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의 안부 따라 미술계 흐름도 바뀐다?
  • 반이정 미술 평론가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2.06.12 13:00
  • 호수 1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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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 만에 문 연 리움미술관의 첫 전시 《아트스펙트럼 2022》 주목
미술 지형의 변화에 따라 주류 미술 고립감도 확인

삼성미술관 리움은 4년이 넘는 휴지기를 접고 작년 10월 재개관했다. 올해 내놓은 첫 전시 《아트스펙트럼 2022》는 우리나라 동시대 미술의 진면모를 여러모로 확인시키는 전시회이자 현상이다.

필자는 과거 고학력 전문직 종사자들을 데리고 주류 미술판의 흐름을 볼 만한 전시회에 간 적이 있었다. 그들이 “전시 내용이 뭔지 통 모르겠다”거나 “이미 작고한 옛 화가들 정도를 알고 있다”고 털어놔서 흠칫 놀랐던 기억이 있다. 그들에게 《아트스펙트럼 2022》를 관람시킨다면 한층 더 어리둥절했을 것이다. 전시 타이틀이 말해 주듯 국내 화단에서 떠오르는 미술가들의 다채로운 스펙트럼(범주)을 선별한 전시회로, 전시 중간에 수상자를 발표하는 서바이벌 형식을 취한다.

ⓒ 리움미술관 제공
 《아트스펙트럼 2022》 전시 전경ⓒ리움미술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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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모 작가의 시간-예술 거래소, 2022ⓒ리움미술관 제공

동시대 미술의 진면모 확인

전시에 선발된 라인업은 미술 현장에서야 힙하게 통할 테지만 일반 관객에겐 어리둥절할 동시대 미술의 최전선을 보여주는 작가이리라. 이번 전시에선 수년 전부터 미술계의 도도한 트렌드로 자리 잡은 관객 참여형 작품, 새로운 형식의 회화, 단편영화 분량 길이와 내용을 담은 영상 작품, 레트로 감성에 호소하는 공간 설치물 등이 초대됐다.

회화 하면 그림 한 점을 벽에 부착해 관람하는 작품이기 마련이다. 이처럼 고정불변한 회화 설치에 연출이 가능할까? 정사각형 회화 여덟 점을 쌓아올려 마치 대형 벽면 회화처럼 구축하거나, 사물을 사실적으로 재현하거나(구상회화) 아무것도 재현하지 않거나(추상회화), 심지어 회화의 이분법을 넘어 삼각형, 사각형, 원형, 팔각형 같은 기본 도형들의 조합 속에 때로 과실을 끼워넣어 구상도 추상도 아니되, 전에 없이 각별한 시각 경험을 주는 전현선 작가의 새로운 회화도 있다.

수년 전부터 미술판에서 트렌드로 자리 잡은 게 관객 참여형 작품이다. 이번 전시에선 참여형 작품을 작가 둘이 출품했다. 번호표를 받아 줄을 서서 입장하게 만드는 김정모 작가의 설치 작품은, 관객이 입장 전까지 기다린 시간만큼 작품의 지분을 양도한다며 지분 양도 계약서를 관객에게 주는, 조금은 김빠지는 블랙코미디 같은 개념미술이다. 예술품이 소유되는 시스템을 차용했다는 게 작가의 설명이다.

또 다른 참여형 작품 중에는 밀폐된 공간 하나를 1980년대 한국 가정집처럼 꾸민 박성준 작가의 공간 설치물이 있다. 1명으로 인원 제한을 둔 이 설치물에 입장하면 1971년 3월에서 6공화국이 들어선 1989년 1월까지 시행된 국기 하강식 방송이나 군가가 틀어지기도 하고, 관객 홀로 남은 공간 설치물 내부가 갑자기 암전되기도 하는데, 아마도 1980년대까지 공습에 대비할 목적으로 전국에서 시행된 등화관제 훈련을 연상시키려 한 것 같다. 우리 현대사 중에서 1970~80년대의 경험을 재현해 레트로 감성을 자극하는 작업이다. 한편 이런 작업은 지금과는 다른 상황일 수밖에 없었던 1970~80년대의 조건을 손쉬운 소재로 희화화한 측면도 분명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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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재민 작가의 제자리비행, 2022ⓒ리움미술관 제공

올해 《아트스펙트럼 2022》의 수상자로 선정된 차재민 작가나, 안유리 작가의 경우처럼 비장한 주제를 담은 단편영화 수준의 영상 작품도 지금 미술계의 트렌드 중 하나다. 20분 내외의 러닝 타임인 이 영상 작품을 보고 있자니, 전시실에 들어온 관객들이 대개는 3분도 채 보지 않고 자리를 떴다. 영상에 담긴 묵직하고 비장한 주제에 눌린 채 20여 분을 견딜 재간이 없어지는 게 사실이다. 인용한 사례 외에도 퍼포먼스와 설치물을 결합한 작품, 미술관 공간의 건축 구조에 임의적인 변형을 가한 설치물 등도 전시에 초대됐다. 미술계의 주류 트렌드를 모은 전시지만, 솔직한 감상평은 신선도와 집중도 면에선 떨어진다는 쪽이다. 이건 리움미술관 기획의 문제일까? 그렇지 않다. 《아트스펙트럼》 전시는 2014년부터 외부 추천인의 참여로 작가를 선별하는 만큼 전시 구성의 대부분에 외부 전문가의 의견이 반영된다. 이 전시는 리움미술관의 취향이기보다, 당대 국내 미술판에서 검증된 미적 경향을 한층 뛰어나게 각색한 결과물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아트스펙트럼 2022》가 개막한 직후 어느 미술 전문 기자는 “한 번에 알 수 없는, 뭔지 모르겠지만 느낌 있는 작품들은 생동감이 넘친다”라고 기사에 썼더라. 칭찬할 목적에서 고른 수사법일 테지만, 생동감을 느낀 점을 빼면 정작 기자 자신도 전시의 맥락을 이해하지 못한 것처럼 들린다. 출품작 모두가 그렇진 않더라도, 관객 참여형 작품의 밋밋한 감동, 사회과학 서적에서나 다룰 법한 비장한 주제를 짧지 않은 러닝 타임에 담은 영상 작품의 답습적인 제작 태도 등 《아트스펙트럼 2022》는 관람의 매력보다 피로감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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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트스펙트럼 2022》 작가상 수상자 차재민 작가ⓒ리움미술관 제공

2010년 전후로 미술 패러다임 변화

미술계는 2010년 전후 어느 때부턴가 지형과 형질이 서서히 변화됐다고 나는 느끼고 있다. 미적 실험이 평가의 중심이던 패러다임에서, 미술시장에서 선전하는 지표가 평가의 중심이 된 패러다임으로의 전환이랄까? 시장 친화적인 미술이 전문가와 미술 애호가 사이에서 우세로 자리 잡자, 진중하게 사회문제를 다루거나 관람 피로감을 높인 실험작으로 채워진 주류 미술은 섬처럼 고립된 느낌이다. 현대미술이 현대인에게 손쉽게 이해돼야 한다고 믿는 게 아니다. 전문 영역인 현대미술을 이해하고 즐기려면 최소한의 소양부터 갖춰야 한다. 그 점을 전제하더라도 요즘 주류 미술은 전문가의 견지에서도 신선도와 재미가 적다. 이 같은 위기를 변화 중인 현대미술의 과도기 현상 정도로 나는 이해하려 한다.

이번 리움 전시가 국내 동시대 미술의 진면모를 ‘여러모로’ 확인시킨다고 앞서 말했다. 출품작의 경향 외에 또 다른 면모란 《아트스펙트럼 2022》의 기획 주체인 리움미술관이다. 작년 10월 재개관을 발표했으나 리움 운영위원장인 이서현 삼성복지재단 이사장이 재개관을 주도했을 뿐, 관장은 여전히 공석이다. 리움미술관은 삼성과 운명을 같이하고 있다. 2008년 삼성 비자금 특검 때 이건희 회장이 사퇴하자 홍라희 관장도 리움에서 물러났고, 당시 초대작가 선정까지 마친 《아트스펙트럼》은 연기도 아니라 취소됐다. 2017년 이재용 부회장의 기소로 이어진 삼성 특검 때 홍 관장이 리움에서 다시 물러났고 작년 10월까지 미술관 문을 사실상 닫고 있었다. 우리 미술계의 주도권을 쥔 삼성의 안부에 따라 한국 미술의 지평도 불안하게 흔들리는 걸 이 전시로 재차 확인한다. 그것이 《아트스펙트럼 2022》이 미술 지형의 변화에 따라 주류 미술의 고립감을 확인하는 전시이자, 주목할 만한 현상인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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