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美·EU·中·日에 기는 한국
  • 김상철 경제 칼럼니스트(전 MBC 논설위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2.06.15 10:00
  • 호수 1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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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체 패권국 경쟁 격화되며 ‘쩐의 전쟁’도 가속화
메모리 반도체 일변도 시장 탈피하는 게 관건

1986년, 미국과 일본은 일본산 반도체에 관세 100%를 부과하는 반도체 협정을 체결했다. 이른바 ‘플라자 합의’로 엔화 가치가 급등하면서 일본 수출 산업의 경쟁력이 크게 떨어진 때였다. 당시 세계 반도체 시장 점유율 상위 10대 기업 중 6개가 일본 기업이었다. 하지만 이후 일본의 반도체 산업은 쇠퇴하기 시작했고, 새롭게 등장한 나라가 한국이었다.

2021년 세계 반도체 시장 규모는 5837억 달러다. 그 가운데 1151억 달러어치가 우리가 생산한 반도체다. 우리나라는 반도체 강국이다. 정확히는 메모리 반도체 강국이다. 반도체는 정보를 기억할 수 있는 메모리 반도체와 컴퓨터에서 많이 접하는 CPU와 GPU, 스마트폰의 핵심인 AP, 모뎀 등 비메모리 반도체로 나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세계 메모리 시장 주력인 D램에서 70%, 전원이 끊어져도 데이터를 보관할 수 있는 메모리 반도체인 낸드플래시 시장에서 40% 이상을 차지한다.

ⓒEPA 연합
티에리 브르통 EU 집행위원회 집행위원이 2022년 2월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유럽 반도체법(European Chips Act) 관련 기자회견에서 발언하고 있다.ⓒEPA 연합

삼성·SK하이닉스 D램 점유율 70%

반도체 산업의 원천기술을 가장 많이 가지고 있는 나라는 물론 미국이다. 컴퓨터와 서버의 핵심인 중앙처리장치(CPU) 시장은 인텔이, 스마트폰의 두뇌인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AP)는 애플과 퀄컴이 주도한다. 그래픽 칩을 설계하는 엔비디아, M1 Ultra 칩을 설계하는 애플도 있다. 반도체를 설계하는 소프트웨어도 미국 제품이 표준이다.

하지만 미국이 본토에 가지고 있는 생산시설은 전 세계 반도체 생산시설 중 12.2%에 불과하다. 대만 21.5%, 중국 20.9%, 한국 16.5%, 일본 14%, 유럽연합은 4.3%를 차지한다. 대만과 중국, 한국과 일본을 합친 동아시아 지역의 생산 비중이 75%에 가깝다. 미국으로서는 반갑지 않은 일이다. 반도체는 단순한 전자 부품이 아니기 때문이다. 국가안보를 좌우하는 전략자산이며 미래 산업의 핵심이다. 이미 우리 생활은 반도체 없이는 불가능하다. 스마트폰에는 약 40개, 노트북에는 약 70개, PC에는 약 100개, TV에는 약 120개의 반도체 칩이 사용되고 있다. 내연기관 자동차에는 200개의 반도체 칩이 사용된다.

공급망의 안정성을 우려하는 미국은 정부 주도의 반도체 산업 육성 계획을 발표하고 자체 생산량 확대를 위한 공급망 재편 작업을 본격화하고 있다. 미국 의회도 올해 1월 국방수권법(NDAA)을 통과시켜 반도체 연구·개발(R&D) 및 투자를 국가안보 사항으로 만들고 연방정부 자금을 투입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마련했다. 미국은 현재 전 세계 생산량의 12%에 불과한 자국 내 반도체 생산량을 24%로 늘린다는 목표다. 미국의 세계 반도체 공급망 재편 계획이 겨냥하는 것은 당연히 중국이다. 미국은 이미 중국 내에서 첨단 반도체가 생산되고 활용되는 것을 막기 위해 핵심 장비나 부품의 반입을 막고 있다. 첨단 반도체 생산기지는 중국 외 지역에 두게 하면서 중국을 계속 통제하는 구도로 반도체 공급망 구조를 재편하겠다는 의도다.

우리로서는 미국의 기술동맹에 참여하지 않을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중국 시장을 포기할 수도 없는 것이 현실이다. 중국은 한국의 최대 반도체 수출 대상국이기 때문이다. 현지 생산도 많다. 삼성전자의 시안 공장은 세계 낸드플래시 메모리의 14%를, SK하이닉스의 우시 공장은 세계 D램의 14%를 생산하고 있다. 실제 중국은 전 세계 반도체 수요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2000년 20%에서 2019년 60%로 상승할 만큼 거대 시장을 갖고 있다. 국내 반도체 기업들은 중국 내 반도체 생산시설에도 꾸준히 투자를 늘려야 한다. 쉽지 않은 줄타기가 될 것이다.

반도체 산업의 특징은 고비용 구조다. 첨단 시설과 첨단 장비, 전문인력에 대한 대규모 투자가 필요한 산업이다. 그러나 천문학적인 투자 비용을 민간기업이 온전히 떠맡기는 벅찰 때가 있다. 문제는 우리 사회에서 성숙기를 맞은 산업에 정부가 나서 주도적으로 투자하기는 어렵다는 점이다. 일부 기업에 대한 특혜라고 보는 인식이 많은 탓이다. 우리의 반도체 특별법에 따르면 반도체 시설에 투자하는 대기업은 6%, 중견기업은 8%, 중소기업은 16%의 세액 공제를 받게 된다. 그러나 미국은 2024년까지 미국 내에서 반도체 제조 관련 시설투자를 할 때 최대 40%의 세액 공제 혜택을 제공한다. 차이가 작지 않다.

하지만 메모리 강국인 한국의 반도체 산업이 직면한 현실은 만만치 않다. 당장 메모리에만 치중된 구조부터 아쉽다. 메모리 강국인 우리나라가 비메모리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4%에 불과하다. 정작 세계 반도체 시장에서 더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비메모리 시장인데도 말이다. 전 세계 반도체 시장에서 메모리는 27%, 시스템 반도체를 포함한 비메모리는 73%를 차지하고 있다. 부품이나 소재를 해외에 의존해야 하는 우리 반도체 산업의 구조적 취약점도 있다. 아직 반도체 장비 국산화는 20%에 머물러 있다. 핵심 장비는 여전히 일본 아니면 미국에서 수입해야 한다. 그러다 보니 투자를 늘려도 대부분은 해외로 빠져나간다. 실제로 지난해 한국 내 반도체 장비 투자액 157억 달러 중 126억 달러가 해외로 나갔다. 관세청에 따르면 2020년 기준 국내에 수입된 반도체 장비 중 일본의 비중이 39.3%로 1위, 미국은 21.9%로 2위를 각각 기록했다.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눈치만 보는 한국

중국의 반도체 굴기는 미국의 견제로 늦어지고 있다. 중국은 제조 2025를 통해 반도체 자급률을 2020년까지 40%로 올리겠다고 했지만, 실제 2020년 자급률은 15.9%에 불과했다. 그러나 중국이 우리와의 격차를 꾸준히 줄여 나갈 것이란 점에는 변화가 없다. 중국의 반도체 설계 기술은 이미 미국에 필적한다. 중국 칭화대와 베이징대가 매년 배출하는 반도체 전문인력은 우리와 비교하기 어렵다.

중국이 갖지 못한 것은 장비와 인프라다. 우리는 국책 반도체 전문 연구소도 없고, 인력 공급과 R&D 인프라도 부족하다. 업계는 앞으로 3년 안에 최소한 7000명의 전문인력이 필요하다고 하는데, 정부가 세운 인력 육성 계획은 연간 1500명 수준이다. 정부가 2029년까지 차세대 시스템 반도체 R&D에 투자하겠다는 자금 규모도 2조5000억원에 불과하다. 미국 527억 달러, EU 430억 유로, 중국 1조 위안, 일본이 1조4000억 엔을 쏟아붓는 것과 대조되고 있다.

특히 반도체는 우리 수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20%에 이른다. 반도체 수출을 제외하면 한국 경제는 이미 성장이 멈춘 상태다. 반도체 시장을 둘러싼 글로벌 패권 경쟁은 갈수록 격화할 것이다. 자국 내 반도체 생산을 늘리기 위해 각국은 경쟁적으로 돈을 풀면서 대규모 세금 감면을 시행하고 공장을 짓는 데 필요한 부지와 전기, 용수를 정부가 나서서 제공하고 있다. 반도체 산업에서 펼쳐지고 있는 경쟁은 국가 차원의 경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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