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천장에 ‘틈’ 만들었지만 우려도 여전
  • 오종탁 기자 (amos@sisajournal.com)
  • 승인 2022.04.21 07:30
  • 호수 16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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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산 2조원 이상 상장사 신규 사외이사, 여성이 40% 차지
개정 자본시장법 시행 앞두고 수요는 폭증하는데 후보 풀은 좁아

세계 3대 사모펀드 운용사(운용자산 기준) 중 하나인 칼라일의 이규성 최고경영자(CEO)는 지난해 9월 미국 CNBC방송에 출연해 “칼라일이 투자한 회사 가운데 (성별, 인종 등의) 다양성이 높은 이사회를 가진 곳이 그렇지 않은 곳보다 12% 빠르게 성장했다”고 전했다. 이한상 고려대 경영대학 교수도 “여성, 소수인종 등이 이사회에 다수 참여한 기업이 경영 성과가 더 좋다는 결론을 내린 해외 경영학 논문이 많다”며 “구조적 차별이 상대적으로 덜한 미국·유럽에서 자발적으로 여성 이사를 선임하는 기업이 많은 가운데 나온 결과”라고 말했다. 

ⓒ일러스트 김세중
ⓒ일러스트 김세중

여성 사외이사 모시기에 분주한 기업들 

국내의 경우 남성 위주로 이사회를 꾸린 기업이 대부분이라 관련 비교 분석을 하기도 힘든 상황이다. 다만 2020년 2월 자본시장법 개정으로 여성 이사 할당제가 생기면서 변화의 물꼬가 트였다. ‘자산총액 2조원 이상인 상장사는 이사회 이사 전원을 특정 성(性)으로 구성할 수 없다(여성 이사를 반드시 한 명 이상 선임해야 한다)’는 의무조항을 삽입한 것이다. 이 조항은 같은 해 8월5일부터 시행됐으나 2년간의 유예기간을 부여했다. 실질적인 시행일은 올해 8월5일인 셈이다. 

시사저널 취재를 종합하면, 개정 자본시장법 시행을 코앞에 두고 여성 사외이사를 뽑는 기업이 잇달아 등장하고 있지만 기대와 우려도 교차하는 중이다. 기업 평가 사이트 CEO스코어가 자산총액 2조원 이상 상장사 172곳의 현황을 분석한 내용을 보면, 올해 정기주주총회 등을 거쳐 선임된 신규 사외이사 172명 가운데 68명(39.5%)이 여성이었다. 김효근 이화여대 경영대학 교수는 “공무원 선발, 국회 진출 등 여성 할당제를 시행할 수 있었던 분야에서는 빠른 속도로 유리천장이 허물어져 왔는데, (여성 할당제가 없는) 민간기업은 남성 임원들로 철옹성을 쌓고 여성에게 유독 자리를 내주지 않았다”며 “여성은 으레 임원으로서의 전문성과 지식, 판단력, 실행력 등이 부족할 것이라 여기는 편견을 깨뜨리기 위해 자본시장법이 개정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자본시장법 개정 첫해인 2020년까지는 별다른 변화가 없다가 지난해부터 기업들이 본격적으로 여성 사외이사 선임에 나서기 시작했다. 헤드헌팅 업체 유니코써치에 따르면, 2021년 매출 기준 상위 100대 상장사의 사외이사 448명 중 여성 사외이사는 67명(14.9%)으로 2020년 35명(7.9%)보다 32명 늘어났 다. 지난해 처음 사외이사가 된 119명 중 35.3%(42명)가 여성이었던 영향이다. 100대 상장사 중 여성 사외이사가 한 명 이상인 곳은 30개에서 60개로 증가했다. 기업들이 개정 자본시장법 시행을 앞두고 임기 만료로 물러난 사외이사 후임으로 여성을 전진 배치하며 이 같은 결과가 나타났다. 재계의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 열풍도 한몫을 담당했다. 

ⓒ연합뉴스
3월16일 경기도 수원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삼성전자 정기주주총회ⓒ연합뉴스

구인난 속 ‘중복 선임’도 

올해 여성 사외이사를 신규 선임한 주요 기업에는 LG화학, LG디스플레이, LG이노텍, 신세계백화점, 하이트진로 등이 있다. LG화학은 이현주 KAIST 생명화학공학과 교수와 조화순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를, LG디스플레이는 강정혜 서울시립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를, LG이노텍은 이희정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를 각각 선임했다. 신세계백화점에는 최난설헌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가, 하이트진로엔 이은경 한민내장 대표이사가 사외이사로 들어가게 됐다. 

남초 현상이 유독 짙었던 국내 건설사들에도 여성 사외이사가 줄줄이 최초로 진입했다. DL이앤씨는 신수진 한국외대 초빙교수를, 삼성엔지니어링은 최정현 이화여대 환경공학과 교수를, 태영건설은 양세정 상명대 경제금융학부 교수를, 아이에스동서는 강혜정 계명대 음악공연예술대학 교수를 첫 여성 사외이사로 선택했다. 

지난 3월 여성 사외이사 임기가 만료된 삼성전자, SK이노베이션, 아모레퍼시픽, 포스코인터내셔널, KTB투자증권 등도 후임을 역시 여성으로 선임했다. 삼성전자에서는 한화진 한국환경연구원(KEI) 명예연구위원이, SK이노베이션에선 박진회 전 한국씨티은행장이, 아모레퍼시픽에선 최인아 전 제일기획 부사장이, 포스코인터내셔널에선 이행희 한국코닝 대표이사가 새로 이사진이 됐다. 

아직 여성 사외이사를 선임하지 못한 기업들도 오는 8월 개정 자본시장법 시행 전까지 적임자를 찾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중이다. 기업들이 선호하는 여성 사외이사의 직업군(출신 이력 포함)은 학자, 법조인, 기업인, 관료 등 순으로 나타나고 있다. 여성 사외이사 수요는 폭증하는데 후보 풀은 좁은 탓에 구인난을 겪거나 타사에서 이미 선임한 인물을 중복으로 ‘모시는’ 사례도 속출했다. 

일각에선 개정법 시행과 ESG 경영평가 부담에 떠밀려 어쩔 수 없이 여성 사외이사를 뽑는 기업이 적잖은 만큼 내실을 다지기까지 다소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본다. 대외적으로 밝힐 수 있는 지위에 있지 않아 익명을 요구한 한 대기업 사외이사(남성)는 “여성 이사 할당제의 취지에는 공감하나, 급하게 여성 사외이사를 구하다가 회사 업무와 너무 동떨어진 인물을 앉히는 기업이 허다해 우려스럽다”면서 “이런 분위기가 계속 이어질 경우 여성 사외이사 참여의 장점은 무색해지고 이사회가 경영진 결정에 무조건 찬성표를 던지는 ‘거수기’란 비판만 증폭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교육·네트워킹 프로그램 만들어야” 

서진석 SK텔레콤 ESG추진그룹 부장은 “왜 이사회에서 여성 비율을 늘려야 하는지를 설명할 목적이 불분명하다면 설사 여성 이사를 늘렸다 할지라도 표면적인 변화에 그칠 뿐, 목적이 추구하는 가치가 다른 이니셔티브 또는 전사 조직으로 확산되기 어려울 듯하다”며 “어떤 목적과 관점에서 여성 이사 확대를 추진할 것인지부터 먼저 숙고해볼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김혜양 유니코써치 대표와 이한상 교수는 중장기적인 관점에서 여성 사외이사의 역량을 강화하는 장치가 절실하다고 입을 모은다. 김 대표는 “(늘어난 수요에 발맞춰) 더 많은 예비 여성 사외이사 인재를 육성하고 교육하는 프로그램을 체계적으로 구축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기업 경영 과정에서 구조적 차별을 해소하는 것은 글로벌 트렌드일 뿐 보수냐 진보냐를 따질 이슈도 아니지만, 인프라가 충분치 않은 상황에서 (해외와 달리) 법으로 여성 이사 할당제를 강제하니 당장은 잡음이 생기는 게 불가피해 보인다”며 “제도가 잘 자리 잡게 하기 위해선 재계에서든 학계에서든 교육, 네트워킹 등을 통해 여성 사외이사 후보군을 양성하는 시스템이 나와줘야 한다”고 제언했다.   

■ “여성을 이사회에서 배제할 빌미 안 주려고 시작” 

이화여대 ‘여성 사외이사 전문과정’ 이끌어온 김효근 교수 미니 인터뷰 

이화여대 경영전문대학원은 국내에서 유일하게 ‘여성 사외이사 전문과정’을 운영하고 있다. 2020년 출범 후 1기생 42명, 2기생 42명, 3기생 37명 등 여성 사외이사 후보 121명을 배출했다. 한국타이어앤테크놀로지 ESG위원회의 초대 위원장인 이미라 사외이사가 1기 출신이다. 

1기부터 현재 진행 중인 4기에 이르는 모든 과정을 준비하고 이끌어온 김효근 교수는 “오랫동안 양성 평등과 여성의 사회 참여 확대를 위해 노력해온 이화여대였기에 여성 사외이사 전문과정을 홀로 만들고 유지할 수 있었다”며 “여성이 (남성에 비해) 경력이 상대적으로 부족하고 이사회 참여 경험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기업 경영에서 배제하려는 빌미를 주지 않으려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이화여대 경영전문대학원은 한국기업거버넌스포럼과 협력해 커리큘럼을 구성했다. 15주간 수강생들에게 경영 리더십, 기업 지배구조, 전략적·재무적 의사결정, ESG 경영, 사외이사 관련 법률·규정, 최신 회계 트렌드 등 여성 사외이사가 갖춰야 할 전문지식과 실전 사례를 전달한다. 수료자에게는 수료 증서와 더불어 이화여대 경영전문대학원에 의뢰된 기업의 여성 사외이사 후보 추천 그룹에 가입할 수 있는 자격도 주어진다. 

지금까지 국내 대기업과 외국계 기업의 전·현직 임원, 언론사·금융기관 중견 관리자, 다양한 공공 부문 리더 등이 이 과정을 거쳐갔다. 김 교수는 “사회에서 이미 전문성과 성실성 등을 인정받은 수강생들이 현대 이사회의 이사로서 숙지해야 할 내용들, 특히 ESG처럼 전혀 새로운 경영 환경에 대해 ‘타이트하게’ 배워나가며 한층 더 업그레이드된다”고 강조했다. 

이어 김 교수는 “올해 개정 자본시장법 시행을 앞두고 실제로 기업 이사회의 일원으로 들어간 수료자들도 있다”면서 “남성 이사들이 지닌 관성에 물들지 않고 참신하게 이사회 본연의 역할을 잘 구현할 수 있겠다는 희망이 보여 보람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화여대 경영전문대학원도, 여성들의 경영 참여 확대도 아직 갈 길이 멀다. CEO스코어가 개정 자본시장법의 적용을 받지 않는 자산총액 2조원 미만 상장사 2040곳을 살펴보니, 여성 사외이사가 단 한 명이라도 있는 기업은 8.2%(168곳)였다. 나머지 91.8%(1872곳)는 사외이사 전원이 남성으로 구성된 것으로 조사됐다. 자산총액 2조원 이상 상장사의 여성 사내이사 비율도 2021년 기준 4.6%에 불과하다. 

김 교수는 “기업들의 고위 경영층이 한 번쯤 여성 인재를 믿고 패러다임을 바꿔보면 좋겠다”며 “여성 임원이 기업의 가치나 경영 성과에 얼마나 긍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지 과감히 실험해 보는 게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자산총액 2조원 이상 기업뿐 아니라 이하 기업에서도 사외이사 등 임원으로 여성을 영입해 보면 분명 장점을 알게 되리라 확신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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