍 부여의 자태를 한눈에 가늠할 수 있는 명당이다. 121m 금성산 마루에서 부여 읍내를 굽어보면 부소산이 우뚝, 백마강이 돌아치고 남녘으로 너른 들판이 펼쳐진다. ‘검소하지만 누추해 보이지 않는다’는 그 경지다. 업무수첩에 그날의 단상이 남아있다.

“부여는 공주, 익산과 더불어 ‘백제역사유적지구’라는 이름으로 2015년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이때 관북리 유적 및 부소산성, 정림사지, 능산리 고분군 등과 함께 여덟 곳 고고학 유적지 중 하나로 꼽힌 곳이 부여 나성이다. 폐허의 미학이라 부를 만한 순정하면서도 쓸쓸한 기운이 흐른다. 저 흙 속에 순절한 백제인의 뼈가 산화되어 있다. 어쩌면 저대로, 옛 풍경이 녹아든 그대로 놓아두는 것이 더 진실한 고도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지난해 11월27일, 다시 발길이 부여로 향하게 된 데는 요산(樂山) 윤재환(59) 선생 덕이 컸다. 부여 토박이인 윤 선생은 타지로 떠돌면서도 늘 고향으로 회귀하며 부여 길라잡이로 살아왔다. 그가 쓴 『윤재환의 신 부여팔경』은 수십 년 그가 몸과 마음으로 받들어온 부여에서 새롭게 발견한 여덟 군데 빼어난 경치를 색다르게 더듬은 부여 답사기다. 그의 선친인 윤달현 선생은 고향인 부여에 생활 배드민턴을 보급한 선구자로 1980년대 초반 부소산에서 배드민턴 동호회를 조직해 협회로까지 키운 분이다. 고인을 기려 해마다 기일 즈음해 ‘윤달현배 배드민턴대회’가 열리는데 그 경기에 초대받은 것이다. 옛 도읍지와 배드민턴의 만남, 향수를 자극하는 뭔가가 있다.

28일 아침, 대회 장소인 부여군민체육관 가는 길에 부여여고 안에 있는 ‘팔각정’을 찾았다. 백제 왕궁의 우물로 추정되는 곳이지만 시멘트로 발라져 무슨 유물인지 알아보기가 힘들었다. 교문에서 운동장을 거쳐 교사 안쪽으로 한참 들어와야 있는 곳인데도 입구에 안내판조차 없어 아는 이 소개가 없으면 찾기 힘들어 아쉬웠다. 백제의 왕이 마셨다는 전설이 전해져 어정(御井)이라 부른다는데 연구가 부족해 보였다. 사비백제기 왕궁 터를 추정하는 데 중요한 단서라니 백제 부활의 한 단초가 될 수 있겠다 싶었다. 문화유산의 전승은 유물에 해석과 이야기를 입히는 과정이 중요함을 새삼 깨닫는다.

부여에 가면 으레 들르는 곳이 정해져 있다. 한 번은 들여다봐야 마음이 편한 고향의 얼굴이다. 부여읍 금성로 5번지 국립부여박물관에서는 ‘백제 조형미의 대서사시’라 칭송되는 국보 ‘백제 금동대향로’를 친견한다.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다’는 백제미의 본질을 거듭 되새긴다. 주암리 은행나무 앞에 서면 돌아가신 아버지를 만나는 기분이 든다. 키가 23m에 둘레는 8.6m로 나이가 1500살로 어림되는 이 대장 나무는 천연기념물 중 최고령이다. 장정 여섯이 팔을 펼쳐야 겨우 껴안을 수 있다는 은행나무를 안는다. 따듯하다. 늘 ‘부여로 돌아가고 싶다’ 하셨으나 소원을 이루지 못한 선친 대신이다.

부여문화원 전시실에서 ‘백마강상 백제여적(白馬江上 百濟餘蹟)’을 감상했다. 부여군 외산면 반교리에 집을 짓고 부여 군민임을 자랑하는 유홍준 제3대 문화재청장은 백제유물을 수집해 기증하고 있다. 이번 전시가 벌써 8회째라니 제2의 고향을 섬기는 그의 지극정성이 느껍다. 그가 쓴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제3권에 나오는 부여 편 제목이 ‘산에, 언덕에 피어날지어이’다. 답사기는 이렇게 갈음한다. “정림사탑은 폐허의 왕도 부여의 ‘블루스’이다.” 귓가에 감기는 블루스의 장단에 젖어 정림사지로 발길을 돌린다. 백제의 여운이 은은한 석탑 앞에서 문득 돌의 한마디를 들었다. “시작도 못 했어, 부여!”

유홍준 전 청장의 유물 기증전 포스터(왼쪽), 부여여고 교정 구석에 자리한 ‘팔각정’

지역소멸 문제를 푸는 문화유산 여행지

청장으로 일할 때 각 지방자치단체장과 만나면 대개 인구절벽과 지역소멸을 풀어야 한다는 숙제를 안고 고심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그 돌파구 중 하나가 문화유산이었다. 정주인구가 늘어나지 않는다면 그 대안은 관계인구다. 주거지 외 특정 지역을 자주 방문하면서 ‘체류형 관광’을 하고 두 지역 간 거점 생활 등 다양한 방식으로 지역과 교류해 지역 활성화에 도움이 되는 사람들을 관계인구라 정의한다. 관계인구가 매력을 느끼는 핵심이 지역의 자연유산을 포함한 문화유산이라는 것을 제주와 부여에서 체험했다. 지난 1년 사이 제주와 부여를 오가며 문화유산과 관계인구 사이의 가능성을 탐색한 것은 여행을 넘어서는 덤이었다. ‘어제를 담아 내일에 전한다’는 문화재청의 표어가 청장 시절보다 더 절실했으니, 늘 깨달음은 뒤늦게 오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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