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 LA 그리고 여름밤 《리코리쉬 피자》
  • 이은선 영화 저널리스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2.02.19 13:00
  • 호수 16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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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천진한 폴 토마스 앤더슨의 영화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의 연출작 중 무엇을 먼저 접했느냐에 따라 그의 영화에 대한 인상은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 《데어 윌 비 블러드》(2007)와 《마스터》(2012) 혹은 《팬텀 스레드》(2017) 같은 작품은 폭력적 광기가 온몸을 육박해 오는 경험을 남긴다. 반면 《리노의 도박사》(1996), 《부기 나이트》(1997), 《매그놀리아》(1999), 《펀치 드렁크 러브》(2002) 등은 장르영화의 클리셰를 벗어나는 비전형적 재미를 무겁지 않게 선사하는 작품이다. 신작 《리코리쉬 피자》는 후자에 속한다. 영화는 두 주인공이 만나고 일련의 일들을 겪는 1973년 미국 캘리포니아 샌 페르난도 밸리로 관객을 데려간다. 이 여름날의 이야기는 특별한 것이 하나도 없지만, 동시에 가장 특별한 풍경들로 가득하다. 이것은 결코 단순한 말장난이 아니다.

영화 《리코리쉬 피자》 포스터ⓒ유니버설 픽쳐스 제공
영화 《리코리쉬 피자》 포스터ⓒ유니버설 픽쳐스 제공

전에 없는 천진한 생동감과 낭만으로 가득

창작물에는 만드는 사람의 시선이 반영된다. 폴 토마스 앤더슨의 영화는 언제나 사회를 예리하게 가로지른다. 1970년대 미국 포르노 산업의 이면을 독특한 방식으로 해부해낸 《부기 나이트》(1997), 다층적 인물 구조를 통해 자본주의의 천박성과 가족주의의 해체를 바라본 《매그놀리아》(1999), 19세기 말~20세기 초 오일 러시에 휩쓸려 유전 발굴에 나섰던 탐욕적인 석유 개발자들의 이야기 《데어 윌 비 블러드》, 전쟁이라는 국가적 트라우마가 불러온 개인의 비극을 집요하게 탐구한 《마스터》 등이 그 생생한 증거다.

폴 토마스 앤더슨의 영화에는 타협이 없다. 도덕은 애초에 중요한 관심 소재도 아니다. 오히려 그의 영화적 시선은 줄곧 비틀린 욕망과 개인의 강박, 궤도를 이탈해 어긋나는 관계들로 향한다. 로맨틱 코미디의 성격을 띤 《펀치 드렁크 러브》에서도, 미국을 벗어나 처음으로 영국을 배경으로 만든 《팬텀 스레드》에서도 이 법칙은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신작 《리코리쉬 피자》는 전에 없이 천진한 생동감과 낭만으로 가득하다. 이야기 자체가 그렇다기보다 이를 대하는 감독의 태도가 그렇게 느껴진다. 영화에는 1970년대에 샌 페르난도 밸리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 감독 개인의 추억과, 그의 지인이자 할리우드의 유명 제작자인 개리 고츠먼의 성장담이 얽혀 있다. 극 중에서 열다섯 살 소년 개리(쿠퍼 호프먼)는 어린 시절부터 배우로 활약하고 있으며, 어른들의 어깨너머로 배운 사업 수완을 발휘해 물침대와 핀볼 머신 게임장 사업까지 확장해 간다. 이는 감독이 고츠먼의 실제 사연을 동의를 얻어 시나리오에 반영한 것이다.

개리의 여름에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존재는 사업이 아닌 알라나(알라나 하임)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난 장소는 개리가 다니는 학교. 알라나는 학생들 사진을 찍어주려고 온 사진사의 보조로 일하고 있다. 우연히 알라나를 보고 호감이 생긴 개리는 적극적으로 말을 걸고, 20대 여성인 알라나는 소년의 치기를 적당히 무시하면서도 박자를 맞춰주며 대화를 나눈다.

이후 이야기는 하나의 사건으로 수렴해 흐르지 않는다. 두 사람은 점차 가까워지고, 알라나는 개리의 다른 친구들처럼 그의 사업을 돕는다. 동시에 할리우드 배우의 꿈을 꾸기도 한다. 석유 파동 사태는 잊을 수 없는 해프닝의 밤을 선사한다. 이후 알라나는 우연히 선거 벽보를 보고 새로운 정치인을 뽑기 위한 선거운동에 참여하기도 한다. 《리코리쉬 피자》는 두 사람이 겪는 이 모든 시간을 비선형적인 방식으로, 하지만 더없이 생생하게 보여준다.

ⓒ유니버설 픽쳐스 제공
영화 《리코리쉬 피자》 스틸컷ⓒ유니버설 픽쳐스 제공

아리송한 제목의 뜻

그러니까 이 영화는 어떤 한 시절에 관한 이야기다. 상황과 마음은 계속 엇갈리고, 여기보다 어딘가를 꿈꾸며 계속 분주하게 달리지만 실패만 맛보는 젊음의 날들. 하지만 돌아보면 바보 같은 실수를 저질러도 괜찮았고, 심지어 그런 과정들 덕에 한껏 아름다울 수 있었던 순간들을 향한 찬가다. 폴 토마스 앤더슨의 카메라는 낮에는 서로를 향해 혹은 함께 손을 맞잡고 힘껏 달리고, 밤에는 여기저기에서 황당무계한 사건들이 아무렇지 않게 벌어지는 1970년대의 LA를 부지런히 포착한다. 마치 그것이 세상의 전부인 것처럼.

제목인 《리코리쉬 피자》는 영화의 서사와는 별다른 접점이 없다. 일단 피자 메뉴 이름이 아니다. 당시 LA에 있던 레코드 가게 체인점 이름이며, 그렇다고 극 중 인물들이 들르는 장소도 아니다. 감독이 그 시절을 떠올렸을 때 머릿속에 가장 상징적으로 남는 단어여서 붙인 제목일 뿐이다. 특정 장면에서 폭발적인 활약상을 보여주고 퇴장하는 인물인 잭 홀든(숀 펜)과 존 피터스(브래들리 쿠퍼)의 실제 사연과 비하인드 역시 소소한 재미가 되겠지만, 그 역시도 이 영화에서 꼭 챙겨야 할 중요한 정보는 아니다.

《리코리쉬 피자》에서 가장 중요한 건, 인물들이 마음의 자리를 찾아가는 과정 그 자체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났을 때 알라나와 개리는 청소년기를 채 벗어나지 못한 성인과 어른인 척하는 소년이다. 알라나는 인생의 방향을 뚜렷하게 잡지 못하고 부유하는 인물이며, 개리는 조숙한 기업가처럼 굴지만 알라나를 앞에 두고 콜라를 주문하는 어린 학생이다. 영화는 이 둘이 나누는 별 의미 없는 대화들, 서로에게 관심 없는 척하며 상처 주는 순간들, 실수하며 방황하다 사랑을 깨닫는 순간들을 담는다. 그리고 결국 굽이굽이 돌아가는 그 모든 길이 인생을 수놓는 순간들이라는 걸, 내가 누구를 바라보고 무엇을 원하는지 알게 하는 시간들이라는 것을 일깨운다.

폴 토마스 앤더슨은 뮤직비디오 연출로 인연을 맺은 밴드 하임의 멤버인 알라나 하임을 알라나 역에,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돈독한 영화적 동지였던 필립 시모어 호프먼의 아들인 쿠퍼 호프먼을 개리 역에 캐스팅했다. 둘 다 첫 연기지만, 1970년대 여름밤의 독특한 낭만을 재연하기에 모자람 없이 매력적인 배우들이다.

아카데미 시상식까지

폴 토마스 앤더슨은 그간 아카데미 시상식과는 별 인연이 없던 감독이다. 《부기 나이트》와 《매그놀리아》가 각본상, 《데어 윌 비 블러드》가 각색상과 감독상 그리고 작품상, 《인히어런트 바이스》가 각본상, 《팬텀 스레드》가 작품상과 감독상 후보에 고루 올랐지만 수상에서는 번번이 고배를 마셨다. 《리코리쉬 피자》는 어떨까. 2월8일 발표된 제94회 아카데미 시상식 후보 발표에서 이 영화는 작품상과 감독상, 각본상까지 3개 부문에 이름을 올렸다. 하지만 이번 역시 수상 가능성은 그다지 높지 않은 편이다. 올해에는 넷플릭스와 애플TV 플러스 등 OTT 작품들의 선전이 기대된다. 총 10개 부문 후보에 오른 드니 빌뇌브 감독의 《듄》을 제치고 최다 부문 후보 선정작이 된 작품 역시,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인 《파워 오브 도그》다. 제인 캠피온이 연출한 이 작품은 총 12개 부문에 후보로 올랐다. 시상식은 오는 3월27일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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